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일보 '박상현의 디지털 읽기'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지난달 애플이 MP3 플레이어 아이팟(iPod)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을 때 “애플이 아직도 아이팟을 팔고 있었어?” 하며 놀란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애플은 그동안 아이팟 생산을 멈춘 적이 없다. 아이팟 기능이 내장된 아이폰(iPhone)을 선보인 2007년 이후에도 아이팟 판매는 계속됐다.

이번에 애플이 재고 소진 때까지만 아이팟을 판다고 발표하자 아이팟의 퇴장을 아쉬워하는 많은 사람이 매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단종되는 제품을 구매한다는 건 그만큼 이 기기가 깊은 팬덤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에는 아이팟 1세대 미개봉 상품이 2만9999달러(약 3745만원)에 올라왔다. 2001년 출시 당시 가격(399달러)의 75배나 된다.

하지만 그 어떤 팬도 애플만큼 아이팟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을 것이다. 아이팟이 음악을 듣는 방법을 바꿨다는 찬사가 쏟아지지만, 사실 아이팟이 바꾼 건 애플이었다. ‘아이폰이 세상을 바꿨다’고 하지만,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 수 있는 기업이 된 것은 아이팟 덕분이었다. “애플을 현재 기업 가치 세계 1위 기업으로 만들어준 많은 요인의 출발점을 선으로 연결하면 아이팟에서 만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아이팟은 어떻게 지금의 애플을 탄생시켰을까?

이를 알려면 아이팟이 처음 나온 2001년으로 거슬러 가봐야 한다. 컴퓨터 메이커로서 애플은 1990년대 내내 마이크로소프트의 PC에 밀려 틈새시장을 노리는 ‘영원한 2인자’ 취급을 받았다. 애플 비즈니스 모델의 특성상 이를 뒤집기는 불가능했고, 무엇보다 개인용 컴퓨터 시장이 포화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돌파구는 자기들이 이미 잘하는 부문에서 나온다. 가령 시장 포화를 내다본 우버가 ‘우버 이츠’로 음식 배달 시장에 뛰어든 게 그렇다(현재 우버이츠의 매출은 우버 라이드 매출을 추월했다).

물론 업계에서 컴퓨터 대신에 들고 다닐 수 있는(hand-held) 기기가 다음 번 시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업계의 리더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만큼 절실하지 않았고, 애플은 1993년에 ‘뉴턴’이라는 개인 정보 단말기(PDA)를 선보였다가 냉담한 시장 반응 때문에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퇴출시킨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가 MP3 플레이어를 애플의 차세대 휴대용 기기로 고른 건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안전한 선택에 가까웠다.

19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당시 MP3 기기가 얼마나 흔했는지 잘 안다. 애플은 그런 기기가 “크고 불편하거나, 작고 쓸모없는” 것으로 가득하다고 판단하고,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무조건 작다고 좋은 게 아니라 손에 든 채 조작이 편리해야 했고, 그렇게 크기와 모양이 결정된 후에는 내부에 최대한의 용량과 기능을 집어넣어야 했다. 일설에 따르면 잡스는 만들어진 시제품을 엔지니어들이 보는 앞에서 물에 빠뜨려놓고 공기 방울이 올라오는 걸 가리키며 왜 저만큼 빈 공간이 있느냐고 지적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 끝에 탄생한 1세대 아이팟은 클릭휠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UI(User Interface·사용자가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해주는 환경이나 장치)로 대중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때까지 MP3 플레이어는 곡(曲) 찾기가 고문에 가까웠는데, 클릭휠이 이 과정을 직관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데스크톱과 노트북 컴퓨터에 주력하던 애플은 아이팟을 만드는 과정에서 휴대용 기기를 디자인하고 개발하는 방법론을 습득하게 된다. ‘기기를 조작하는 방법=누르는 버튼’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표면을 문지르듯 만지고 누른다는 새로운 발상은 훗날 애플의 휴대 기기를 특징짓는 창의적 UI, 물리적 조작법의 계보를 타고 흐른다. 애플 매출의 1위를 차지하는 아이폰이 그 대표적 수혜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기기 바깥에서 일어났다. 섬세한 설계와 고품질을 자랑하는 애플 기기는 예나 지금이나 가격 경쟁에서 불리하다. 따라서 애플은 소비자를 자기네 생태계로 이끌어주는 저가 기기가 필요했고, 그런 기기를 통해 (제품이 아닌) 서비스를 파는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했다. 전자가 아이팟이었다면, 후자는 그런 아이팟을 지원하는 아이튠스(iTunes)라는 플랫폼이었다. 애플은 ‘아이팟+아이튠스’ 콤비를 통해 단번에 음악 판매 1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저렴한 기기를 통한 콘텐츠 판매’라는 비즈니스 모델은 훗날 아마존이 e북 리더인 킨들을 통해서도 따라 했을 만큼 뛰어난 전략이었고, 기기 제조와 판매에 주력하던 애플이 매출원을 다각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애플의 콘텐츠와 서비스 판매가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꾸준히 높아져서 작년 4분기에는 22%에 달했다.

그렇다고 해서 2001년에 아이팟이 나오자마자 히트 상품이 된 건 아니다. 400달러에 이르는 MP3 기기는 여전히 비쌌고 판매는 그저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한 건 2004년 아이팟 미니, 2005년 아이팟 나노가 나왔을 때였고, 무엇보다 (잡스가 끝까지 망설였던) 윈도용 아이튠스 출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이팟 출시는 천재의 한 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불확실성 속에서 다양한 시도를 한 결과였다.

따라서 아이팟은 그 자체로 혁명적 제품이었다기보다는 애플로 하여금 새로운 영역에 진입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 혁신의 프로세스를 갖추게 해준 제품이다. 애플은 아이팟으로 월척을 하나 낚았다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