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싱'을 감독한 레베카 홀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게이츠 교수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알게 된 가족사를 어머니 마리아 유잉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어머니로서는 처음 듣는 일이었다. 유잉은 어린 시절, 자신의 집안에서 인종이 비밀스럽게 다뤄졌던 기억을 갖고 있었단다. 그가 자란 곳은 디트로이트의 백인 동네였는데, 간혹 (아마도 아버지 쪽) 친척들이 찾아오면 차를 집 앞에 주차하는 대신 집 뒤쪽에 세우고 뒷문으로 들어왔고, 집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커튼을 모두 내려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하게 했단다.

백인으로 패싱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발각될 것을 염려하며 살아야 한다.

백인으로 패싱한 클레어와 그의 백인 남편 존

영화 '패싱'의 주인공은 뉴욕시 할렘에서 함께 자란 두 친구 클레어와 아이린이다. 두 사람은 영화 도입부에 뉴욕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렇게 만나 밀렸던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클레어가 자신이 백인으로 패싱했고, 현재 백인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가 하나 있다고 이야기한다. 두 사람 모두 피부가 밝은 편이었기 때문에 클레어는 아이린도 패싱을 했는지 궁금해한다. 자신이 계속해서 할렘에서 살고 있다는 말로 흑인 남자와 결혼했음을 밝힌다. (다만 클레어가 그걸 분명하게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고 나중에 확인해서 알게 된다).

백인으로 패싱한 클레어는 자신이 자란 뉴욕을 떠나 시카고에 정착했다며 이야기를 계속하자며 아이린을 자신이 머무는 호텔 방으로 간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도중에 클레어의 남편 존이 들어온다. 아내가 백인이라고 알고 있는 존은 아내의 친구인 아이린도 당연히 백인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눈다. 그가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흑인을 비하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게 분명했지만, 두 친구는 긴장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레베카 홀 감독은 원작 소설을 읽은 직후부터 이 장면을 흑백 화면에 희고 밝은 방을 배경으로 구상했다고 했다. 아무리 북부도시 뉴욕이라고 해도 1920년대에 고급 호텔은 흑인들이 갈 곳은 아니었다. 즉 희고 밝은 호텔방은 남편 존과 같은 백인의 세상이다. 이 두 친구는 백인의 세상에 침입한 후 자신들이 흑인임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다.

할렘 르네상스

이 영화의 화면 비율은 4:3이다. 넷플릭스는 1990년대 TV 코미디의 고전 '사인펠드(Seinfeld)'의 방영권을 사오면서 화면을 원작의 4:3에서 16:9로 바꾸는 바람에 팬들의 비난을 샀지만, '패싱'의 4:3 비율은 감독의 의도로 존중하고 바꾸지 않았다. 레베카 홀은 영화 속 장면이 대부분 실내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1920년대라는 시대적 분위기를 고려해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넬라 라슨의 원작 소설 '패싱'이 나온 건 1929년이다. 미국에서 1920년대는 문화적으로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로 불리는 시기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흑인 인구의 대이동으로 남부에서 도착한 흑인들이 할렘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대거 정착했고, 이들이 1920년대에 만들어낸 음악과 회화, 문학작품은 흑인들의 인종적 각성과 문화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설가 라슨은 할렘 르네상스의 문학을 대표하는 흑인 여성 작가이고, '패싱'이 동시대의 할렘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할렘 르네상스를 엿볼 수 있다. 당시 할렘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낙후된 동네가 아니었다. 주인공 아이린의 남편은 의사였고, 할렘의 좋은 주택에서 아내와 두 남자아이, 그리고 가정부와 함께 산다. 특히 아이린 부부는 할렘이라는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들로, 영화 속에서는 할렘의 유명한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성대한 댄스파티를 준비한다. 아치볼드 모틀리가 그림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파티다.

할렘의 댄스홀을 묘사한 아치볼드 모틀리(Archibald Motley)의 작품

특히 이 파티에는 유명한 백인 작가와 아내가 초대받아 오는데,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리고 파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당시 할렘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기회다.

누가 패싱하는가

이 영화 초반에는 누가 백인으로 패싱하고 있고 (클레어) 누가 패싱하지 않고 살아가는지 (아이린)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그 이분법을 의심하게 된다. 가령 아래와 같은 장면이 그렇다. 남편이 의사이고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아이린은 사교활동에 많은 시간을 쏟고 집안일의 대부분을 흑인 가정부에게 맡긴다. 이 장면에서 아이린은 여느 중산층 백인 여성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가정부의 피부색은 아이린보다 짙다.

물론 이 모습은 경제적인 요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아이린이 생활하는 모습은 1920년대 '중산층 주부'의 모습이지, '백인 주부'의 모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부 흑인 가정의 소득수준이 올라갔을 때 그들이 중산층답게 행동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백인 가정의 모습을 따라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중산층은 예외 없이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이린은 항상 긴장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겉으로만 보면 백인으로 패싱하고 있는 클레어는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지만, 인종 정체성을 밝히고 사는 아이린은 자신의 역할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흑인 가정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조차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누가 패싱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클레어의 패싱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관객은 아이린 역시 자신이 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주위 사람들이 기대하는, 혹은 자신이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역할을 치밀하게 연기하면서 사는 셈이다.

'Passing'이라는 단어가 가진 이런 의미는 영어권에서도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레베카 홀은 자신이 20대 때 넬라 라슨의 소설책을 소개받았을 때 제목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이 글을 쓰는 내가 passing에 이런 용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미술사 속 게이, 레즈비언 문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passing은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 혹은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추측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패싱은 젠더와 인종 모두에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조금만 확대해보면 우리는 모두 어느 단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회는 구성원들이 국민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 규정이 문서화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사회는 학습을 통해, 꾸중과 비난을 통해, 그리고 칭찬과 칭송을 통해 이를 인지시킨다.

문백면구곡리은진송씨열녀문(文白面九谷里恩津宋氏烈女門)

다시 인종

이 영화에서 놓치면 안 될 요소가 인종과 함께 엮인 성적 긴장감이다. 클레어와 그의 남편을 처음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린이 (아마도 평소와 달리) 남편에게 키스를 퍼붓는 장면은 자신의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재확인하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한편 아이린의 남편은 백인우월주의자와 결혼해서 백인으로 패싱한 아내의 친구에 대해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클레어가 집으로 찾아오게 되자 생각보다 훨씬 친근한 태도를 보여주며 좋은 대화 상대가 된다. 그런데 클레어는 아이린보다 피부색이 조금 더 밝다. 이 사실은 영화 초반에만 해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뒤로 갈수록 아이린이 클레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아이린이 애써 숨기는 불안감을 감지할 수 있다.

패싱에 비판적이었던 아이린의 남편은 클레어와 좋은 대화 상대가 된다.

댄스 파티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도 사람들은 인종과 연관된 성적 긴장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아마도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직접적인 언급이 아닌 가벼운 농담과 암시만으로 이를 표현한다. 직접 드러내지 않아도 분명하게 보이는 이런 긴장은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재미요소다. 아이린이 계단을 내려오면서 클레어와 남편이 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은 극히 일상적으로 보이지만 아이린과 관객을 온갖 궁금증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긴장은 어느 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인종이라는 요소가 더해질 때 그 잠재력이 강해지고, 이 영화는 그걸 잘 추적해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종은 팩트일까?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유전자 검사를 통한 조상의 인종 찾기를 보면 사람들의 유전자는 겉보기 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유대계, 아일랜드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유전자를 모두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인종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인종을 '선택'해서 이야기하거나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겉모습으로 추정해버린다. 인종은 '만들어진 것(construct)'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패싱'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인종은 엄연한 현실이고, 사실이다. 비록 허구적인 가정, 혹은 믿음에 기반한 것이라고 해도 거기에 그들의 인생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라는 시대는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주인공의 갈등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생각보다 충분히 멀리 떠나오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