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의 첫 편에서 마가렛 스캐터구드의 이야기를 잠깐 했었다. 저자 댄 바우크는 와이어드에 기고한 이 글(의 원문)을 스캐터구드의 이야기를 다시 짧게 꺼내며 끝맺는다. 하지만 그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2020년 2월에 나온 워싱턴포스트 기사를 먼저 간략하게나마 소개해 보려 한다.

이 기사는 마가렛 스캐터구드와 또 한 명의 여성이 살던 집이 어떻게 미국 중앙정보국(CIA) 본부 캠퍼스의 일부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기사다. (바우크의 글에서도 언급된다.)


CIA의 본부 건물은 버지니아주 랭리(Langley)에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강을 하나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위치에 있다. 1947년에 설립된 CIA는 본부를 이 위치에 만들기로 결정하고 이 지역의 땅을 매입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지어질 본부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집 하나가 있는데 주인들이 팔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그 집의 위치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안다. 아래 위성사진에서 움켜쥔 주먹처럼 보이는 곳이 CIA 본부이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점이 그 집이 있는 곳이다.

(이미지 출처: 구글 지도)

CIA가 확인해 보니 이 집의 주인은 두 명의 여성이었다. 71세의 플로렌스 소온(Florence Thorne), 57세의 마가렛 스캐터구드(Margaret Scattergood). 이들은 미국 정부가 그 집과 대지를 사되,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살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집은 CIA가 지으려던 본부 건물을 막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거대한 캠퍼스 남쪽 끝에 포함된 것이었기에 CIA는 두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소온과 스캐터구드가 살던 집은 지금도 철거하지 않고 CIA가 사용한다. (이미지 출처: Wikimedia)

그런데 소온과 스캐터구드는 어떤 사람들이었길래 이곳에서 함께 살았을까? 본부를 드나들던 CIA 직원들 사이에는 "자매들(Sisters)"로 통했고, 둘은 서로를 친구라고 소개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이 연인관계였을 거라 짐작했지만,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194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소온(1877년생)은 가장이었고, 스캐터구드(1894년생)는 소온의 파트너였다. 두 사람 모두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던 시절에 대학 교육을 받았고, 스캐터구드는 독실한 퀘이커(Quaker) 신자, 소온은 침례교 신자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플로렌스 소온과 마가렛 스캐터구드 (이미지 출처: We Are The People For The People)

이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일 때문이다. 스캐터구드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로 건너가 자원봉사를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와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소개로 워싱턴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소온을 소개받게 된다. 스캐터구드의 친구는 "소온은 아주 작고 가냘픈 여성이지만, 남자 세 명의 일을 하고 있다"라며 아마 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거라고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 일을 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1933년, 함께 살 집을 찾다가 이 집을 발견하고 구입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미국 전역에 있는 노동조합을 위해서 기업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했다. 실업률을 살펴보고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기 전에 기업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파업에 버틸 수 있는지, 굴복할 것인지–를 파악해서 노조에 제공하는,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노조를 위한 CIA"였다. 당시 미국 사회, 특히 CIA 같은 기관에서는 수상쩍게 여길 만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급상승하던 미국 사회에서 노조를 돕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CIA는 두 여성이 스파이가 아닌지 뒷조사를 했지만, 특별한 혐의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두 여성과 CIA는 같은 단지 내에서 어색한 동거를 시작했다.  

CIA 두 사람을 조사한 내용, "About The Ladies." 현재는 비밀이 해제되어 누구나 볼 수 있다. (출처: CIA 웹사이트

소온은 1975년에 95세의 나이로, 스캐터구드는 1986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계약대로 건물은 CIA가 넘겨받아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경찰견을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하다가 창고로 전환되었고, 점점 낡아서 철거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된 주택을 좋아하는 한 CIA 직원의 강력한 반대로 보존하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고, 지금은 '스캐터구드-소온 컨퍼런스 센터'라는 이름이 붙은 CIA의 회의 장소가 되었다.

자, 이제 댄 바우크의 글로 돌아가보자.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CIA와 두 여성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1940년 인구조사 기록을 찾아내어 이렇게 적었다. "그 두 사람이 로맨틱한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캐터구드에 관한 기록을 꼼꼼하게 보관하고 있는 집안 사람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별도의 침실을 사용했고, 친구 이상의 어떤 관계도 암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트너"라는 분류는 이 꼬리표가 붙은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을 알리지 않으려는 것이 애초에 그 표현을 사용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파트너"는 그저 조사원이 현장에서 적는 표현일 뿐, 이를 인구조사국에서 최종적으로 입력할 때는 다른 항목으로 사라지게 된다. Hd(Head), Wif(Wife), Chi(Child), Par(Parent), GrC(Grand Child), Lod(Lodger) 같은 분류에 동성의 파트너는 없다. 따라서 이들의 집을 방문한 인구조사원 리처드 그레이가 적은 "파트너"를 인구조사국에서 어떻게 바꿔서 넣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조사원들은 왜 스캐터구드 같은 사람을 굳이 파트너라고 적었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관계'라는 항목이 등장한 건 순전히 관료적인 이유 때문이다. 조사원들이 집을 방문하지 않고 데이터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관계 항목이 존재하는데, 인구조사라는 틀은 "정상적인 가정" 이외의 다른 형태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일치가 발생한다. 조사원들은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을 파트너라는 비공식적 표현으로 해결했고, 그 결과지를 받은 인구조사국 에디터들은 대개 Ld(Lodger, 세입자)로 바꿔서 입력해 버리곤 했다.

2020년의 미국 인구조사는 팬데믹 중에 행해졌다. (이미지 출처: Census Bureau)

관료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사회 구조를 고수하는 동시에 조사원들의 일탈 행위를 막으려는 과정에서 등장한 이 '파트너'라는 호칭은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정체성을 하나의 통에 쏟아 넣어 뒤섞는 과정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개인들의 이야기를 지워버렸다. 마가렛 스캐터구드는 파트너가 되어 무수한 사연들 속으로 사라졌고,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파트너라는 호칭은 19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식 관계명이 되었다.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이성 커플을 미국 인구조사가 비로소 인정한 게 그해였다. 하지만 동성관계는 공식적인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의 끈질긴 노력으로 그다음 번(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동성 커플도 파트너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2020년 인구조사에서 미국인들은 "이성(opposite-sex) 파트너"와 "동성(same-sex) 파트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할 길은 아직도 남았다. 가령 간성인(intersex)을 비롯한 논바이너리(nonbinary) 인구를 인정하지 않는 남녀 성별 구분은 여전히 남아있다. 인구조사는 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게 바뀌어야 한다. (미국 인구조사국은 이런 제안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고정관념을 계속 부수고 항목을 다양하게 해도 여전히 모든 경우를 포함하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파트너'와 같은 창의적인 타협안을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