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간으로 오늘(6월 9일)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 탄생 350주년 기념일이었다. 알다시피 표트르는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러시아 차르국(루스 차르)을 서구화한 인물로 러시아가 자랑하는 국가적 위인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아무리 전쟁, 아니 특별군사작전으로 정신이 없다고 해도 이를 성대하게 기념하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자 뉴욕타임즈는 푸틴이 자신의 이미지를 표트르 대제 비슷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기사를 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표트르 1세 관련 전시회에 참석한 푸틴은 젊은 러시아 기업가들과의 타운홀 미팅을 하면서 표트르 1세가 발트 해안을 점령하고 스웨덴과 전쟁을 벌인 것을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싸우고 있는 것에 비유했다는 거다. 푸틴은 표트르 1세가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초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유럽의 어떤 나라도 그곳을 러시아의 영토로 취급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현재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토로 취급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암시를 했다고 한다.

강한 러시아의 환상

푸틴은 바로 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에 했던 연설에서도 잘 알 수 있지만, 그는 "위대한 러시아"의 영광을 되찾는 것이 자신의 목표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러시아인들이 그걸 믿거나 거기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푸틴이 권력을 잡기 전 러시아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안다면 러시아 국민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푸틴을 지지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푸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의 유지이고, 민족주의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푸틴이 과연 기독교(러시아 정교회) 신자이냐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적어도 국민들의 눈에 훌륭한 신자로 보일 만한 시그널을 보인다. 그가 특별히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정교회는 많은 러시안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푸틴에게도 중요하다.

그 이유는 신화 만들기다. 우리는 북한을 통해서, 아니 한국의 독재자(때로는 민주주의 지도자)와 그들의 지지자들이 신화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익히 봤기 때문에 푸틴의 신화 만들기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독재자들은 항상 자신의 능력을 초인적인 수준으로 부풀리는 동시에,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외국의 앞잡이로 묘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핍박 아래 놓여있다"는 위기의식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조와 외세의 위협에 대한 강조는 언뜻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후자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실패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있는 편리한 도구가 된다. 그동안 '강한 러시아'를 강조해온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이 실패(라고 단정하기는 이르다)하더라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번 전쟁이 푸틴이 강조해온 '강한 러시아' 이미지에 큰 흠집을 낸 건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뉴욕타임즈의 기사에 따르면 푸틴의 표트르 1세 흉내내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존재한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유럽으로 편입시킨 나라인데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의 "유럽으로 향한 창문"을 완전히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당분간 러시아와 경제, 문화적 교류를 하려는 서구 국가는 찾기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푸틴의 표트르 1세 흉내내기는 유효할까?

벌거벗은 임금님

어크로스 출판사에서 최근에 번역, 출간한 그래픽 논픽션 '푸틴의 러시아: 러시아의 굴곡진 현대사와 독재자의 탄생(Putin's Russia: The Rise of a Dictator)'은 푸틴이 꾸준히 만들어온 신화를 깨는 책이다. 푸틴은 때로는 테러를 조작하고, 때로는 테러를 진압하면서 러시아의 수호자를 자처해왔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인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모른 척하거나 적극적으로 숨기면서 자신의 '능력 있는 지도자' 이미지를 지켜왔다.

가령 푸틴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하다가 일어난 쿠르스크 잠수함 침몰사건(2000년 8월)을 보면 지난 2월에 시작한 우크라이나 침공과 무척 닮았다. 장비는 낡고 문제가 많은데 강한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준비되지 않은 병사들을 여기저기에서 끌어와 훈련을 강행하다가 잠수함에 화재가 나서 침몰한 사건이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핵잠수함이 침몰한 사실은 서구 국가들도 알게 되었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푸틴은 러시아 잠수함의 (형편없는) 상황이 드러날까 봐 이를 거부했다.

구조할 능력이 없는 러시아 해군이 구조를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서구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이미 늦었고, 사고 이후 생존해서 구조를 기다리던 병사들은 모두 사망했다. 그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푸틴은 뭘 하고 있었을까? 아래의 두 페이지를 보면 한국인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살아날지 모른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시작해서 푸틴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에 관한 글을 오터레터에 꾸준히 게재하면서도 푸틴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글을 쓰지 못했던 것이 항상 아쉬웠다. 물론 각 글에서 푸틴의 과거 행적을 조금씩 소개하기는 했지만 단편적인 모습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푸틴의 전모를 보여주는 글을 쓰자니 책에 가까울 것이고, 그걸 정리할 만큼의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길게 정리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과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이 모든 아쉬움을 한 번에 떠맡아 해결해주는 책이 '푸틴의 러시아'다. 150페이지가 조금 넘는 정도의 길이에 무엇보다 그래픽 논픽션 형식이어서 전혀 지루함 없이 반나절을 투자해서 푸틴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그동안 오터레터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팔로우해온 독자들에게는 가장 손쉽고 완벽한 배경지식 참고서가 될 거라서 꼭 읽어보시기를 권하지만 (구매 링크 1, 2, 3) 어크로스에서 오터레터 독자 열 분께 책을 선물하시겠다고 제안하셨으니 혹시 당첨의 행운을 시험해보고 싶은 독자들은 댓글로 의사를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시간으로 일요일(6월 12일) 자정까지 댓글을 달아주신 독자분들 중에서 무작위 추첨을 하겠습니다.
주의 사항 1. 매체를 구독하실 때 잘 쓰지 않는 이메일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당첨 후 이메일로 알려드리면 확인을 못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추첨에 응해주실 때는 오터레터 가입 때 사용하신 이메일을 꼭 기억하셨다가 월요일에 확인해주세요. 주의 사항 2. 지난번 추첨의 경우에는 해외에 계신 독자분들께는 전자책으로 보내드리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 책은 아직 전자책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당첨되신 해외 독자들께서는 대신 받으실 한국 주소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