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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 동안 여러 개의 신문사에 칼럼을 연재했다. 여러 곳에 동시에 연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제가 모두 다른 칼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정치적인 견해를 쓸 수 있는 신문이 하나 있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 글을–그것도 신문에–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꼭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쓸 수 있는 신문이었다. 그 정도로 진보적인 매체였다.

얼마 전 일이다. 대통령 영부인 김건희 씨가 외국에 나가 가난한 아이를 안고 유치한 수준의 홍보 사진을 연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빈곤 포르노'를 지적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걸 보면서 마침 내가 쓸 차례가 돌아왔기 때문에 그 얘기를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그리고 평소처럼 칼럼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하려고 온라인판에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칼럼은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내가 신문사로 넘긴 글이 실리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문사에서 특별한 해명도 없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내 칼럼이 실리기로 되어있던 그날 신문 사설이 바로 '빈곤 포르노'라는 말로 영부인을 공격하지 말라는 (빈곤 포르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사람의 쓴) 글이었다. 외부 기고자의 칼럼과 신문사의 입장을 표현하는 사설이 충돌했던 거다. 그렇다면 신문사의 결정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직접 운영하는 매체가 있으니 내 독자들에게 보여주면 그만이다. (오터레터에 실린 '고통을 파는 사람들 ①'이 그렇게 나왔다.) 나는 신문사는 자신의 견해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언론은 정보의 문지기(gatekeeper)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걸 하지 않고 모든 글을 통과시킨다면 소셜미디어와 다를 게 없어진다. 다만, 그 일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문사는 소속된 기자, 편집자보다 주인이 어떤 사람, 어떤 기업이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신문사는 얼마 전에 한 건설사가 인수했다.)

두 개의 전선

작년, 그러니까 2021년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 중 여성은 단 한 명이다. 평화상을 공동수상한 마리아 레사(Maria Ressa)가 그 사람이다. 내가 '마리아 레사'라는 이름과 그가 운영하는 필리핀의 영문 온라인 매체 래플러(Rappler)에 대해 처음 들었던 건 2017년이다. 그즈음 나는 한국에서 뉴미디어를 발굴, 투자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관련된 국제 컨퍼런스에 초대받아 참석하곤 했다. (이런 컨퍼런스를 대개 구글,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후원하곤 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니다.) 그런데 행사 장소가 홍콩, 싱가포르, 태국처럼 동남아에 모여있어서 난생처음으로 동아시아도 아니고, 영미-유럽권도 아닌 지역의 언론 상황에 대해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그곳에 모인 언론인들은 동아시아 언론인들보다 영어를 훨씬 자유롭게 사용했다. 인도, 파키스탄부터 시작해서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같은 지역에서는 주요 매체가 영문인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국경을 초월해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홍콩의 언론인과 파키스탄의 언론인, 필리핀의 언론인들이 만나서 "그동안 잘 지냈느냐"면서 몇 개월 만에 만나는 친구들처럼 인사를 나눴다. 실제로 몇 개월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마리아 레사 (이미지 출처: Princeton University)

그 컨퍼런스들에 마리아 레사가 오지는 않았지만, 각국 언론인이 자신들의 뉴스룸 디지털 노력을 설명할 때 필리핀의 래플러와 마리아 레사의 이름은 훌륭한 지향점인 듯 자주 등장했다. 나는 그들의 발표를 들으며 내 폰으로 Rappler를 처음 검색해봤을 만큼 동남아 언론 상황에 무지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더 중요한–다른 한 가지는 (당시만 해도 홍콩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인 참석자들이 자국에서 독재자와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동남아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들 중 많은 언론인이 독재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컨퍼런스들은 언론사 뉴스룸의 디지털화를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필리핀, 인도네시아 같은 곳에서 온 언론인들은 자국의 비민주세력, 권위주의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과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싸움, 두 개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동아일보 기자 해직 사태부터 한겨레 창간으로 이어지는 1970, 80년대 한국의 언론상황은 전선戰線이 하나였다.)

마리아 레사가 이끄는 래플러는 그 두 전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최선봉에 있었다. 그래서 다들 래플러를 얘기했던 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한참 뒤에나 깨닫게 되었다.

극한 테스트

한참 뒤라는 건 2019년 즈음이었다. 방문 연구원으로 미국에 와서 지내면서 미국 언론에서 래플러와 마리아 레사가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 맥락은 빅테크, 그중에서도 소셜미디어의 대표 기업인 페이스북에 대한 비판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테크 기자인 카라 스위셔(Kara Swisher)가 마리아 레사를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필리핀 문제에 특별히 관심이 없던 다른 기자들도 마리아 레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거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마리아 레사가 카라 스위셔에게 먼저 연락해서 필리핀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달했고, 그게 필리핀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이며, 가만 놔두면 궁극적으로 전 세계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그게 레사가 목소리를 높여 하는 얘기였다) 알게 된 스위셔가 미국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스위셔는 이 문제를 알려준 레사를, 레사는 이 문제를 널리 알려준 스위셔를 고마워한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과 마리아 레사 (이미지 출처: Medium)

마리아 레사가 주목한 건 무슨 문제였을까?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자의 등장이었다. 물론 당시 트럼프 정권에 지쳐있던 미국인들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와 미국의 트럼프가 같은 해인 2016년에 당선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사가 자세히 설명하지만,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는 필리핀에서 두테르테 정권의 탄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페이스북이라는 '인프라'가 깔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레사의 주장이 미국과 전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단순히 "브렉싯, 트럼프 당선뿐 아니라 필리핀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에서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던 페이스북의 문제, 혹은 잘못을 그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특히 뉴스룸이 디지털화하고 소셜미디어에 의존하게 된 세상에서 정보, 혹은 가짜 정보의 문제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경험하고 있지만 국민의 97%가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필리핀은 말하자면 소셜미디어 시대에 언론이, 혹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일종의 극한 테스트 장소였다.

마리아 레사라는 사람은 그런 상황을 서구에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화적 교차로와 같은 존재다.

마리아 레사

오늘 소개하는 책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는 그런 마리아 레사가 자신의–지금까지의–인생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영문 원제는 'How to Stand Up to a Dictator,' 즉 '독재자에 맞서는 법'이다. 한국어판 제목과 영문 제목 중 어떤 쪽이 더 직설적인지는 읽어보실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마리아 레사가 어떤 인물이고 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지 조금이라도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거의 모든 답을 준다. 자신의 출생과 성장, 언론인이 되는 과정, 그리고 현재 그가 벌이고 있는 싸움을 시기별로 3부로 나뉘어 저자 본인의 개인적인 목소리로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챕터도 지루하지 않다.

필리핀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레사는 어린 시절, 집안의 우여곡절 끝에 재혼한 어머니가 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다. 많은 이민자, 특히 아시아계 이민자 가정이 자녀 세대에 가진 기대대로 안정된 직업을 위해 의대 진학을 고려하다가 생각을 바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혼자 필리핀으로 돌아온다. 이때가 1980년대였다.

1980년대는 미국에서 CNN이라는, 전무후무한 24시간 뉴스를 전하는 매체가 탄생해서 미디어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때다. 물론 CNN도 처음에는 어설픈 신생 미디어였고 미국의 3대 방송사(ABC, NBC, CBS)들이 우습게 생각하는 작은 기업이었다. 하지만 뉴스'도' 전하는 방송사와 뉴스'만' 전하는 방송사라는 차이점을 공략하면서 새로운 뉴스 전문 채널을 만들어낸 CNN은 1980, 90년대를 거치며 폭풍성장을 하게 되는데 마리아 레사는 CNN에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지역의 뉴스를 전하는 '동남아시아의 얼굴'이 된다.

이 책이 흥미로운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지난 반 세기 동안의 뉴스 변천사를 개인의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지난 50년 동안 뉴스 매체의 가장 큰 변화 요인을 두 개 꼽으라면 CNN을 필두로 한 뉴스 전문 TV매체의 등장과 소셜미디어의 등장이다. 그런데 마리아 레사는 그 두 변곡점 최전방에서 일한 언론인. 따라서 이 책은 현대 뉴스의 변천사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입문서다.

레사는 2010년, 그때가지 동시에 소속되어 일하던 필리핀의 ABS-CBN 방송국과 CNN의 일을 그만두고 래플러를 설립하면서 필리핀에서 온라인 미디어의 새로운 장을 열었는데, 그 과정에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중계를 과감하게 도입하는 등의 실험은 2010년대 디지털 미디어를 요약해 준다.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만 마리아 레사가 오래도록 일하던 언론사를 떠나 자신만의 매체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언론사 사주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매체가 흑자를 내면서도 권력에 굴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미지 출처: Rappler)

마리아 레사가 등장하는 인터뷰나 대담의 영상, 사진을 보면 그가 얼굴에 미소를 띠지 않고 있는 장면을 찾기 쉽지 않다. 자신에 대한 암살 위협처럼 (필리핀은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나라이고, 레사는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위협 때문에 레사는 길을 다닐 때 방탄조끼를 입는 일이 있다고 한다) 심각한 얘기를 할 때조차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엄청난 낙관론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그렇게 보지 않기 힘들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벼랑 끝에 와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긴장감은 그가 두테르테와 맞서는 과정에서, 페이스북의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를 최전방에서 마주하면서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필리핀과 미국의 경계에 살면서 양쪽에서 타인/외지인 취급을 받아온 경험, 그리고 성소수자로서 살면서 생긴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는 이렇듯 마리아 레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미디어의 역사이기도 하고, 트럼프/두테르테 이후로 전 세계적인 정치적 변동의 모습을 요약해주는 좋은 지침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를 펴낸 북하우스 출판사에서 오터레터 유료 구독자들을 위해 10권을 기증하셨습니다. 책을 받아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댓글에 한국시간으로 12월 31일 자정까지 의사를 밝혀주시면 제가 1월 1일에 무작위 추첨을 통해 발표하고 책을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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