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의 또 다른 회사 ③
• 댓글 3개 보기라초이에서 1942년에 발행한 중국 음식 레시피 'The Art and Secrets of Chinese Cookery (중국 음식의 예술과 비밀)'에는 디트로이트에 세워진 최초의 라초이 공장의 사진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진 밑에는 "엄선한 제품이 실험실 주방에서 검사를 거쳐 승인되면 미국에서, 미국 직원들이 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동화된 기계를 사용해 포장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2차대전 중인 1940년경, 라초이는 미국 정부가 전시 동원령을 통해 운영하며 한동안 전쟁 물자 생산에 사용했다. 그러다가 1943년에 베아트리스 푸드(Beatrice Foods)가 적대적 인수를 통해 라초이를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월러스 스미스의 가족들은 가지고 있던 지분을 모두 처분하고 라초이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라초이가 베아트리스 푸드에 인수된 후로는 회사 건물도 오하이오주의 아치볼드로 이전했다. 그 당시 나온 홍보 문구를 보면 "철저하게 깨끗한" 재료를 사용했다거나 "미국 농무부의 검사를 받은 품질 관리" 같은 표현들이 눈에 띈다.
이런 표현들은 라초이의 제품이 믿을 만하다는 얘기이지만, 동시에 경쟁 제품들은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유일한과 월러스 스미스는 회사를 시작할 때부터 미국인들이 "중국 음식"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외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xenophobia)에 기반해 중국 음식은 깨끗하지 않다는 인식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라초이는 마케팅에서 '미국'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고 했고, 이게 라초이라는 브랜드의 오랜 특징이었다.
라초이는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농산물을 많이 팔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입의 비중을 꾸준히 줄였다. 1942년에 나온 홍보 책자를 보면 "동양(the orient)이 원산지이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재배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고, 1958년 버전을 보면 "라초이의 숙주나물은 미국에서 재배되는 중국 녹두를 사용해 라초이 공장에서 생산된다"고 강조한다. 1980년대에 등장한 라초이의 TV 광고에서는 "La Choy makes Chinese food swing American (라초이는 중국 음식을 미국적으로 만들어요)"라는 노래를 한다. "라초이는 당신(미국인)이 먹고 싶어 하는 중국 음식을 더 맛있고, 더 안전한 미국 버전으로 만든다"라는 말을 하려는 거다.
라초이는 이런 광고, 홍보를 통해 중국 음식을 비중국계 미국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마케팅하는 데 성공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역사학 교수인 용 첸(Yong Chen)은 "라초이는 홍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라면서, 그렇게 대형 식품기업이 중국 음식을 홍보해 주는 바람에 미국 전역에서 장사하던 구멍가게 수준의 작은 중국 식당들에도 이득이 되었다고 한다. 라초이가 숙주나물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전국에 퍼뜨리기 전까지 미국인들은 숙주나물이라는 재료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런데 중국 음식을 모르고, 심지어 겁을 내던 사람들이 라초이의 광고를 보고 중국 음식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라초이가 홍보용으로 나눠 준 작은 요리책(레시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당에서 먹어 본 중국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보려는 사람이 중국어를 전혀 몰라도 시도해 볼 수 있게 재료의 이름부터 조리법까지 모두 영어로 소개한 라초이의 레시피는 중국 음식이 외식 음식의 수준을 넘어 미국 가정의 주방으로 침투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렇게 중국 음식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중국인, 중국 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 수 있었다.
라초이가 아무리 정통 중국 음식과 거리가 멀어도, 중국인이 만든 기업이 아니라고 해도 중국 음식을 전혀 모르던 미국인들에게 라초이는 아주 훌륭한 '입문'이 되었다. 라초이가 파는 야채와 고기는 한입에 먹을 수 있게 잘 다듬어져 있었고, 미국 가정의 식사 습관에 잘 맞춰졌다.
하지만 라초이가 소개한 방식은 중국 음식과 문화에는 양날의 칼이었다.
싸구려 음식이라는 이미지
라초이는 중국 음식을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소개했지만, 동시에 중국 음식이 "저렴하고 간단한 식사," "싸구려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단순히 이미지만 그랬던 게 아니다. 가령 라초이가 파는 간장(soy sauce)을 보자. 라초이는 초기에는 간장을 중국에서 수입해서 미국에 팔았다. 그런데 수입품을 미국산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HVP(hydrolyzed vegetable protein, 식물성단백질가수분해물)라는 화학재료를 사용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MSG와 함께 식품첨가물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HVP는 1886에 처음 등장해서 국물 맛을 내는 데 사용되곤 한다. 라초이는 이를 사용해서 간장을 만든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간장이 아니다. 자연적인 양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렇게 화학약품을 사용해 만든 간장은 전통적인 간장이 가진 풍성한 맛을 살리지 못한다. 일본산 기꼬만 간장이 진짜 간장이라면 라초이의 "간장"은 HVP에 소금과 콘 시럽, 캬라멜 색소 등을 첨가한 화학제품에 불과하다. 물론 아시아에서 간장을 수입하기 쉽지 않았던 시절에 라초이 경영진이 그런 제품을 팔았던 건 이해할 수 있다. 라초이만 그런 것도 아니어서, 중국 본토를 떠나 전 세계 흩어져 살던 중국인 중에도 HVP로 만든 간장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제대로 된 간장을 구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 시장에서 간장 매출로 2위인 라초이가 지금도 HVP로 간장을 만들어 파는 건 다른 얘기다. 라초이의 간장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그게 진짜 간장이 아니라는 것, 훨씬 더 고급스럽고 뛰어난 맛을 내는 좋은 간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고객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기자가 (라초이 브랜드를 인수한) 콘애그라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와 이야기를 해보니 그 사람도 라초이의 간장이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다른 간장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고 있었다.
이건 결국 중국 음식을 중국계가 아닌 소비자들을 위해 공업화, 미국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국계가 아닌 미국인들에게 중국 식문화를 소개해 주기는 하지만, 부정확하고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선례를 남기는 거다. 문제는 소비자들이 진짜 중국 음식이 어떤 건지를 모르게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19세기 말에 시작해서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찹수이 열풍—라초이가 탄생,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로 그 열풍—은 라초이가 찹수이를 대량 생산하게 되면서 끝났다는 게 미시건 대학교에서 중국사를 가르치는 미란다 브라운(Miranda Brown) 교수의 설명이다.
라초이가 재료를 대중에 확산해서 누구나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만드는 바람에 1950년대에 이르면 미식가나 음식 평론가들이 찹수이라는 메뉴를 수준이 낮은 음식으로 무시하게 된다. 그 결과 찹수이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그걸 주요 메뉴 중 하나로 팔던 중국 식당들은 그 메뉴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면서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물론 라초이가 미친 영향이 부정적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라초이의 등장으로 많은 미국인들이 중국 음식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중국식은 건강식"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지금은 중국 음식에 "기름진" 음식이고 "기름에 튀긴"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라초이가 중국 음식을 홍보하던 시절은 달랐다. 가령 찹수이의 경우 무려 5개의 야채가 들어간, 영양가 높은 균형식인 동시에 집에서 15분이면 만들 수 있는 편리한 음식이라는 게 라초이가 제공한 레시피에 나오는 주장이다.
라초이는 더 나아가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찹수이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직 채식이 유행하기 전이었지만, 사순절(Lent)처럼 종교적인 이유로 고기를 먹을 수 없을 때도 찹수이를 먹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이런 홍보들은 기존에 중국 음식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지막 편 '유일한의 또 다른 회사 ④'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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