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능력

언론에서 카멀라 해리스의 "무능력"을 이야기할 때 예로 드는 게 2020년 대선을 노리고 펼쳤던 당내 경선 선거운동이다. 결론적으로 해리스는 이 경선에 참여해 토론을 했고, 이후에 바이든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선거운동 자체는 형편없었다. "카멀라 해리스는 도대체 왜 대선에 나왔는지 모르겠다"는 게 당시 일반적인 평가였다. 이건 중요한 지적이다.

후보는, 그것도 대통령 후보는,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나오는 게 아니다. 첫째, 나라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둘째, 그걸 가장 잘 해결할 사람이 자기라는 걸 주장할 수 있을 때 나온다. 이게 그 후보의 '플랫폼(platform)'이 된다. 캘리포니아에서 승승장구해서 검찰총장과 연방 상원의원까지 되었으니, 해리스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그가 대선에 나와서 뭘 해결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그걸 가장 잘 해결할 사람이 해리스인지 알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해리스는 자기가 실력을 키우고 성장한 것과 완전히 다른 정치적 환경, 즉 트럼프 등장 이후 변화한 민주당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브랜드가 먹히지 않음을 발견했고, 그 상황에서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문제를 가져다 조립하다 보니 "도대체 카멀라 해리스는 뭘 하려는 거냐?"는 말이 나오게 된 거다.

뉴욕타임즈의 네이트 콘(Nate Cohn) 기자는 트럼프 이후의 민주당을 이렇게 설명한다. 트럼프의 돌풍에 맞서 이기려면 공화당 쪽으로 기울어있지만 트럼프는 싫어하는 유권자를 데려와야 했다. 격전지에서 그런 유권자들의 표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중도 성향의 백인 남성 후보들(현재 카멀라 해리스의 러닝메이트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대개 여기에 해당한다)을 내세우는 거다. 이 방법은 잘 먹혔고, 민주당은 트럼프 등장 이후 많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콘 기자는 바이든이 바로 그런 후보라고 설명한다. 대통령이 된 후로 민주당의 진보세력에게도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바이든은 평생 중도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지독하게 진보적인 캘리포니아 출신이라는 정치적인 부담이 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해리스도 중도였지만, BLM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검사 출신이라는 건 또 다른 부담이었다. 2019년 민주당 경선에서 그가 보잘것없는 성적을 내고 12월에 조기 후보 사퇴를 한 건 이렇게 정치적 환경에 맞지 않았던 탓이 크다. 그러니 메시지가 꼬이고, 정체성이 헷갈렸던 거다.

여기에서 정치인이 유능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 바이든의 1988년 대선 출마는 대실패("failed spectacularly")로 끝났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지금의 바이든은 2020년의 트럼프 재선을 막아내고 미국을 제 위치로 돌려놓았을 뿐 아니라, 경제 정책에서도 성공한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상원 경력이 길어서 1988년, 2008년에 각각 대선에 출마해서 당내 경선에 참여했지만, 그가 경쟁력 있는 후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1988년 선거 때는 연설문 표절 문제에, 선거운동본부 스탭들을 관리하지 못하는 총체적인 난국을 겪었다. 2019년의 카멀라 해리스의 선거운동은 당시 바이든 캠프에 비하면 훌륭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똑똑한 정치인은 실패에서 배우고 성장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상황의 변화다. 세상에는 자기 실력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많지만, 대통령은 실력만으로는 될 수 없다.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아닌 상황에서 미국의 유권자들이 바이든을 선택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 트럼프라는 환경이 바이든으로 하여금 그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카멀라의 목소리

그럼 2024년의 미국은 카멀라 해리스를 요구하고 있을까? 아직 알 수 없다. 여론조사를 보면 부정적이다. 해리스는 미국 전역에서 트럼프에 뒤지고 있다. 바이든보다는 낫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해리스에 앞서고 있고, 미국 언론에서 자주 하는 말처럼 "내일 당장 선거를 하게 되면" 트럼프가 이긴다. 그래서 카멀라 해리스는 빨리 이미지를 바꾸고 "자신을 재발명(reinvent)"해야 한다는 말이 많다.

당연한 얘기지만, 카멀라 해리스는 2019/2020년처럼 선거운동을 하면 안 된다. 훨씬 더 분명한 메시지를 내고, 조직관리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해리스의 부통령실은 직원들의 턴오버가 많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과연 해리스가 자기를 재발명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시대와 환경이 다시 '유능한 검사 카멀라 해리스'를 요구하는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해리스는 그동안 숨기고 있던 검사의 목소리를 다시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상대가 이미 유죄 확정을 받았고, 다른 혐의로도 재판을 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2020년에 마이크 펜스(Mike Pence) 부통령과의 토론 때 자꾸 끼어드는 펜스를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I'm speaking (제가 말하고 있습니다)"라며 막아내는 모습을 검사 출신의 카멀라 해리스만큼 잘 만들어 낼 다른 정치인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카멀라 해리스는 오바마 같은 남성 정치인처럼 원대한 주제로 "아름다운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경쟁 후보와 일대일 토론에서 팩트를 동원해서 증명하는, 목표가 분명한 대결에서 본연의 목소리가 나온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검사의 본능이 살아나는 듯하다. 이번 미국 대선의 첫 번째 어젠다는 누가 뭐래도 트럼프다. 공화당 지지자들에게는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선거"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트럼프의 재선을 막는 선거"이지, 바이든이나 해리스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제1의 목적이 아니다. 이런 선거에서 자기만의 생각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해리스의 단점은 축소되고, 범죄자와의 대결에서 투사가 되는 그의 장점은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이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트럼프다. 바이든이 지난 토론회에서 횡설수설한 직후, 트럼프는 바이든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낮췄다. 평소라면 사정없이 조롱했을 트럼프가 의외로 조용한 것을 보고 사람들은 트럼프가 바이든을 경쟁 상대로 선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가면 이길 게 분명한데 지나치게 밀어붙여서 후보가 교체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기대와 달리 민주당은 대선후보를 교체했다. 그 직후 트럼프 선거운동 측에서 나온 반응을 보던 언론에서는 카멀라 해리스가 후보가 되자 "트럼프 진영이 패닉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진영이 해리스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음을 보도하는 매체들

물론 이런 보도가 나온 곳들이 대부분 진보 성향의 매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카멀라 해리스가 대선 후보로 등장한 후 트럼프가 소셜에 쏟아내는 포스트를 보면 위험의 냄새를 맡은 것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트럼프는 카멀라 해리스의 등장을 민주당 내의 쿠데타라고 부르면서 바이든이 교체된 것에 강한 불만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트럼프는 2020년 민주당 경선 때도 그랬다. 당시 민주당 후보 중에서 앞서 있는 진보적인 후보들에 대해서는 흔히 하는 조롱 정도에 그쳤지만, 인기도에서 뒤지고 있던 바이든 후보에 대한 공격은 유난히 지독했다. 이를 두고 "바이든이 당장은 약해 보여도 민주당 후보가 될 경우 자기에게 가장 위협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평론가가 있었다. 그의 말은 맞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카말라 해리스와 함께 일했던 정치인 라티파 사이먼(Lateefah Simon)은 검사 출시의 카말라 해리스는 "입을 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서 진실을 끌어내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정치인이 된 해리스가 그런 능력을 발휘한 상대는 대개 나이 많고 힘 있는 백인 남성들이다. 아래 영상들을 보면 트럼프가 카멀라 해리스와 대선 토론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트럼프는 해리스가 후보가 되자 그렇다면 자신에게 호의적인 폭스뉴스가 주최해야 토론회에 나오겠다고 해서 빈축을 샀다.)

트럼프의 법무장관 제프 세션즈(Jeff Sessions)는 청문회에서 해리스에게 "그렇게 몰아붙이시니 불안하다"고 항의했다.
트럼프의 또 다른 법무장관 윌리엄 바(William Barr)를 추궁하는 해리스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인사청문회 때 가장 주목을 받은 정치인은 해리스였다.

카멀라 해리스는 바이든의 지지를 받고 등판한 직후 트럼프가 대선 토론회에 동의하는 것과 상관없이 바로 포문을 열었다. 지난 민주당 경선 때 사용했던 표현이지만, 여전히 유효한—아니, 트럼프의 유죄 판결 이후 더욱 위력이 커진—문구라서 약간만 바꿔서 다시 사용한다. 현재 바이럴이 되고 있는 해리스의 말은 이렇다:

"아시다시피 저는 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연방 상원의원이었고, 그전에는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이었고, 그전에는 법정에서 활동하던 검사였습니다. 그 일을 하던 시절, 저는 온갖 종류의 범법자를 다뤘죠. (무슨 말이 나올지 아는 청중의 웃음) 여성을 공격하는 약탈자들, 소비자를 등쳐먹는 사기 기업들, 법을 무시하고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제가 다루던 범죄자들입니다. 따라서 제가 '도널드 트럼프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안다'고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뉴욕타임즈의 니콜 앨런(Nicole Allan) 기자는 이를 두고 "카멀라 해리스는 트럼프를 이길 수 있는 아주 독특한 위치에 있다(She is uniquely positioned to beat Trump)"라고 표현한다.

바이든이 후보직을 사퇴한 후 델라웨어주에서 한 카멀라 해리스의 연설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트럼프 저지 선거'이자 '여성의 결정권(임신 중지권)을 지키는 선거'로 규정하고 있다. 공화당은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강간, 근친상간 등 어떤 이유로 하게 된 임신도 중지할 수 없는 완전 금지(total ban)를 추진하겠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인 바이든은 정치적으로 여성의 임신 중지권을 지지하면서도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최대한 피해 왔다. 이런 바이든의 태도에 대해 민주당 내에서는 불만이 존재했다. 젊은 여성 유권자들의 참여 여부가 결과를 가를 중요한 선거에서 그들을 투표소로 끌어낼 이슈를 공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뉴욕타임즈 데이비드 엡스틴(David Epstein) 기자의 설명을 옮겨 보면 이렇다:

"지난 3주 반(문제의 토론회 이후로 후보에서 사퇴할 때까지) 동안 바이든이 보여 줬던 문제, 좀 더 넓게 보면 바이든이 선거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민주당과 선거운동본부가 겪었던 문제는 대통령이 앞으로 4년 더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확신을 유권자들에게 심어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 확신을 주고 나서야 그다음 단계, 즉 도널드 트럼프가 어떤 것들을 위협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첫 단계를 통과하지 못한 거죠. 그게 바이든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해리스는 유권자들이 트럼프 정권이 들어섰을 경우에 염려해야 할 것들을 바이든은 할 수 없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 번째가 임신 중지 문제입니다. 해리스는 이 주제에 관해 바이든보다 훨씬 더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이든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노련하게 이 문제가 트럼프와 관련되어 있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카멀라 해리스의 정치적 능력(political skills)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평판)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해리스의 2020년 대선 선거운동은 엉망이었고,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부통령이 된 후에는 국경 문제, 투표권 문제처럼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을 넘겨받았죠. 하지만 2년 전에 연방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린 후 카멀라 해리스는 대중 앞에서 훨씬 더 호소력 있는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제 짐작입니다만, 부통령 초기에 해리스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이 굳어진 사람들이라면, 그가 대선 주자가 된 후에 발휘하게 될 실력에 놀라게 될 겁니다."

카멀라 해리스를 지켜본 이들의 생각이 맞는지 지켜보자.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