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유럽에서 남자의 바지에 주머니가 부착되는 동안 여자 옷에서도 주머니가 치마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건, 여자 옷의 경우 남자의 바지처럼 치마 안쪽에 주머니를 붙이는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고, 치마 밖에 주머니를 매달던 방식대로 치마 안쪽에 주머니를 매달았다는 거다. 치마 안에 있는 주머니에 든 물건을 꺼내기 쉽게 하려고 치마의 재봉선(seam)을 따라 열리는 구멍을 만들고, 거기로 손을 넣어 치마 속에 매달린 주머니에 접근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거면 그냥 치마 천에 붙인 주머니를 만들지 않고 왜 굳이 그렇게 접근이 어렵게 만들었을까 싶지만, 애초의 주머니(pocket)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남자가 입는 바지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주머니가 달리게 된 건 그만큼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자 옷의 혁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Period Corsets)

남자 바지 주머니의 발전과 시기적으로 교묘하게 겹치는 기술의 발전, 특히 무력(power)의 행사 방식의 발전이 있었다. 총이 주머니에 휴대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진 형태, 즉 권총(handgun, pistol)의 등장이다. 휠록(Wheellock) 피스톨은 기존의 총과 달리 길이도 짧고 복잡한 절차를 생략해서 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옷 속에 감쪽같이 감출 수 있어 살해하려는 상대의 의심을 받지 않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무기의 등장은 많은 사람을 긴장시켰다. 미국에서 요즘 총기의 '은닉 휴대(concealed carry)' 허용 여부를 두고 논쟁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영국에서는 1579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머니에 이런 무기를 넣고 다니는 것을 금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같은 시대 프랑스에서는 앙리 3세가 아예 옷에 총이 들어갈 만한 주머니를 부착하는 것 자체를 금하기도 했다. 주머니를 부착할 수는 있지만, 대신 작아야만 한다는 거다.

16세기 독일 지역에서 제작된 휠록 피스톨 (이미지 출처: Metropolitan Museum)

국가가 옷에 들어가는 주머니의 크기를 결정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겠지만, 과거 많은 사회가 다양한 방법으로 계층별로 소비를 규제하는 법(sumptuary law, 사치 금지법, 윤리 규제법)을 갖고 있었다. 소득과 무관하게 양반만 입을 수 있는 옷, 귀족만 사용할 수 있는 옷감이 정해지던 전통 사회에서 의복 규제는 충분히 가능했고, 젠더에 따른 의복 제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남녀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던 사회에서도 불가피하게 여성이 남성의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밥벌이를 하던 가장이 죽거나 다쳐서 아내가 일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이런 경우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일(cross-dressing)이 있었다. 반드시 남자로 변장해야 해서가 아니라, 남자가 하는 작업 중에 당시 여성의 옷을 입은 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고, 특정 직업이 요구하는 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남자의 옷을 입게 된 여성들이 드디어 주머니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달리 말하면,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않는 한 주머니를 가질 권리가 없었다는 얘기다.

1760년대 그림 속 남성. 주머니의 존재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강조했는지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Pockets)

하지만 남자라고 다 주머니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도제, 하인, 노예로 일하던 사람들은 남자라도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지 못했다. 당시 달아난 노예를 찾는 현상금 포스터에는 "주머니나 주머니 덮개(flaps)가 없는 회색 코트를 입고 있다"라는 식으로 달아날 때 입은 옷에 주머니가 있는지 여부를 언급하는 것들이 있다. 옷에 주머니를 부착한다는 것 자체가 추가로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노예들이 달걀 등의 물건을 몸에 숨겨 훔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탈출을 준비하는 노예는 몰래 웃옷에 주머니를 만들어 달기도 했는데, 탈출할 때 필요한 물건을 몸에 지니기에 용이할 뿐 아니라, 흑인 노예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난 흑인들이 섞여 사는 대도시에 도착했을 때 달아난 노예처럼 보이지 않는 시각적 장치로도 작용했다.

1838년 미국에서 도망한 노예를 찾는다는 현상금 포스터 (이미지 출처: Kansas Historical Society)

찬양과 조롱

자유로운 남자들이 주머니를 독점하면서 주머니는 남성의 실용성과 호기심의 상징처럼 묘사되기 시작한다. 우선 남자가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에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포켓사이즈(pocket-size)" 버전이 생겨났다. 일하는 남자들이 언제든 도구를 꺼내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준다.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대통령이었다. 철학과 과학, 건축과 농업,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은 전형적인 계몽주의자였던 제퍼슨은 주머니에 작은 가위와 줄자, 칼, 톱, 온도계, 나침반 등 다양한 (포켓사이즈의) 물건을 가지고 다니며 사용해서 "걸어 다니는 계산기(walking calculator)"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제퍼슨이 휴대한 물건 중에는 상아로 만든 노트도 있었다. 제퍼슨은 쓰고 지울 수 있는 상아 노트에 생각을 옮겨 적고, 나중에 집에 가서 종이로 옮겼다고 한다. 그에게 주머니는 움직이는 실험실, 작업실이었던 셈이고, 이는 계몽된 남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제퍼슨의 휴대용 상아 노트 (이미지 출처: Monticello)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입은 수트에 달린 주머니 (이미지 출처: Jewish Policy Center)

남자들이 이렇게 바지와 재킷 곳곳에 주머니를 붙이고 다양한 물건을 넣고 다니며 꺼내 사용하는 동안 여자들은 중세와 다름없이 천 주머니에 물건을 한꺼번에 넣고 다녔다. 물건을 정리할 수 있는 서랍처럼 작동한 남자 옷과 달리 한 곳에 몰아넣으니 필요한 걸 찾으려면 열심히 뒤져야 했고, 주머니 안에 있는데도 찾지 못하는 일도 있었고, 치마 속에 묶은 끈이 풀려 주머니를 분실하기도 했다.

여자들이 중세 시대 이후로 발전이 없는 주머니로 고생하는 동안 남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농담과 조롱이 섞인 글을 쓰곤 했다. 그런데 옷에 주머니를 부착하는 대신 손가방(handbag, purse)을 드는 쪽으로 발전한 의복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비슷한 글은 여전히 나온다. 물론 이런 "혼돈"은 여자들의 타고난 성격, 성향과 무관하게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정리가 안된 물건들이 가득 든 여성의 손가방을 "아름다운 혼돈"이라고 부르는 기사

반면 자라면서 주머니에 온갖 잡동사니를 넣고 다니던 남자아이들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남자아이들은 자라서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허용해야 한다는 너그러운 자세가 어른들에게 있었다. 아이들이 주머니에 사탕, 개구리, 칼 따위를 넣고 다니면 그건 "세상을 탐험하는" "호기심 많은" 태도라고 생각했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유년기에 이를 허용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 물건을 정리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만들어 낸다는 거였다.

톰 소여와 친구들 (이미지 출처: Pixels)

남자아이들의 주머니가 이렇게 "호기심 많은 탐험가"를 상징하는 동안, 여자아이들이 입는 옷에 주머니가 붙었어도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았다.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의 네 자매 중 둘째인 조(Jo)는 흔히 여자들이 주머니—1860년대 여성의 옷에 드디어 사용할 수 있는 주머니가 붙었다—에 넣고 다닐 것으로 기대하는 물건들을 거부하며 자기가 쓴 원고 뭉치를 넣고 다녔다. 그럼 젊은 여자에게 기대되는 물건은 뭐였을까?

바느질에 사용되는 골무가 대표적인 물건이었다. 남자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을 키우는 물건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자유가 보장되는 동안, 여자들은 바느질 도구로 대표되는 '집안일'을 하고, 남을 돕는 데 사용되는 물건을 들고 다니도록 장려된 거다.


'여자 옷과 주머니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