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선택 ② 푸틴의 핵단추
• 댓글 2개 보기지난해 말 부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지대에 엄청난 병력을 배치하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과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는 지상전을 벌일 것인지'를 두고 토론을 했다.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위성사진과 함께 수집한 각종 정보를 들어 명백한 침공 준비라고 이야기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유럽에서 대규모의 지상전이 벌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푸틴의 '엄포(bluff)'로 해석했다.
물론 함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징후들이 있었다. 우선 러시아는 2014년에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침략해서 빼앗았고, 그 직후부터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 러시아 반군들을 지원해서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뜯어내는 전쟁을 무려 7년 동안 진행해왔다. 게다가 미국이 입수한 정보는 무척 구체적이었다. 가령 부상자를 위한 다량의 혈액을 최전방에 배치했다는 정보가 그렇다. (푸틴이 주장하던 대로) 군사훈련이라면 혈액까지 쌓아두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정보를 조작, 혹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이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5월 말의 시점에서 뒤를 돌아보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일은 일어났고, 사람들은 단순히 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예상과 달리 러시아에 불리하게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푸틴은 과연 핵무기를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건 충분히 의미 있는(viable) 질문이다.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 A(=21세기 유럽의 대규모 지상전)가 일어났기 때문에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 B(=핵을 사용한 전쟁)가 일어날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A와 B는 동일한 가능성의 값을 갖고 있지 않다. 세상에 검은 백조("블랙 스완")는 없다고 생각했다가 그런 새를 보게 되었다고 해서 불을 뿜으며 날아다니는 용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검은 깃털의 유전자 변이와 날아다니는 파충류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건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A가 일어났기 때문에 B도 일어날 수 있다'라고 걱정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푸틴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러시아를 철권통치해온 푸틴이 대규모 지상전이라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면 핵을 사용한 전쟁도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푸틴이 핵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찾기 힘들다. 푸틴이 핵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핵무기가 군사적, 정치적으로 어떤 무기인지 잘 모르는 일반인이거나, 그런 일반인들의 눈길을 끌고 싶어 하는 언론 매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반문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푸틴은 전쟁 개시 후에 핵무기를 언급하며 위협하지 않았나?" 맞다. 푸틴은 침공을 시작한 지 3일 만인 2월 27일에 러시아의 핵무기를 운용하는 부대에 경계 태세를 명령했다. 이를 두고 미국과 나토는 러시아가 무책임하고 공격적으로 나온다고 비난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핵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해 미군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핵전쟁을 걱정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No"라고 잘라 말했다. 러시아의 도발 가능성과 푸틴의 의도를 정확하게 경고해온 바이든이 그때만 사실을 감추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답을 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의 정보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는 핵무기 태세(nuclear posture)를 전혀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푸틴의 "경계 태세 전환" 명령은 그냥 말 뿐이었던 것이다.
그럼 푸틴은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질문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명령을 '공개적으로 내렸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개적으로 내린 명령인데 '왜 (군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느냐'다. 첫 번째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있다. "경계 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의 오디언스는 러시아군이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돕는) 서방 국가들과 러시아 국민이었다는 분석이 그 답이다. 서방 세계에는 계속 그렇게 우크라이나를 도우면 '재미없을 줄 알라'는 전형적인 '칼 흔들기(sabre-rattling, 무력 사용 위협)'를 한 것이고,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러시아에게는 핵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요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이게 푸틴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 '왜 군은 핵 태세를 바꾸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약간의 배경 이해, 즉 '핵무기는 특별한 무기'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심도 있고 정확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Perun의 설명에 따르면 근래에 들어와서 핵무기를 가진 국가가 핵을 사용하겠다는 위협(nuclear coercion)을 통해 타국의 정책을 바꾼 예는 찾기 힘들다. 제2차 중동전쟁(1956~57) 때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려 하자 소련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을 한 적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세계는 아직 핵무기를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해야 한다는 규범을 갖고 있지 않았고, 특히 이 전쟁의 경우 미국과 소련이 아주 드물게 같은 입장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크게 비난했다.
러시아의 핵 독트린
하지만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핵의 위험성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감하면서 핵무기 보유국들은 "우리는 이런 경우에 이런 식으로 핵을 사용하겠다"는 원칙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바로 핵 독트린(nuclear doctrine)이다. 가령 인도의 핵 독트린에 따르면 인도는 자국이 핵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핵을 사용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먼저 선제적인 핵공격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여기에는 철저한 조건이 붙는다.
핵 독트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4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발표한 소위 '김정은 핵 독트린'에 관해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 북한도 핵 독트린을 갖고 있다.) 김정은은 한 연설에서 “우리의 핵이 전쟁방지라는 하나의 사명에만 속박돼 있을 수는 없다”며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이익을 침탈하려 든다면 우리 핵 무력은 둘째가는 사명을 결단코 결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김일성-김정일의 독트린은 방위 수단으로서만 핵을 사용하는 것이었다면, 김정은의 독트린은 "국가의 근본이익이 침탈"당할 경우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의 경우 '국가의 근본이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호성을 증가시키고 위협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든 북한을 비롯해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들이 하나같이 이런 독트린을 발표하는 이유가 뭘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를 갖고 있으면서 미리 발표한 특정한 경우에'만' 쓰겠다는 것은 무기의 효용(=모호성을 기반으로 한 위협 효과)을 떨어뜨리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다.
핵 보유국이 독트린을 발표하는 이유는 핵무기라는 것이 단순히 적국에게만 위협이 되는 게 아니라 보유국 스스로에게도 위험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가령 핵보유국은 대부분 다른 나라가 자신들에게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사실을 알면 미사일이 영토에 떨어지기 전에 반격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A라는 나라는 적국인 B에 핵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았는데 발사한 것으로 착각한 B가 반격으로 먼저 핵미사일을 쏘는 경우 말이다. (핵잠수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크림슨 타이드'가 바로 이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이 경우 A라는 나라는 자신들은 쏘지도 않았는데 B로부터 핵미사일 공격을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된다. (이런 나라들은 핵미사일이 적국의 어느 도시를 공격할지 미리 정해두고 좌표를 입력해놓고 있다.) 단지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단순한 판단 착오가 국가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거다. 핵 독트린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런, 저런 경우에만 핵무기를 사용한다"라고 밝히는 건,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 아니면 우리가 핵미사일을 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인 셈이다.
그럼 러시아는 어떤 핵 독트린을 갖고 있을까?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구 소련의 핵 독트린과 현재 러시아의 핵 독트린을 분석, 비교한 미 의회 보고서를 참고하면 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철저히 억제(deterrence)용으로만 사용하며, 이를 사용하는 것은 극단적이고 불가피할 경우에 한한다."
위의 선언이 모호하다면 러시아의 독트린은 아래 네 가지의 분명한 상황을 제시한다.
- 러시아나 연맹국을 공격하는 탄도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입수되었을 때
- 적국이 핵무기, 혹은 대량살상무기를 러시아나 연맹국을 상대로 사용했을 때
- 적국이 러시아의 정부의 주요 시설 혹은 군사시설을 공격해서 핵무기 운용부대의 대응 능력을 위협할 때 (즉, 러시아가 핵을 못쓰게 만드는 순간은 핵공격과 같은 위협으로 간주한다는 것–옮긴이)
- 러시아를 상대로 재래식 무기를 사용한 공격이 일어나 국가의 존망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상황에서'만' 핵무기를 쓸 것이니, 이런 경우가 아니면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했다고 간주하지 말라는 선언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는 일은 위의 네 가지 상황과 전혀 무관하다. 간혹 러시아 영토 내에 있는 석유 저장고 등에 알 수 없는 화재가 나기도 했고 그중 일부는 우크라이나의 공격용 헬리콥터나 드론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지 않았고, 국가의 존망을 흔드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러시아가 자신의 독트린을 지킨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나? 푸틴은 거짓말을 얼마든지 하는 사람 아닌가?" 물론 독트린을 깨고 공격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푸틴이 핵무기를 사용할 때는 자신의 목표가 핵무기를 사용해서 달성할 수 있을 때다. 하지만 핵미사일을 쏜다고 우크라이나인들이 항복하고 러시아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아니, 만약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그건 자국을 다른 나라의 핵무기로부터 보호하는 장치, 즉 핵보유국 간에 지켜지는 룰을 깨는 것이고, 최대의 피해자는 러시아가 될 수밖에 없다.
핵 독트린이라는 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푸틴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푸틴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핵무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분석을 하는 것이지, 푸틴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푸틴의 목표는 뭘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푸틴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순위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순위를 이해하면 이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푸틴의 선택 ③'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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