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소개한 뉴욕타임즈의 영상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엘리자베스 2세를 추모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업적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설명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읽는 '사람'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그가 평생 추구해온 '역할'에 대한 설명이다. 그가 스스로 정의하고 수행했던 역할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 이 영상은 그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그 역할에 동의하는 사람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엘리자베스 2세가 그 역할을 철저하게, 최선을 다해 수행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게 된다.

뉴욕타임즈가 말한 것처럼 여왕은 '미디어 퀸'이었다. 미디어에 비치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활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그 작업을 통해 투사하려 했던 이미지는 엘리자베스라는 개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라는 직책이 대표하는 왕실, 즉 제도(institution, 기관)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있다. 미국 여성인 메건 마클과 결혼한 해리 왕자가 왕족으로서의 의무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건너가 일반인처럼 직업을 갖고 살려고 결심했을 때의 일이다. 이를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전달하고 허락을 받으려고 여왕이 머무는 궁전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물론 사전에 알리고 일정을 잡은 방문이었다. 해리는 할머니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할머니가 아닌 여왕으로 참석했고, 해리의 아버지인 찰스(현 국왕)를 포함해 모든 참석자가 보좌진을 대동하고 나타난 회담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엘리자베스는 국왕으로서 일을 처리했고 해리가 원하던 가족 간의 딜이 아니라 여왕이 내리는 포고(edict)였다. 그 자리에서 해리는 왕족의 임무에서는 물러날(step back) 수 없고 내려가야(step down) 한다는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