푸틴이 건넨 빨간 약 ①
• 댓글 남기기이 글은 4월 4일 '피렌체의 식탁'에 발행된 이해영 교수의 글에 대한 반론으로 방향을 조금 바꾸면서 피렌체의 식탁에도 함께 발행되었습니다.
애초에 이 글은 "푸틴은 (이번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았다"는 일부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6주가 지난 지금 러시아군은 수도 키이우 주변에서 병력을 철수했고, 애초에 푸틴이 '탈나치화(Denazification)'라는 구실로 목표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의 제거 및 교체에 실패했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푸틴은 성공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혹은 '이 모든 게 푸틴의 의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접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지난달 29일 뉴욕타임즈 오피니언란에 등장한 "What if Putin Didn’t Miscalculate? (만약 푸틴이 잘못 계산한 게 아니라면)?"이라는 글이다.
'지난 몇 주 동안 러시아군이 보여준 실패가 사실은 실패가 아니라 푸틴의 큰 계획 안에 있는 것이라면'이라는 가정으로 전개되는 브렛 스티븐스(Bret Stephens)의 이 칼럼은 끝까지 읽어봐야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글이다. 그는 주류의 분석이 아닌 이런 "대안적(alternative)" 관점이 틀렸을 수 있지만, "전쟁과 정치, 인생에서는 당신의 적이 '영리한 여우(canny fox)'라고 생각하는 것이 '미친 멍청이(crazy fool)'로 치부하는 것보다 현명한 태도"라는 결론을 내린다. 푸틴이 성공했다기보다는 이것 역시 푸틴의 계획일 수 있다는 경계 태도를 늦추지 말라는 경고다.
하지만 그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스의 글은 많은 반박을 불러왔다. 그가 본문에서 "수도를 공략한 것은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술책이었고, 사실은 동부와 남부의 영토를 노린 것"이라는 주장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의 전개 과정, 특히 러시아군의 작전과 손실 등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수도를 공략한 것은 동부 돈바스 지역의 점령을 위한 속임수'라는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잘 안다. 복스(Vox)는 이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분석 기사("No, Putin is not actually achieving his goals in Ukraine")를 게재했다. (복스의 기사가 반박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소개하려 한다.)
이해영 교수의 "진실"
그런데 준비한 글을 쓰기 직전인 어제 '피렌체의 식탁'에 실린 이해영 교수의 글 "서방 언론은 허구였다! 러시아 뜻대로 끝나가는 전쟁"을 읽게 되었다. 나는 이 글의 앞부분(약 1/3)이 러시아군은 "미국과 영국의 언론"이 이야기하는 수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등의 전세 분석인 데다가 무엇보다 "러시아 뜻대로 끝나가는 전쟁"이라는 제목 때문에 브렛 스티븐스와 같은 종류의 대안적 시각으로 쓴 글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해영 교수의 글은 '푸틴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스티븐스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워낙 긴 글이고 다양한 주제를 모아 놓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글쓴이가 페이스북에 "지금까지 관찰하고 분석해왔던 우크라[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단편들을 재구성"한 글이라고 밝힌 것을 보고 이 글이 여러 주제를 갖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봤을 때 이해영 교수의 글은 크게 네 가지 주제를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 현재까지의 전황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2) 평화협상을 통해 쟁점을 점검하고 3) 이 전쟁의 목적, 혹은 본질을 이야기한 후에 4) 마지막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대응에 관한 논평을 한다.
그리고 글쓴이는 서두에서 이 모든 것을 영화 <매트릭스> 속 주인공 네오가 "포스트 트루스(post-truth)의 가상세계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매트릭스의 진실을 찾는 고난의 장정"에 비유한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주장을 들어봐야 한다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이해영 교수의 주장을 뜯어보기로 했다. 그의 주장 또한 반론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 푸틴의 계획은 성공하고 있을까?
이해영 교수는 서두에서 언론에서 보도하는 "전상자"(아마도 전사자를 의미하는 듯) 추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이런 글의 시작이 독자들로서는 좀 당황스러울 수 있다. 서방 소식통이 제시하는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대패했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 러시아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통해서 글쓴이가 이야기하려는 게 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글 전체를 통해 "서방 언론=파란 약"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그가 말하는 "서방 언론"이라는 매체들은 하나같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크라이나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며 러시아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그들이 정말로 러시아에 불리한 쪽으로 전과를 부풀리고 현실을 왜곡할 생각이었으면 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해영 교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러시아군의 피해 규모는 과장되었다'라는 주장은 푸틴이 침공 한 달만에 들고 나온 새로운 내러티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크렘린은 지난달 26일, "(군사) 작전의 1단계가 완수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1단계가 "우크라이나군의 전투 잠재력을 대폭 감소"시키는 것이며, 그 결과 이 "작전(전쟁)"의 진정한 목적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해방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그동안 수도 키이우 공략에 쏟아부은 전쟁 자원은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떨어뜨리는 데 있었던 것일 뿐, 수도를 점령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해영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 듯 하지만 푸틴의 새로운 내러티브는 초기 작전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다수의 견해다.
여기에서 잠깐, 우크라이나가 완전히 패했다고 주장하는 분석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주요 언론에서 찾는 건 불가능하고 래리 존슨 같은 음모론 블로거의 수준으로 기준을 낮춰야 한다. 이 사람은 2008년에 미셸 오바마에 대한 가짜뉴스를 시작으로 꾸준히 민주당 정치인을 타깃으로 하는 가짜뉴스를 만들어왔고, 2017년부터는 친트럼프, 친푸틴 프로파간다를 생산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위키피디아에서도 그의 가짜뉴스를 잘 정리해놓고 있다. 극렬 트럼프 추종자 외에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이번에는 부차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우크라이나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 주장이 거짓임은 금방 드러났지만 이해영 교수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래리 존슨의 주장을 한국에 퍼뜨리고 있다.
초기 작전에 실패한 푸틴 소위 '골대 옮기기'를 통해 '진정한 목적은 돈바스 지역 해방이었다'라고 규정했지만, 그렇다면 키이우 주변에서 한 달 넘게 진행된 공격이 실패한 결과로 입은 막대한 병력 손실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병력 손실 자체가 크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손실은 막대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러시아 국방부는 그렇게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변주곡이 "러시아는 키이우 주변에 최정예 전력을 투입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허구를 잘 지적한 분석이 이 영상이다.)
앞서 언급한 복스의 기사, "No, Putin is not actually achieving his goals in Ukraine(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있지 않다)"는 러시아의 주장은 "마치 지난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다는 주장만큼이나" 허황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비유를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서는 유독 트럼프 추종자들이 나서서 푸틴의 주장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애초 목표가 "돈바스 해방"이라면 러시아군이 화력을 키이우에 집중한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초기 러시아군 전력의 이동을 보면 거의 모든 화력이 돈바스를 제외한 지역들에 집중되었다. 만약 돈바스가 목표였고, 키이우 주변의 우크라이나 전력을 소진시킬 생각이었다면 폭격과 포격을 사용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인근 호스토멜 공항을 초기에 못쓰게 파괴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엄청난 전력 손실을 감수하고 대량의 전투 자원을 동원한 지상 침투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초기에 우크라이나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은 미국도 첩보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 스스로도 (실수로) 공개했던 사실이다. 러시아의 뉴스 매체인 RIA-Novosti에서 침공 이틀 뒤인 2월 26일에 발행하려고 미리 써둔 기사가 실수로 발행되었는데 (러시아는 이 전쟁이 2, 3일 정도면 끝날 것으로 예측했었다) 이 기사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통제 아래 들어왔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해영 교수는 "러시아가 내건 개전 사유로서 ‘돈바스 해방’을 군사적으로 관철하겠다는 목표는 명확하다"라고 주장한다.
프로파간다 가려내기
전쟁 때 양국에서 나오는 정보는 프로파간다이고,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이해영 교수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서구 매체에서 나오는 정보를 신뢰하지 않아도 러시아 국방부가 발표하고 러시아 타스(Tass) 통신이 전하는 정보에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로이터는 지난달 23일 타스 통신의 뉴스를 자사의 콘텐츠 마켓에서 제공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우리의 신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열 번 양보해서 이해영 교수의 말처럼 러시아의 주장'도' 들어야 봐야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는 어느 쪽이 사실을, 혹은 사실에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이때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사실과 프로파간다를 구분할 수 있을까? 이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에서도 핵심적인 질문이다. 왜냐하면 뉴스를 읽는 독자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달려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쪽을 더 신뢰해야 할까? 1)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곳보다는 더 많이 허용된 나라에서 2) 정확성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조직이 3) 정보의 원천(source)을 공개하며 내놓는 정보가 그렇지 않은 곳에서 나온 정보보다 더 신뢰할 만한 정보다. 어떤 언론도 100% 진실만을 말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더 정확한 정보는 존재한다. 가령 오픈소스정보(OSINT, open source intelligence) 출처의 하나인 오릭스(Oryx)의 경우,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장비 손실 기록과 관련해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 출처로 취급받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서는 통계를 사진을 통한 확인에 의존하고, 이에 근거한 자료를 모두 공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릭스가 100% 맞다고 할 수는 없다. 사진에 찍히지 않은 피해도 많을 것이고, 현장의 사진 판독이 힘든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지적이 가능하고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 결국 매체들이 이런 출처를 선호하는 이유는 공개성(openness)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영 교수는 이런 공개된 출처에 기반해 보도하는 매체들이 단지 "서방 매체"라는 이유로 그 정확성을 의심하면서 대신 러시아 국방부의 정보를 가져온다. 그는 1) 언론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2) 정확성을 책임을 지지 않는 조직이 3) 정보의 원천을 공개하지 않은 채 주장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러시아 국방부 말을 있는 그대로 보자면" "러시아군의 주장이 맞다면" "지금도 언론에서 흔히 보이는 러시아군의 무능과 작전 실패로 인해 키에프를 점령못했다는 주장은 근거를 잃는다"라면서, "북부전선은 애당초 키에프 점령이 아니라, 남부 돈바스 확보를 위해 던진 거대 미끼"라고 말한다.
왜 서방 언론의 주장은 '매트릭스'이고 러시아군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푸틴이 건넨 빨간 약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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