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보수 대법관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트럼프 정부에 이르기까지 공화당의 변칙적인 대법관 밀어 넣기로 현재 대법원은 미국의 여론과는 동떨어진 판결을 내놓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런 현재의 대법원에서 진보적인 소수에 해당하는 대법관은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 소토마이어, 케이건, 잭슨 세 사람이다. 그중에서 소니아 소토마요르(Sonia Sotomayor) 대법관은 유일한 유색인종 여성 대법관으로, 여성과 소수자, 경제적 약자 편에서 가장 거침없는 의견을 내놓는 진보 중의 진보 대법관으로 분류된다. (수정: 처음 발행된 버전에서는 브라이어 대법관이라고 적었지만, 작년 6월에 잭슨 대법관이 그의 후임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림과 함께 정정했습니다.) 물론 미국 대법원 역사에서 그보다 더 진보적이었던 대법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1980년대 이후로 소토마요르 만한 진보 대법관은 찾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소토마요르가 아니다. 그를 대법원에 넣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이야기의 주제다.

가장 진보적인 대법관(왼쪽)부터 가장 보수적인 대법관(오른쪽)까지, 이념적 위치를 보여주는 도표 (이미지 출처: Axios)

미국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후로 의회 정치가 이념적 대립으로 치닫고 합의가 사라지면서 입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법원, 특히 대법원에서 결정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는 과정에서 20세기 초만 해도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던 대법원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렇다 보니 정당에서는 자신들의 성향, 이념과 일치하는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한국과 달리 한 번 임명되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 임기가 보장되기 때문에 그 효과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된다. (그래서 점점 더 젊은 대법관을 임명하는 추세다.)

따라서 대법관에게 은퇴는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근까지 대법원 내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빠져나가고 교체되면서 균형이 무너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대법원의 중요한 판결이 바뀌고, 판례가 중요한 영미법(Common Law라 부른다)의 특성상 그렇게 내려진 판결은 아주 오래도록 국민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미국에서 대법관이 물러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라고 한다. 은퇴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가 되어 물러나거나, 아니면 자신을 대법원에 넣어준 정당이 집권했을 때 은퇴하는 거다. 가령,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대법관이 80대 후반의 나이에 암과 싸우면서도 끝까지 은퇴하지 않았던 이유는 진보 대법관인 자신의 후임을 트럼프가 결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트럼프 임기 말이었기 때문에 긴즈버그는 다음 대통령이 후임을 결정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트럼프는 이를 무시하고 자격 논란이 많았던 에이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을 긴즈버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렇다면 지독한 진보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는 누구의 후임으로 대법관이 되었을까? 바로 데이비드 수터(David H. Souter) 대법관이다. 이 사람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수수께끼 대법관"이다.

데이비드 수터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수터 대법관은 공화당의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1990년에 임명한 보수 대법관이었는데, 그가 은퇴 의사를 밝힌 것은 오바마 대통령 임기 중인 2009년이었다. 당시 70세로 대법관으로서는 많은 나이가 아니었고, 건강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다. (지금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오바마 임기 중반에 물러날 때는 자기의 후임으로 소토마요르같은 진보적인 대법관이 들어올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한 일이다.

그의 결정에 수터를 대법관으로 밀었던 공화당에서는 분노했지만, 사실 보수적인 미국인들 사이에서 수터는 이미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 없었다. 그가 19년 동안 연방 대법원에서 일하며 내놓은 판결들은 매번 보수층, 특히 보수 기독교 유권자들을 분노하게 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세상을 떠난 미국 '정치 목사'의 대명사인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은 수터가 평생 독신으로 사는 것이 "수상하다"며 그의 성정체성에 대한 근거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수터는 어떤 사람이고, 왜 자신을 밀어준 미국의 보수를 "배신"한 걸까?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미국의 흥미로운 인물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 법치주의 사회에서 법관의 자격과 개인의 신념, 그리고 엘리트의 의무를 생각하게 해준다. 아래의 이야기는 WNYC의 프로그램인 More Perfect에서 소개한 기사 'No More Souters'를 정리해 옮긴 것이다. 뉴욕타임즈의 대법원 전문 기자 린다 그린하우스(Linda Greenhouse)의 기사영문 위키피디아에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있어 참고했다.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09년, 대법원 회기가 끝나는 6월에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회기는 10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6월에 끝난다. 따라서 회기 말인 6월에 많은 판결이 쏟아지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이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한 시점에 은퇴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터는 대법원 역사상 가장 특이한 인물 중 하나였다. 많은 사람이 그를 "은둔형(reclusive) 대법관," "카메라를 싫어하는 대법관"이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공개석상에 말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남이라는 것도, 미국 북동부(뉴잉글랜드)의 작은 주 뉴햄프셔 출신이라는 사실도 사람들에게는 흥미거리였다.

뉴햄프셔주의 모토는 "Live Free or Die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다. 이곳 주민들이 다른 사람의 영향이나 간섭을 싫어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얘기가 많다.

수터 대법관이 특이한 대법관인 것은 단지 그가 보수 진영에서 추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수 진영의 바람을 저버리는 판결을 하다가 민주당 대통령이 후임을 임명할 수 있게 자리를 비워줬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인터뷰에 응하는 법이 없었고, 바짝 바른 체형에 책벌레 스타일로, 특이한 행보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정작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온라인에 떠도는 얘기에 따르면 수터는 점심으로 요거트와 사과 한 개를 먹는데, 사과를 먹을 때는 씨를 포함한 심지까지 모두 먹는다고 한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전형적인 너드(nerd). 게다가 연방 대법관의 소득 수준(현재 기준으로 27만 달러, 3억 6천 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다)에 비하면 작고 허름한 집에 살았다. 결국 이 집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했는데, 그의 말을 들은 이웃에 따르면 집에 책이 너무 많아서 건물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게다가 러다이트(Luddite, 기계, 기술문명에 반대하는 사람)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어서, '테크놀로지'라고는 전화기를 쓰는 게 전부였다. 이메일은 당연히 사용하지 않았고, 글을 쓸 때도 만년필을 사용해 종이에 필기체로 썼다.

데이비드 수터가 대법관 시절에 살던 뉴햄프셔의 집 (이미지 출처: Boston.com)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 중 하나가 그가 데이트를 했을 때 일이다. 지인의 소개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는 상대에게 아주 즐거웠다면서, 1년 후에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는 것이다.

수터 대법관을 길에서 우연히 목격한 기자도 있었다. WNYC의 애나 세일(Anna Sale)은 친구와 함께 뉴햄프셔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기름이 떨어지는 바람에 길가에 차를 세우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는데 옆을 지나던 차 한 대가 이들을 보고 길가에 섰다. 휠캡이 하나 빠진 낡은 폭스바겐 승용차였다. 차의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캐주얼 정장 상의를 입은, 나이가 좀 있는 남자였다.

그는 기자 일행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고, 기름이 떨어졌다는 얘기를 듣더니 자기가 기름을 사다 주겠다며 차에 올랐다.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통을 사서 휘발유를 채워왔다. 그걸 건네준 그 남자는 "앞으로도 필요할지 모르니" 기름통은 가지라며 웃었다. 휘발유를 아슬아슬하게 채우고 다니는 걸 보니 비슷한 일이 또 있을 것 같았던 거다. 기자가 정말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 남자가 자기를 소개하며 "데이비드 수터라고 합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기자가 "수터 대법관이시라고요?!"하고 소리를 지르자 수터는 빙그레 웃으며 자기 차로 걸어갔다고 한다.

기자는 뉴스에서 그의 이름만 들었지, 얼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거였다.  

'수수께끼 대법관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