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 댓글 11개 보기이 이야기는 내가 즐겨 듣는 This American Life에 등장한 어떤 사람의 경험담이다. 진행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약 20분가량 들려준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옮길 생각은 없다. 일상적 대화체이고, 미국인의 뉘앙스를 있는 그대로 전부 전달하기도 힘들다. 물론 여기에서 직접 들을 수 있고, 필요하면 여기에서 녹취록을 보면서 들을 수도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들어보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목소리와 노래에 관한 것이고, 직접 들어보는 게 훨씬 더 깊은 이해를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더라도 꼭 한 번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용을 글로 최대한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러나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떤 문제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샌디 앨런(Sandy Allen)은 특별히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났다. 서너 살 때 이미 친척의 결혼식에서 'Somewhere Over The Rainbow'같은 노래를 축가로 불렀을 정도였고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학교에 입학해서는 교내 뮤지컬에 출연했고, 합창단에 입단해서 국내외의 행사에 참여해서 노래를 불렀다. 열다섯 살 때는 합창단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경기장에서 노래를 했고, 호주 시드니의 그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공연을 했다.
샌디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여성 합창단에서도 가장 높은 음을 낼 수 있는 단원이었어요. '오 거룩한 밤(O Holy Night)'이나 미국 국가에서 가장 높은 음을 내는 대목을 부르는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샌디의 음역은 무려 3옥타브에 달했고, 한 때는 줄리어드에 입학하는 것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샌디는 줄리어드에 가지 않고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너무나 좋아해서 가라오케에서든, 혼자 있는 방에서든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샌디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샌디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노래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하지만 이건 노래와 달리 아무도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꼭꼭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샌디가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 건 20대 초, 대학에서 알게 된 트랜스젠더 친구 덕분이다. 그 친구의 집에서 테스토스테론 호르몬 주사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샌디가 자신을 논바이너리(non-binary)이자 트랜스젠더(FTM, female to male)라고 커밍아웃한 것은 그로부터도 몇 년이 지난 후였다.
대부분의 트랜스젠더가 커밍아웃할 때 겪게 되듯 샌디는 자신을 아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샌디가 걱정하는 것은 또 하나 있었다. 그의 목소리였다. "(만약 호르몬 주사를 맞게 되면) 우주가 제게 벌을 내릴 것 같았어요. 테스토스테론을 맞게 되면 제 아름다운 목소리, 제가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을 들여 가꿔온 목소리가 망가질 것이고, 저는 다시는 노래를 부르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었죠."
호르몬 등을 통해 성이 바뀌는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게 된다는 두려움은 많은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것이다. 샌디의 두려움은 자신의 목소리가 더 이상 노래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데 있었다. 그가 아는 한 트랜스젠더 남성들 중에 유명한 가수는 없었다. 어떤 한 트랜스젠더가 팟캐스트에 나와서 자신이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런 고민으로 4년이 흘렸다.
그리고 2020년, 샌디는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호르몬 주사를 맞기 전, 그러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변하기 전에 그동안 좋아하고 아껴왔던 노래를 녹음하기로 했다. "제게 향수와 같은 곡들이었어요. 십 대 시절에 차에 타서 부르던 노래들이죠. 'Somewhere Over The Rainbow' 같은 노래는 제게 일종의 기념관(memorial) 같은 곡인데, 마지막으로 불러보고 싶더라고요."
샌디에게는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는 상태로 가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 같았다. "정말 슬펐고, (제 자신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평생 함께 살아온 좋은 친구를 죽이려는 것이었고, 그 친구가 죽기 전 며칠만 더 함께 보내고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고 목소리가 정말로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변하는 목소리는 좋은 목소리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지도 않을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샌디는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selfhood)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애도하고 있었다. 한 번도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아주 오랫동안 여성으로 행동해왔는데 이제 그 모든 것에 작별을 고해야 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샌디가 녹음한 빌리 아일리시의 'My Future'가 나온다. 샌디는 이 노래를 부른 자신의 목소리를 두고 "너무 가늘고(thin), 자신 없고(tentative), 자신에게 맞지 않는" 목소리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자신이 부른 데이빗 보위의 'Change'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한다. 남성 가수의 갈망(yearning)이 느껴지고, 자신의 목소리에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좋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깡통을 긁는 듯한 거슬리는 목소리(십 대 남자아이의 변성기 때 목소리를 상상하면 된다–옮긴이)였다. 어느 순간에는 아예 음을 낼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점점 노래를 부를 만한 목소리가 되기 시작한 거다. 이는 그가 상체 수술(트랜스젠더의 가슴 성형수술을 흔히 'top surgery'라 부른다)을 받았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었다. 수술 후 한동안은 상체를 쓸 수 없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머그컵을 떨어뜨리지 않고 들 수 있었을 때 그렇게 기뻤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가 아직 불안한 상태에 있는 동안 샌디는 레너드 코헨이나 죠니 캐쉬 같은 (저음의) 남자 가수 노래를 불러봤다. 영 아니었다. 흔히 남성 호르몬이라고 하는 테스토스테론은 사람의 몸에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무게가 몸에 분배되는 비율도 달라지고, 피부의 두께와 머리카락의 굵기, 그리고 체모가 자라는 속도도 달라진다. 그렇게 일으키는 변화 중 하나가 성대(vocal cords)가 두꺼워지는 것인데 그 결과로 목소리가 꺾이는(voice breaking, 흔히 '삑사리 난다'고 하는 소리) 일이 일어나고, 저음으로 변하게 된다.
40대에 다가가면서 이런 2차 성징을 기다리는 일은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상체 수술을 받았고, 얼굴에 수염이 나기 시작했고, 이제 목소리가 낮아지는 걸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순간이 찾아왔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노래를 하려는데 미들 C(가온 도) 음을 낼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미들 C는 제 음역이 시작되는 지점이었어요. 예전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때는 미들 C가 가장 내기 쉬운 음이었죠. 그런데 그 음을 낼 수 없게 된 거예요." 목소리는 샌디가 자신이 신체에서 가장 익숙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존재로 변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노래답게 부를 수 있는 곡을 발견했다. 엘튼 존의 'Your Song'이다. 자신이 부르면서도 '오호... 이것 봐라'할 정도로 신기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더 큰 악기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바이올린이었다가 첼로가 된 것 같은, 피콜로였다가 플룻이 된 것 같은 느낌. 샌디의 새로운 악기는 사용법도 달라서 더 많은 공기를 통과시켜야 한다.(이 대목에서 샌디는 과거에 불렀던 빌리 아일리시의 'My Future'를 새로운 목소리로 다시 부른다. 그의 목소리의 변화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제 샌디는 매일 일어나 노래를 부를 때마다 멋지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았다고 느낀다. 소리가 더 잘 나오는 날도, 잘 나오지 않는 날도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선 어둠 속에서 뭔가를 찾아 헤매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 다른 쪽(the other side)으로 넘어왔고, 자신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3옥타브 목소리부터 시작해서 호르몬 치료 이후 불안정했던 목소리까지 그가 경험한 목소리들은 지금의 목소리를 만드는 뼈대의 역할을 했다.
"제 목소리는 다른 소리예요 (It's a different sound). 제 목소리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게 트랜스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제 목소리가 시스젠더 남성처럼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다른 소리예요. 저는 인간의 몸에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특정한 조합의 결과물입니다. 저는 이 결과물이 마음에 들어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저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목소리를 갖게 되었죠. 저는 더 성숙해졌고, 조금은 더 깨지기 쉬운(fragile) 상태이기도 하지만 아직 새롭기 때문에 그럴 수 있죠. 아, 그리고 저는 매일 제 자신을 푸시해서 전에는 해본 적 없는 것들을 하려고 합니다."
하루는 그가 과거에 (목소리가 변하기 전에) 자신이 녹음한 빌리 아일리시의 'My Future'를 틀어 놓고 현재의 목소리로 셀프 듀엣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예전의 목소리는 자신이 떠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흥미로운 존재로 느껴졌다. 한 때는 완전히 낯설던 것이 이제는 진정한 자아의 표현이 된 것이다.
나는 위의 내용을 팟캐스트로 들으면서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 비가 올 가능성이 14%라고 해서 나갔는데, 안경에 가끔 몇 방울씩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비가 온다고 말할 수도 없는 애매한 날씨였다.
9월 초의 날씨는 참 애매하다.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기온이 높고, 그렇다고 여름이라고 하기에는 선선하다. 바다와 호수 옆을 지날 때는 여름과 다름없이 덥게 느껴지지만, 숲을 통과할 때는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계절은 그냥 인간이 나눈 구분일 뿐, 자연은 그냥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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