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유를 짐작하겠지만, 라초이는 자사의 제품이나 웹사이트에서 창업자들의 이름을 소개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1930년부터 1990년대까지 매년 발행하던 레시피 책자에도 유일한과 월러스 스미스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유일한에 대한 기록은 그가 1928년에 쓴 'When I Was a Boy in Korea (한국에서의 보낸 내 어린 시절)'이라는 책에 나온다. 이 책은 다른 나라의 어린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물의 하나로 출간된 것으로, 유일한은 자기가 1894년 평양에서 출생해서 어떻게 미국으로 왔고, 회사까지 세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의 서문에 따르면 유일한의 아버지는 당시 발달한 서구 문물을 접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일찍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그는 미국 선교사들과 오랜 상의를 한 끝에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로 결정한다. 유일한이 9살 때였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유기연은 다른 아들들은 러시아, 일본, 중국에 보내어 유학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유일한이 도착한 곳이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Hastings)였다.

낯선 나라, 낯선 문화에서 유일한은 두각을 나타냈다.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에서 센터를 맡았고, 연설과 토론에도 뛰어난 "영리한 아이(brilliant boy)"라는 말을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시건주 앤아버에 있는 미시건 대학교에 진학했고, 1919년에 경영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미식 축구부 시절 사진. 가운데가 유일한이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그와 같은 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한 월러스 스미스는 미시건주의 작은 마을,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학비가 부족하면 휴학을 하고 우체국에서 일을 해 돈을 번 후에 학업을 이어가던 학생이었다. 자기가 자란 마을을 벗어나 더 큰 세상에서 살고 싶었고, 유일한과 마찬가지로 경영학을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 지역 농민들과 함께 닭을 키워 파는 사업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 때문에 경영학을 더 공부해 보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스미스는 가까운 대도시 디트로이트로 가서 식료품 상점을 열었고, 유일한은 미시건 센트럴 철도회사와 제네럴 일렉트릭 같은 회사에서 일했다. 유일한은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고, 자기 집 지하실에서 숙주나물을 키웠다. 숙주나물, 콩나물은 당시 한국의 주부라면 누구나 집에서 키우던 것이었기 때문에 유일한에게도 익숙한 일이었을 것이다. 숙주나물은 재료비가 많이 들지 않고 쉽게 키울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사업으로서 전망이 좋았다.

1920년대 미국 전역에서 찹수이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찹수이를 비롯한 많은 중국 메뉴들이 밥과 함께 먹는 반찬 메뉴인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 미국인들은 밥 없이 주메뉴로 먹곤 했다. (이미지 출처: Curated Kitchenware)

유일한과 스미스는 같은 과에서 함께 공부한 동기였을 뿐 아니라, 학교의 축구경기도 함께 관람하던 친구였다. 그러니 유일한이 자기가 키운 숙주나물을 팔기 위해 스미스가 운영하던 식료품점을 찾아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숙주나물이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숙주나물은 며칠만 놔두면 금방 시들어 갈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냉장고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에는 유리병에 담아 보려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색이 변했고, 보기에 흉했다. 그렇게 고심하던 끝에 찾아낸 방법이 통조림이었다. 통조림으로 만든 숙주나물은 색도 변하지 않았고, 특유의 바삭함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이 보관법을 찾기에 애쓴 이유는 숙주나물을 스미스의 식료품 가게에서 파는 데 그치지 않고, 공장 생산을 통해 전국에서 팔기 위함이었다. 당시 찹수이 인기에 올라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생산 시설을 만들기 위해 스미스의 친구와 가족들에게서 25,000달러를 투자받아 디트로이트에 있는 통조림 공장을 임대할 수 있었다. 스미스의 딸은 당시 공장에서 한 종업원이 숙주나물을 실내에서 대량으로 기를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 냈다고 한다.

라초이의 숙주나물 통조림과 초기 광고 (이미지 출처: Absolute Michigan)
그런데 라초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 낸 걸까? 두 사람이 그런 이름을 고른 이유를 이야기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냥 (미국인들이 듣기에) 중국 이름처럼 들리기 때문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중국계 미국인들이 이 브랜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하지만 유일한이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눈에는 '진짜(authentic)' 중국 음식으로 보일 수 있었고, 스미스가 백인이었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영업을 하기에 용이했다.

물론 찹수이에는 숙주나물 말고도 다양한 야채가 들어가지만, 셀러리나 당근 같은 재료들은 미국인들이 평소에도 자주 먹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고, 미국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마름열매(물밤)이나 죽순은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숙주나물이 아닌 다른 채소도 팔아 사업을 확장할 계획을 하던 중, 1925년에 중국에서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으로 미국에서 중국산 녹두를 구하기 힘들어지자, 유일한은 '그렇다면 한국산 녹두를 수입하자'는 생각을 하고 수입선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1925년은 그가 미국에서 만난 메리 우(Mary Woo, 중국명 胡美利호미리)라는 중국계 미국 여성과 결혼한 해이기도 했다. 사업차 방문한 한국이지만, 오랜만에 부모님께 인사도 드릴 기회였다. 하지만 한국에 간 유일한은 아버지를 만나며 생각이 바뀐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61세로, 환갑을 넘었기 때문에 한국의 풍습에 따라 장남이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느낀 것이다. 그는 영구 귀국을 결심한다.

그렇게 귀국한 후의 유일한은 우리가 잘 아는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이다. 귀국 직후인 1926에 그가 설립한 유한양행은 거대한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그럼, 혼자 남은 스미스는 어땠을까? 한국산 녹두를 수입하러 간 유일한이 회사에서 손을 떼자 미시건에서 농장을 매입해 녹두를 비롯한 다양한 채소를 재배하면서 수입에 의존하던 비율을 낮췄다. 그렇게 해서 라초이는 점점 더 미국 회사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라초이의 주력 상품은 여전히 중국 음식을 위한 식재료였다. 1930년대부터는 기름에 튀긴 면을 선보여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회사가 날로 성장하던 1937년 어느날, 스미스는 가족을 데리고 피크닉을 떠난다. 새로운 공장의 기공식을 하는 김에 가족과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날씨가 갑자기 변하면서 번개가 칠 징후(번개를 동반한 폭풍을 electrical storm이라 부르는데,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등의 전조 현상이 있다)가 보여서 스미스는 모인 사람들을 실내로 들여보내고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창고의 문을 닫으러 갔다. 두 사람이 창고의 문을 잠그기 위해 쇠사슬을 드는 순간 벼락이 내리쳤고, 둘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스미스가 신고 있던 신발이 날아가고 그의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이 녹아 달라붙었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창업자를 모두 잃은 라초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후의 이야기는 미국 내 아시아 문화에 대해 많은 걸 설명해 준다.


'유일한의 또 다른 회사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