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우울증(winter blues)이라는 게 있다. 우울증이 반드시 계절과 날씨와 상관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비 오는 날과 겨울은 분명히 더 힘들다. 흐린 날이 많은 영국에서는 특히 1월의 월요일이 사람들에게 가장 우울한 날이라고 해서 '우울한 월요일(Blue Monday)'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그에 반하는 가장 행복한 날은 6월 23일, 즉 하지라고 한다.)

이 주장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면 찰스 슐츠의 만화 '피너츠'에서 주인공 찰리 브라운이 자신은 크리스마스에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고 했던 유명한 대사는 단순히 찰리의 문제만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나는 행복하지 않아.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질 않아."

많은 문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겨울 명절들은 어쩌면 이렇게 힘들고 우울한 계절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밤이 가장 길어지는 동지(winter solstice)를 중심으로 명절들이 몰려있는 이유는 가장 춥고 힘든 계절이 바닥을 치고 이제부터는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일종의 희망을 주기 위함이었을 뿐 아니라, 힘든 시기를 혼자 보내기보다는 함께 모여 보내는 것이 좋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보내는 명절이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더 큰 우울감을 주기도 한다. 남들이 즐겁게 보내는 모습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바라보면서 자신과 비교하게 되는 일은 소셜미디어 시대가 가져온 불가피한 단점이지만 크리스마스, 연말연시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해질 수 있다.

오터레터에서 '슐츠가 말하는 슐츠' 시리즈를 통해 소개한 것처럼 만화가 찰스 슐츠는 당대 최고 인기 만화가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우울증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은 우울증(depression) 보다는 불안(anxiety)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주인공이 우울증을 토로하는 그의 만화는 이런 증상을 겪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뿐 아니라, 아이들도 예외가 아님을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오터레터의 글을 읽은 지인이 "미국 정신의학협회 공식 페북에 올라와서 읽었는데 오토레터 글이 생각나서 보내드려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좋은 글을 보내주셨다.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 올해 한국에서 책을 출간하기도 한 나종호 교수로, 이분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아직 읽지 못하셨다면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드린다.)

미국 정신의학협회 공식 페북 계정

미국 정신의학협회 페이스북이 계정이 소개한 글은 지난 16일 콜라이더(Collider)에 게재된 글이다.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오터레터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서 아래에 번역, 소개한다.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와 피너츠 만화는 우울증을 어떻게 다뤘을까

"라이너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거 같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나는 행복하지 않아.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질 않아."–찰리 브라운,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 특집

위의 대사는 문화적 아이콘이 된 만화 '피너츠'의 1965년 크리스마스 특집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첫마디다. 크리스마스 특집, 그것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를 시작하는 방식치고는 상당히 특이하다. 보통은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캐릭터(가령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가 나오거나, 크리스마스가 오는 게 너무 신나고 흥분되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즐거움을 퍼뜨리는 캐릭터(가령 영화 '엘프'의 주인공 버디)가 나오지, 크리스마스 콘텐츠를 이렇게 정직하고 솔직하게 시작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걸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면 얘기가 다르다. 바로 찰스 M. 슐츠. 이 이름을 들으면 만화 '피너츠'의 라이너스, 스누피, 피그펜 같은 등장인물들이 떠오른다. 물론 찰리 브라운이라는 아이도 있다. '피너츠' 만화는 오랜 세월 동안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그 캐릭터들은 지금도 마케팅에서 보석 같은 존재다.  

그러나 '피너츠' 만화의 역사와 그 만화를 바탕으로 한 이런 특집(피너츠는 신문에 실린 만화였고, 몇 년에 한 번씩 TV 만화 특집이 나오곤 했다–옮긴이)을 들여다보면 강박신경증(obsessive-compulsiveness), 자기도취증(narcissism), 그리고 우울증(depression)처럼 어두운 면이 바닥에 깔려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깔려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만화를 만든 찰스 M. 슐츠 본인이 평생동안 뿌리 깊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슐츠를 괴롭혔을까

슐츠와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래에 들어서 비로소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한 정신건강 이슈인 우울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우울증을 슬픔(sadness)이나 비애감(melancholy)으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켜고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흔한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울증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행복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지만 이렇게 표현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내부에 존재하는 기쁨 없는 공허함(joyless void)을 표현해주지 못한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당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왜냐면 당신은 당신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란 당신이 별 볼 일 없는 존재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이 당신에 대해 가진 생각도 바뀐다는 것이다. 단순히 "안돼(No)"라는 답을 듣는 것에서부터 누군가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까지, 당신을 향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이런 불길을 키우는 연료가 되고, 용서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신은 우울증은 누구나 피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더 괴로운 것은 우울증과 당신과의 관계가 해롭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우울증을 떠나보내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들도 함께 사라질 것이 두려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슐츠를 괴롭힌 게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bullies)에 대한 깊은 분노를 붙들고 살았지만, 슐츠의 전기를 쓴 저자 데이비드 마이클리스에 따르면 슐츠의 어린 시절 친구들은 그가 그런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이 없다고 한다.

슐츠는 행복보다 우울함과 슬픔이 자신에게 더 많은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창의력의 원천을 망가뜨리게 될까 두려워 가족과 친구들의 자신에게 주는 칭찬과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밖으로 드러나는 대인관계에서만은 따뜻함과 친절함을 유지했다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의 우울증이 드러난 TV 만화들

슐츠의 내적 번민은 신문 만화나 TV 만화에 등장하곤 했다. 분명하게 전면에 드러나기도 했고, 때로는 미묘하게 감춰진 채 등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드러난 그의 번민으로 인해 피너츠의 캐릭터들은 더욱 유명해졌다. 특히 크리스마스와 추수감사절 특집 TV만화에서 정신건강에 관한 묘사가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루시가 찰리 브라운에게 풋볼을 차라고 끊임없이 권하는 걸 보자. 찰리 브라운은 루시가 마지막 순간에 공을 잡아챌 것을 안다. 루시는 항상 그렇게 찰리가 차기 직전에 공을 빼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찰리가 공차기를 시도하게 만든다. 가령 추수감사절 특집 '엄청난 펌킨이야, 찰리 브라운(It's the Great Pumpkin, Charlie Brown)'에 나오는 장면이 그렇다. 루시는 이번만큼은 공을 빼지 않겠다며 자신이 서명한 증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번에도 공을 빼고 찰리는 넘어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서명은 있지만 공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다.

이 내용에는 슐츠가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분개(혹은 억울함)가 들어있다. 슐츠는 그런 사람들이 변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변했다고 (그래서 과거의 행동을 반복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표범은 점무늬를 바꾸지 못한다'는 격언처럼 결국 과거의 아픈 상처를 다시 헤집을 것이었다. 찰리 브라운은 할로윈 때 사탕 대신 돌멩이가 든 봉지를 받고, '내 밸런타인이 되어줘, 찰리 브라운(Be My Valentine, Charlie Brown)'에서는 자신의 낮은 자아 존중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확인한다.  

이 유튜브 리스트에서 '내 밸런타인이 되어줘, 찰리 브라운' 에피소드를 연이어 볼 수 있다.

'찰리 브라운 추수감사절(A Charlie Brown Thanksgiving)'에서는 찰리 브라운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도 모든 아이들이 추수감사절을 망친 게 찰리 브라운의 탓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찰리 브라운을 루저(loser), 바보(blockhead), 멍청이(stupid)라고 부른다.

옮긴이 주: 한국 독자들에게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아이들은 찰리 브라운에게 별명을 붙여 놀리고 비난하지만, 그렇다고 왕따를 당하는 외톨이는 아니다. 그냥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데 그걸 친한 친구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아이에 가깝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 캐릭터와 진짜 패배자/루저 캐릭터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 서구의 스토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가장 우울한, 그러나 가장 희망적인

하지만 우울증을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는 특집은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로, 여기에는 우울증을 겪고, 우울증을 오해하고, 거기에 꼬리표를 붙이는 모습이 등장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찰리 브라운은 에피소드의 시작 부분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진단하는데, 그 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찰리 자신이 가졌던 생각이 틀린 게 아님을 확인해 준다.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찾지 못하고, 친구들은 자신을 보며 웃고, 자신이 손을 대는 일마다 망친다.

거기에 더해 슐츠는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 특집에서 사람들이 우울증을 어떻게 잘못 이해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라이너스는 "찰리 브라운.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크리스마스처럼 멋진 때를 문제로 만드는 유일한 애야"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우울증이 단순히 생각을 바꿈으로써 생기거나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슐츠의 지적이다.

루시는 자신이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었던 선물을 받지 못해 실망하는 게 우울증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시도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정신 상담 부스를 통해서 당시의) 전문가들이 우울증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준다. 루시의 상담 부스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고, 찰리 브라운의 증상에 이런저런 꼬리표(label, 병명)를 붙이려 하는데, 이는 당시 우울증이 그 자체로 독립된 정신건강의 문제로 취급되지 않을 만큼 우리가 아는 게 거의 없었음을 보여준다.

옮긴이 주: 아래 영상의 0:41 부분에서 시작되는 루시의 말은 "네가 무서워하는 게 뭐지 정확하게 알면 꼬리표(병명)를 붙일 수 있을 거야"이다. 그러고는 각종 공포증(phobia)를 줄줄이 늘어놓으며 찰리 브라운을 '진단'하려 한다.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 특집이 다른 특집보다 잘하는 것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슐츠가 가지고 있던 희망을 보여준 데 있다. 슐츠는 자신이 갖고 있던 기독교 신앙에서 힘을 얻는다. 라이너스는 (리허설 무대에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때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찰리 브라운이 드디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이해한다. 두 번째는 아주 미묘하게 묘사되는데, 라이너스가 자신의 안심 담요(security blanket)에서 잠시나마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손으로 만질 수 없어도 안심/안정을 얻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한다. 찰리 브라운이 가져온 이 나무를 두고 친구들은 화를 내고 놀리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 나무로 인해 아이들은 다시 하나가 되고, 아이들은 이 나무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로 바꿔놓는다. 불쌍하고, 한심하고, 우울증에 빠진 영혼도 아름다운 존재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기사는 여기까지다. 그런데 이런 우울증을 가진 캐릭터를 자세히 묘사한 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사람에 따라서는 아무런 느낌이나 감흥이 없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찰리 브라운의 기분이 정확히 묘사된 것 하나로 큰 위안을 받는다. 21세기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오해하는 세상에서 누군가 저런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것 하나가 주는 안도감은 아주 클 수 있다.

데보라 디클레멘티라는 여성이 쓴 글, "Charlie Brown’s Existential Crisis Saved My Life (찰리 브라운의 존재론적 위기가 내 삶을 구했다)"이 그런 예를 잘 설명한다. 미디어에서 오래 일하고 은퇴한 것으로 보이는 디클레멘티는 어린 시절 꽤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는데 여섯 살짜리 아이가 우울증을 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를 보게 되었단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다: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특집 프로그램–게다가 사운드트랙도 최고–이었을 뿐 아니라,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5분 만에 주인공 찰리 브라운이 "나는 우울해(I'm depressed)"라고 말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알아들었고, 찰리 브라운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도 정확하게 이해했다. 찰리 브라운이 그 말을 하는 순간 내게 찾아온 깨달음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동방박사 세 사람을 제치고 나를 아기 예수님에게 데려다줬어도 그만큼 놀랍지는 못했을 거다.
찰리 브라운은 행복하지 않은 아이였지만, 그 아이가 행복하지 않았던 건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잃어버렸거나 축구공에 코를 맞아서가 아니다. 그 아이는 삶과 삶이 수반하는 무작위한 운, 때로는 잔인하기도 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자기가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는 36분 동안 진행되는 존재론적 위기의 이야기로, 아이들의 연약함을 매 프레임마다 보여주는, 1965년을 기준으로는 달콤하리만큼 전복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디클레멘티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 상담치료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가 부모님이 충격을 받는 걸 보고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했고,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상담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를 지탱해준 건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는 찰리 브라운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나중에 찰스 슐츠와 연락을 몇 번 주고받기도 한 디클레멘티는 슐츠가 이 만화를 아이들을 위한 정신건강 선언문처럼 생각하고 만든 건 아니지만, 아이들은 슬플 리 없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많은 아이들에게 찰리 브라운 만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단다.

아이들은 (나처럼) 정신건강과 관련한 도움을 찰리 브라운 같은 만화에 의존해서는 안되지만, 만약 네다섯 살짜리 아이가 우울함에 빠져 홀로 괴로워하고 있다면 찰리 브라운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크나 큰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