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홀이 넬라 라슨(Nella Larsen)의 1929년 작 '패싱'을 읽자마자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은 자라면서 어머니 마리아 유잉(Maria Ewing)이 흑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위에서는 어머니의 인종을 항상 애매하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을 자신의 가족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두 친구는 피부색이 아주 밝은 흑인인데 한 친구는 흑인 남편, 다른 친구는 백인 남편을 두고 있다. 그 결과 전자는 흑인 커뮤니티에, 후자는 백인 커뮤니티에 편입되어 전혀 다른 삶을 살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이 소설과 영화의 시작이다.

레베카 홀 감독의 어머니 마리아 유잉의 공연 모습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세대나 관심사에 따라서는 레베카 홀이라는 배우/감독 보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 유잉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거다. 오페라계에서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 유잉은 유명한 영국의 연극 감독 피터 홀(Peter Hall)과 결혼했다. 영국의 타임지가 "지난 반세기 동안 영국의 연극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불렀을 만큼 엄청난 사람이 레베카 홀의 아버지다.

1950년 미국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마리아 유잉은 일찍부터 성악에 재능을 보이면서 미국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백인인) 피터 홀과 결혼해서 영국에 정착했다. 백인들이 대부분인 동네에서 자란 레베카는 엄마의 얼굴이 다른 백인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하게 어떤 사람(인종)이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엄마에게서 돌아온 답은 모호했다고 한다. "미국 원주민(인디언)을 포함해 다양한 피가 섞인 거로 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왼쪽부터 피터 홀, 레베카 홀, 마리아 유잉

레베카 홀에 따르면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모호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어머니 유잉 자신도 집안의 이야기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잉의 부모가 집안의 인종 내력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게 집안 내에서도 쉬쉬하고 넘어가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즉, 피부색이 희어지는 어느 단계에서 누군가 패싱을 한 거다.

패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과거, 혹은 집안 역사의 부정과 삭제다. 자신의 족보에 흑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사람은 흑인이 되기 때문에 그걸 숨겨야만 패싱이 가능하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인어공주가 인간 세상에 편입하는 대가가 목소리를 잃는 것이었다면, 흑인이 백인으로 패싱하는 조건은 자신의 가족, 커뮤니티, 그리고 과거와의 단절이었다.

백인과 흑인을 가르는 정확한 기준은 없다. 순전히 사람들의 인식, 혹은 자의적 판단에 기반한 구분이다. 오바마는 어머니가 백인이고 아버지가 흑인이지만 흑인으로 구분된다. 피의 절반이 백인인데 왜 백인이 아닐까? 아니, 조부모 중 한 명만 흑인이어도(1/4), 증조부모 중 한 명만 흑인이어도(1/8) 그 사람은 흑인이다. 이 기준("one drop rule"이라 부른다)에 따르면 흑인의 피는 한 방울만 들어가도 흑인이지만, 백인의 피는 "순수하게 유지되어야" 백인이다. 인종을 따지는 행위 자체가 인종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패싱의 역사

헐리우드에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이렇게 피부색이 밝은 흑인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백인사회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눈물 나게" 그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주인공은 거의 예외 없이 여성이었고, 그 여성이 자신이 자란 가족과 단절하고 정체성을 숨긴 채 백인 남성과 만나는 게 흔한 플롯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항상 백인 여배우가 맡았다. 피부색이 짙은 백인 배우가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백인이 분명한" 배우에게 그 역을 맡겼다고 한다. 혹시라도 그 배우의 인종을 의심할까 봐 그랬을까? 레베카 홀이 이번에 만든 영화 '패싱'에서는 혼혈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배우들을 골랐다. 헐리우드의 '화이트 워싱'(여기에 대해서는 '어디서 온 알라딘?'에서 이야기했다)의 관습을 끊은 것이었만 이 영화를 본 관객들 중에는 "척 봐도 흑인인데 어떻게 패싱이 가능하냐"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감독의 어머니 마리아 유잉은 자신의 인종을 적극적으로 숨기거나 백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오페라계에서는 흑인 가수를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피부색이 밝은 유잉은 그냥 조금 "이국적인(exotic) 외모"(물론 이 표현도 이제는 인종주의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를 가진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간혹 "African American"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유잉은 그런 표현을 고치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본인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의 집안에서는 언제, 누가 패싱을 했을까? 감독의 외할아버지, 즉 마리아 유잉의 아버지였다. 노먼 유잉(Norman Ewing)이라는 이 남자는 피부색이 밝은 흑인이었기 때문에 백인들의 커뮤니티에 들어갔고, 네덜란드계 여성과 결혼을 해서 마리아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슴 아픈 반전이 있다.

레베카 홀은 이 영화를 만드는 중에 자신의 가족사를 제대로 파보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헨리 루이스 게이츠 주니어(Henry Louis Gates Jr.) 교수가 PBS 방송에서 수년째 진행하고 있는 'Finding Your Roots(당신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가족사를 조사해달라고 의뢰한 거다. 참고로, 게이츠 교수는 미국 흑인의 역사, 문화 분야에서 잘 알려진 인물로 2009년에 자신의 집에 들어가다가 백인 경찰에게 제지 당한 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게이츠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유명한 인물들을 초대해 그들의 유전자를 분석해서 그들의 조상이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를 확인하고, 족보자료 전문가들을 동원해 가족의 역사를 찾아낸다. 즉, 일반인 개인이 하기 힘든 수준의 조사가 가능한 거다.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가 게이츠 교수의 도움으로 가족사를 알게 되는 에피소드

그렇게 밝혀낸 바에 따르면, 흑인의 정체성을 지우고 백인으로 패싱한 (레베카 홀 감독의 외할아버지) 노먼 유잉은 흑인 노예해방주의자 존 윌리엄(John William)의 아들이었다.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싸웠던 존 윌리엄은 미국 노예해방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프레데릭 더글러스와 백악관에서 식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런 유명한 흑인 인권 투사의 아들은 왜 이름까지 바꾸고 백인 행세를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존 윌리엄의 출생 사연을 알 필요가 있다.

존 윌리엄은 백인 농장주가 흑인 노예를 성폭행해서 낳은 자식이다. 따라서 친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주인이었고, 존을 낳은 어머니는 흑인 남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존 윌리엄에게는 흑인 양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존이 백악관 만찬에 초대된 지 사흘 만에 그를 미워한 KKK단원들이 존의 흑인 양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레베카 홀 감독의 외할아버지인 노먼 유잉은 자신의 아버지가 노예해방 운동을 한 결과로 할아버지가 백인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피부색이 밝아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다들 백인으로 생각하는데, 굳이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흑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백인으로 살 것인가. 노먼 유잉은 그 고민 끝에 아버지와의 연을 끊고 백인으로 살기로 했을 것이다.

"The Talk"

레베카 홀의 영화 도입부에도 비슷한 얘기가 잠깐 등장하지만, 패싱을 하려는 결정에는 자식과 후손에 대한 고려도 무시할 수 없었을 거다. 자신이 흑인과 결혼하면 다시 흑인이 분명해 보이는 짙은 피부색의 아이가 태어날 것이고 그 아이는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에서 여전히 차별을 겪고 살게 된다. 사회가 그런 차별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걸 막고 싶지 않았을까?

미국의 흑인 가정에서는 백인들은 모르는 일종의 통과 의례가 있다고 한다. 딸의 경우 어느 정도 자라면 곱슬곱슬한 "흑인 머리"를 다른 인종들처럼 펴는 거다. 최근에는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국에서는 곱슬머리를 그대로 가진 흑인은 백인을 싫어하는 반항적인 인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따라서 딸이 직장을 가지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길 바라는 부모는 딸이 타고난 곱슬머리를 펴주게 되고, 그 과정에서 "왜 머리를 펴야 하느냐"고 묻는 딸에게 어쩔 수 없이 아이가 받게 될 인종적 편견과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흑인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흑인 남자아이는 조금 다르다. 흑인 부모들은 아들이 청소년이 되면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할 것을 걱정한다. 뉴욕시장 빌 드블라지오는 백인이지만 아내가 흑인이기 때문에 아들도 흑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인종 분류는 참 우스운 일이다.) 따라서 아들을 앉혀놓고 "경찰이 불러세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고 한다. 백인 경찰들이 흑인 남성에 대해 가진 편견이 있으니 그들에게 말대꾸를 하거나 몸을 갑자기 움직이지 말라는 등의 충고다.

물론 그 과정에서 "너는 흑인이고, 흑인은 차별을 받고, 그래서 목숨을 잃기 쉽다"는 말을 해야 하거나, 적어도 그 사실이 전제조건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자신의 아이에게 "너는 차별을 받을 거야"라고 말해야 하는 어려운 대화이지만 꼭 해야 하기 때문에 흑인 가정에서는 '그 얘기(the talk)'라 부르는 대화다.

아래의 영상이 그걸 잘 보여준다. 시작은 "흑인 애치고는 예쁘구나(You're pretty for a black girl)"이란 말을 듣고 온 딸아이와 이야기하는 엄마다.

"The Talk"

하지만 이미 백인처럼 보이는 자신이 백인과 결혼한다면? 그들 아이는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이 모든 차별과 위험을 벗어나 백인사회로 편입이 가능하다.

물론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흑인과 백인은 합법적 결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혼하려는 상대가 자신의 인종적 배경을 알게 되더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백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들에게 패싱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마리아 유잉과 레베카 홀은 누군가 그렇게 의식적인 결정을 내린 결과로 세상에 태어났다.

("패싱 ③ 누가 패싱하는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