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받을 일
• 댓글 6개 보기지난 20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취임 선서를 하면서 성경책에 손을 얹지 않았다. 고위 공직자가 취임 선서를 할 때는 옆에 선 배우자가 들고 있는 책에 왼손을 얹고, 다른 손을 들고 선서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게 반드시 성경책일 필요는 없다. 미국의 6대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는 성경 대신 법전에 손을 얹고 선서했고, 종교가 다른 정치인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경전—쿠란, 바가바드 기타도 사용된 적 있다—을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가 없거나, 종교적 영향력에 반대하는 사람은 전혀 엉뚱한 책—닥터 수스의 그림책, 슈퍼맨 만화책—을 들고 선서한 예도 있고, 아예 물리적인 책이 아닌 킨들에 손을 얹은 이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내 멜라니아가 들고 있는 성경—한 권도 아니고 두 권을 준비해 왔다—에 손을 얹지 않은 채 오른손을 들고 선서했다. 만약 성경에 손을 얹지 않는 것이 일종의 선언이었다면 아예 성경을 준비하지 않았겠지만, 그냥 단순한 실수였던 것 같다. 처음 하는 대통령 취임 선서도 아닌데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고령으로 깜빡했을 수도 있다.
책에 손을 얹지 않는 실수를 했다고 그의 선서가 법적 효력이 없는 건 아니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경우, 부통령이던 시절 전임자인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등산하다 말고 급하게 돌아와 취임 선서를 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준비된 정장도 없어서 남의 옷을 빌려 입었고, 성경이나 다른 책에 손도 얹지 않고 그냥 선서를 했다. 이런 선례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건 없다.
하지만 그 정도 실수는 무시해도 되는 특권은 아무나 누리지 못한다. 가령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09년 대통령 취임식 때 대법원장 존 로버츠(John Roberts)가 선서문 문장에서 전치사와 단어의 배치를 틀리게 불러주는 바람에 잠시 멈칫한 적이 있다. 그는 로버츠가 불러주는 틀린 문장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하는지, 자기가 외워서 알고 있는 바른 문장으로 말해야 하는지 1, 2초 고민하다가 로버츠의 틀린 문장을 따라 하기로 했다. 로버츠는 오바마가 왜 그러는지 몰랐고, 그저 긴장해서 자기가 일러주는 문장을 까먹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실황 중계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순간에 대법원장의 권위를 지켜주는 오바마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지만, 나중에 로버츠 대법원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카메라와 소수의 스태프만 지켜보는 자리에서 제대로 된 선서를 다시 했다. 전적으로 대법원장의 실수였고,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지만, 오바마는 선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의 취임이 무효라고 주장할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우려했던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오바마가 대선 선거운동을 하는 내내 하와이에서 태어난 그가 미국인이 아니라, 케냐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음모론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 음모론을 가장 열심히 외치고 다닌 사람이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였다. 법원을 비롯해 모든 공공기관이—심지어 미국인들이 흔히 했던 것처럼 그의 부모가 출생 직후 이를 알리는 공지를 낸 신문 기록도 남아있었다—오바마가 미국에서 출생했다는 데는 한 점의 의심도 없다고 발표했음에도 트럼프는 오바마가 미국인이 아니라는 음모론을 열심히 퍼뜨리고 다녔다.
트럼프가 정말로 오바마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 거짓말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보다 거짓말이 원하는 것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는 그게 사실이라고 말한다. 트럼프는 오바마가 취임한 후에도 끈질기게 음모론(당시 Birther Movement라고 불렸다)을 펼쳤기 때문에, 오바마는 2011년 백악관 출입기자 초청 만찬회장에서 참석해 앉아 있는 트럼프를 향해 농담을 날렸다.
그때의 영상(아래)을 두고 많은 사람이 "악당의 탄생"이라고 부른다. 참석자들이 자기를 향한 오바마의 농담에 웃는데, 트럼프는 웃지 않고 오바마를 노려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오바마가 그때 잔인한 농담을 하지 않았으면 트럼프가 정치를 시작해서 오바마에게 보복하는 것을 남은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렇지 않다. 트럼프는 이미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여러 해 전부터 대통령을 하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고, 그의 리얼리티쇼는 수명이 끝나가고 있었다—오바마의 출생에 관한 음모론을 퍼뜨리고 다닌 거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트럼프는 민주당 흑인 대통령을 싫어하는 백인들이 많이 있고, 그들의 분노를 이용하면 자신이 얻고 싶은 정치적 야망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다. 다시 말하지만, 트럼프에게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느냐만 중요할 뿐이다.
트럼프의 취임식 자체보다 더 많은 언론의 관심을 끈 일이 있었다. 취임식 후 행사에서 일론 머스크가 등장해 특별히 준비한 티가 나지 않는 짧은 연설을 하면서 나치 경례(Sieg Heil) 동작을 두 번 연거푸 한 일이다. 머스크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우연한 동작을 두고 트집을 잡는다면서 다른 정치인이 손을 들고 답례하는 사진과 비교하지만, 문제는 손의 각도가 아니라, 손을 드는 동작과 표정이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언론은 나치 경례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가 왜 굳이 "오해받을" 동작을 했느냐는 거다. 자기가 나치가 아니라면, 모두가 나치라고 욕할 동작을 굳이 할 이유가 있을까? 이게 사람들이 분노하는 대목이다.
내가 페이스북에도 썼던 비유이지만, 한국에서 종종 논란이 되는 상징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이 사용하던 욱일기를 참지 못한다. 세상에는 해가 뜨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비슷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일본 해군이 공식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는 욱일기를 보는 순간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따라서 일본이 그걸 사용할 때는 또 다른 침략의 야욕, 혹은 역사 왜곡의 저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인은 일본에게 "오해받기 싫으면 쓰지 말라"고 요구한다.
흔히 "메갈손"이라고 부르는 손 모양도 그렇다. 엄지와 검지를 집게 모양으로 내밀고 있는 이 그림은 "여성혐오를 남성에게 그대로 돌려준다"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던 메갈리아에서 한국 남성을 조롱하기 위한 상징으로 단체의 로고로 삼았던 것이다. 이후 한국의 남성들은 광고 이미지에서 비슷한 동작만 나와도 시비를 걸었고, 그 광고를 제작한 광고업체나 광고주가 되는 기업에 메갈리아의 전술을 사용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이 있다며 항의했다. 몇 차례의 유명한 항의 사태 이후 기업들은 긴장해서 그런 아이콘이나 손동작을 피하고 있다. 사실이 아니어도 불필요한 오해를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심상정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를 지지하던 사람 중에 "메갈리안"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사람이 있었고, 그가 대통령 취임 축하 행사에서 연설하면서 집게손가락을 굳이 두 번씩이나 강조하며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해석할까?
일론 머스크에게는 그렇게 오해받기에 가장 좋은 건 나치의 상징이었다. 머스크는 지난 몇 년 동안 백인우월주의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 왔고, 최근에는 독일의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지지하는 오피니언 칼럼을 독일 매체에 기고하는 등, 사람들에게서 나치라는 말을 듣기 좋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머스크는 자기가 나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해받을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선서를 두 번이나 해야 했던 게 바로 그런 결정이다. 그런데 머스크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나치 경례를 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의 결정을 두고 "저게 나치 경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며 감싸는 건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논란을 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그 동작을 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분노했고, 극우주의자들은 환호했다. 이게 머스크의 목적이었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애틀랜틱의 기자 찰리 워즐(Charlie Warzel)이었다. 그는 'Did He?'라는 제목의 글에서 머스크가 그동안 극우 정치인들의 주장에 동의해 온 사례들을 설명하면서 그의 정치적 성향을 분명하게 제시하면서도 이번 나치 경례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트롤링(trolling)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미디어를 포함해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기 위해 나치 경례를 한 거고,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일론 머스크는 나치인가? 그가 지지하는 독일의 극우 정당 AfD에는 신나치로 비판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머스크는 AfD의 여성 당수인 알리스 바이델(Alice Weidel)이 레즈비언이고, 그의 파트너가 스리랑카 출신의 유색인종 여성이기 때문에 나치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알리스 바이델은 나치인가, 아닌가?
이제 '나치'라는 호칭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흔한 문화적 욕설이 되었다. 머스크는 자기를 나치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진부한 공격인지를 강조하고,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나치 경례를 한 것이다. 머스크는 자기가 받는 나치라는 의혹, 혹은 오해를 회피하는 대신, 나치라는 상징을 보란 듯 사용해서 논란 자체를 가볍게 취급하기로 했다.
일론 머스크가 나치라는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목표에 도달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느냐만 중요할 뿐이다. 워즐은 머스크의 나치 경례가 트럼프 행정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여부를 두고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4년이 될 거라는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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