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즐리 야브로우(Tinsley Yarbrough)는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교수로, 미국의 역대 연방 대법관들의 전기를 여러 권 저술한 다작의 작가다. 인터뷰를 거부하는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의 전기는 야브로우가 쓴 책이 유일하다.

야브로우가 대법관의 전기를 쓸 때는 그 대법관과 일했던 재판연구원들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법관과 함께 사건을 연구하고, 결정문을 함께 쓰기 때문에 대법관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참고로, 클러크(clerk)라고 부르는 재판연구원은 대법관마다 4명(대법원장은 5명)을 고용할 수 있는데, 연방 대법관 밑에서 재판연구원으로 일하는 건 미국 법과대학원 졸업생들 사이의 최고의 영예다. 대법관, 연방판사, 대법관, 유명 법대 교수들 중에는 연방 대법관 밑에서 재판연구원으로 일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미국 법조계에서 성공의 지름길로 통한다.

그는 수터 대법관의 전기를 준비하면서 수터 밑에서 일한 재판연구원들을 수소문했고, 몇몇이 저술 작업을 돕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이들이 전부 야브로우에게 "다시 생각해 봤는데, (수터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결정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같은 작업을 여러 번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알고보니 수터 대법관이 이들에게 저자와 인터뷰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단다. 수터는 자신의 전기가 나오는 것에 반대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재판연구원이었던 사람들에게 야브로우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 거다.

헤더 거켄 예일 법대 학장은 수터 대법관의 재판연구원이었다. (이미지 출처: 예일 법대 페이스북)

야브로우는 실패했지만, WNYC는 다시 재판연구원들을 찾아 연락했고,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수터 대법관 초기에 재판연구원으로 일했던 헤더 거켄(Heather Gerken) 예일 대학교 법과대학원 학장으로, 수터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런 거켄 학장이 인터뷰에 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재판연구원들도 하나둘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교수인 커미트 루즈벨트(Kermit Roosevelt)는 수터를 처음 만났을 때 특별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건 연방 대법원이 특이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령 윌리엄 렌퀴스트(William Renquist) 대법원장의 경우는 영국 시인 아서 할람의 시를 인용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루즈벨트는 그런 렌퀴스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할람의 시를 미리 외워서 렌퀴스트가 시를 인용할 때 함께 읊었다가 오히려 너무 애쓰는 사람처럼 보인 것 같아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독특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대법관을 하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서 수터는 오히려 평범해 보였다.  

거켄에 따르면 수터 대법관은 예의 바른 성격에, 항상 쓰리피스 수트를 입었고, 아주 윤리적(deeply ethical)이고, 아주 친절한 (deeply kind)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대법관과 달리 판결을 내릴 때 자신의 견해는 (재판연구원들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썼다. 게다가 어찌나 철저하게 편집, 수정하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는지, 연구원들은 초고와 비교해 보면서 같은 부분을 찾기 힘들었다.

유일하게 쓰리피스 수트를 입은 사람이 데이비드 수터 대법관이다. (이미지 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책이 너무 많아서 집이 무게를 버티지 못했다는 얘기도, 사과를 심지까지 다 먹었다는 얘기도 사실이었다. 또 다른 재판연구원인 피터 루빈(Peter Rubin)에 따르면, 수터 대법관은 책 무게 때문에 집의 구조를 보강하는 작업을 했다. 게다가 사과 심지도 먹는 걸 보고 연구원들이 몸에 좋지 않다며 말려야 했단다. 컴퓨터를 비롯한 테크놀로지를 싫어한 것만이 아니라 전등도 꼭 필요할 때만 켰다. 재판연구원들이 늦은 시간에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면 깜깜한 방에서 창가에 서서 달빛에 서류를 읽는 장면을 목격하곤 했단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둔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사람들 눈에 띄게 행동하는 것(public performance)을 싫어했을 뿐이다.

뉴욕타임즈의 린다 그린하우스 기자는 수터 대법관이 은퇴한 2009년에 그의 태도를 하나의 업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수터와 같은 태도는) 대단한 게 아니었다. 과거에는 아무리 유명한 연방 대법관도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판결만으로 말했다. 게다가 그들의 판결문 전문은 법대 도서관에 가지 않으면 일반인이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미디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대법관들은 항상 대중 앞에 노출되어 있다. 북투어에 등장하고, 셰익스피어 연극에 대해서 의견을 이야기하고, 동료들과 유럽을 여행하기도 하고, C-Span(일종의 국회 방송)에서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혹은 법대 대학원에서 특별 강연을 하기도 한다. 수터 대법관은 그러지 않았다. (...) 대법원 회기가 끝나면 자신의 폭스바겐 승용차에 올라 고향인 뉴햄프셔로 향했다. 그가 살던 집은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살아온 작은 농가였다.

그의 전기를 쓴 야브로우에 따르면 뉴햄프셔에서 자라면서 수터는 교회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자기는 대법관이 되겠다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농담삼아 "수터 대법관(Mr. Justice Souter)"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수터의 졸업 앨범을 보면 그의 동급생들이 '우리 학년에서 가장 성공할 것 같은 친구'와 '가장 지적인(sophisticated) 친구'로 수터를 뽑았다.  

수터 대법관이 타던 것과 같은 녹색 폭스바겐 파사트. 대법관들은 (토머스 클래런스 등을 제외하면) 대개 지루할 만큼 평범한 대중차를 타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고, 이어서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하버드 법학 대학원에 들어간다. 졸업 후에는 뉴햄프셔주 법무장관과 주 대법원에서 대법관을 역임했지만, 이런 화려한 경력을 쌓으면서도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꺼렸다.

야브로우에 따르면 이건 그가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한 특별한 견해를 형성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연방 대법관으로 추천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연방 대법원으로

옥스퍼드를 나온 것을 제외하면 미국, 그것도 뉴잉글랜드 지역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보스턴에 가면 되는데 왜 파리까지 갑니까") 살던 데이비드 수터를 연방 대법원으로 끌어들인 것은 뉴햄프셔 고향 친구들이었다. 특히 뉴햄프셔 주지사를 지내고 조지 H. W. 부시의 비서실장이 된 존 스누누(John Sununu)가 수터를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추천했다.

스누누는 그 때의 결정을 크게 후회한다.

존 스누누 비서실장과 조지 H.W. 부시 대통령 (이미지 출처: The Boston Globe)

스누누가 부시에게 수터를 추천한 배경이 중요하다. 로널드 레이건에 이어 1989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부시는 1990년에 드디어 처음으로 대법관을 임명할 기회를 갖게 된다. 보수 기독교는 레이건 때부터 시작해서 이미 정치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여성의 임신 중지(낙태)권리를 보장한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공화당에서는 이 판결을 뒤집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대법원에 낙태에 반대하는 보수 대법관들을 밀어 넣어 다수가 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33년 후인 지난 6월에 그 일이 일어났으니 쉽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 그 방법론은 작동한 셈이다.) 따라서 그 판결에 반대하는 대법관을 임명하는 게 중요했다.

1987년, 보크의 실패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보다 3년 전인 1987년, 공화당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판사인 로버트 보크(Robert Bork)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려다가 크게 실패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당시 인사청문회에 임한 보크 판사는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밝혔다가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의원들도 인준을 거부했다.

워낙 충격적이고 유명한 사건이라 인사 청문회에서 소신있게 말했다가 인준받지 못하는 것을 두고 "보크당했다(getting Borked)"라는 표현이 생겨나기도 했다.

청문회에서 답하는 로버트 보크 판사 (이미지 출처: www.history.com)
1987년에 있었던 보크 판사의 인사청문회는 지금의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설명을 덧붙이면, 당시 보크 판사의 대법관 인사 청문회를 이끌었던 상원 법사위원회 위원장은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조 바이든(Joe Biden) 당시 상원의원이었다. 바이든은 보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보크 판사님, 판사님께서는 평범한 대법관 후보가 아니십니다. 판사님은 도발적인 헌법 철학을 옹호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바이든이 말한 "도발적인 헌법 철학"은 바로 원전주의(Originalism) 원칙으로, 미국의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헌법을 만든 사람들의 본래의 뜻과 목적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미국의 헌법이 만들어진 시점은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었고, 노예제도가 합법적이던 시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쉽게 바꿀 수 없어 그대로 이어져 오는 미국의 헌법을 당시 기준 그대로 적용할 경우 변화하는 시대를 따르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차별을 고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원전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지난 6월 미국의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판결도 궁극적으로 이 원전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로버트 보크 자신의 책 'The Antitrust Paradox(반독점 역설)'에서 특정 기업이 시장을 장악해서 소비자 지불하는 비용이 낮아진다면 독점이 아니라는 논리를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아마존, 구글, 메타와 같은 거대 디지털 기업의 시장 독점을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바이든이 리나 칸(Lina Khan)이라는 젊은 법학자를 연방거래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칸이 바로 보크의 논리를 꺾는 'Amazon's Antitrust Paradox(아마존의 반독점 역설)'이라는 논문으로 디지털 독점 규제의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대법원 내 원전주의자들과 실리콘밸리 플랫폼 기업을 상대로 한 바이든과 민주당의 싸움은 이렇게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당시 로버트 보크의 인사 청문회를 이끌던 조 바이든 (이미지 출처: NBC4 Washington)

무엇보다 민주당에서 걱정하는 로 대 웨이드 판결 뒤집기를 두고 보크는 아주 솔직하게 여성의 임신중지는 헌법 상의 권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민주당에서 보기에 로버트 보크의 법철학이 현실 세계에 적용될 경우 아주 위험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었다. "로버트 보크가 그리는 미국에서는 흑인들은 백인과 함께 앉지 못하고, 여성은 병원이 아닌 뒷골목에서 불법적으로 행해지는 위험한 낙태 시술을 받아야 하는 세상"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로버트 보크는 인사청문회를 자신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자리로 착각한 것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보크를 급진적인 판사로 규정하고 공격했고, 상원 투표 결과 민주당 의원 전원에 공화당 의원 6명까지 반대표를 던져 보크의 인준은 무산되었다. 보크의 인준 실패 사례는 "대법관 후보는 청문회에서 자기 생각을 절대로 솔직하게 밝히면 안 된다"는 유명한 교훈을 남겼다.

대통령 비서실장 존 스누누는 데이비드 수터처럼 수수께끼의 인물이야말로 의회에서 "보크당하지" 않을 완벽한 대법관 후보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스누누와 공화당이 데이비드 수터를 알고 있다고 착각한 데 있었다.

그들은 수터라는 수수께끼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수께끼 대법관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