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미국의 지난 화요일 중간선거 때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있었던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과 전혀 무관한 미국의 정치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개하는 이유는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아니 그 사람을 당선시킨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이 가져온 작은 변화가 단순히 미국의 정치계에 주는 파급 효과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배경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독자들 중에 다른 나라의 국내 정치 얘기에 관심이 없는 분들이 계실 수 있으니 지루하지 않게 설명을 해보려 한다. 기대하셔도 좋다.

트럼프가 빼앗은 땅

펜실베이니아주는 좀 특이한 곳이다. 앤드류 카네기를 갑부로 만들어준 철강 산업으로 유명한 피츠버그와 미국의 독립 과정에서 구심점이었고 미국의 첫 번째 수도이기도 했던 필라델피아가 대표적인 도시다. 미국에서 이런 대도시는 대부분 진보적인 성향이고 민주당을 지지한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는 대도시가 아닌 다른 지역(애팔래치아 산맥이 관통하기 때문에 낮아도 산지가 대부분이다)도 민주당 지지가 일반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동부 해안지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바다를 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펜실베이니아의 민심이 민주당에서 돌아서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펜실베이니아가 석탄산지이고 수압파쇄법(fracking)을 사용해 추출하는 셰일 석유의 주요 생산지라는 사실이다. 민주당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화석 연료의 생산을 줄이고 재생 가능한 에너지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꿨는데 이게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사라져 가는 석탄 산업은 그렇다고 해도 셰일 석유까지 막으면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는 항의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서 펜실베이니아의 석탄 산업 노동자들을 공략했다. (이미지 출처: Vanity Fair)

이런 민심의 이동을 잘 이용한 사람이 트럼프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화석 연료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대학에 가지 않은 백인들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여기가 트럼프의 표밭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쉬운 싸움은 아니었지만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서 오래도록 민주당이 장악해온 펜실베이니아를 0.17% 표 차이로 빼앗았다. 그렇게 펜실베이니아는 트럼프의 대선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뿌리가 그렇게 쉽게 마르지는 않았고, 2020 대선 때는 바이든이 펜실베이니아를 재탈환하면서 대선 승리의 초석으로 삼았다. 이 주가 미국 전국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각 주마다 2명씩 배분되는 연방 상원의원은 좀 다른 얘기다. 펜실베이니아 사람들은 상원의원으로 공화당을 선택하는 일이 많았다.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대통령이나 하원의원의 경우는 당을 중심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지사와 연방 상원의원은 조금 달라서 인물을 중심으로 뽑는 경향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이 사실상 패했다고 진단하는데, 패인은 트럼프가 질 낮은 후보를 경선에서 승리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트럼프의 패배' 참고) 게다가 이번 중간선거는 다들 민주당이 패할 것으로 알고 있던 선거였다.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치솟았고, 바이든 대통령은 인기가 없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중간선거는 집권당의 패배가 사실상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거인의 등장

박빙의 승부처에서 인기 없는 집권당의 브랜드로, 그것도 은퇴하는 공화당 상원의원의 자리를 민주당이 찾아오는 건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전망을 바꿔 놓은 후보가 등장했다. 바로 존 페터먼(John Fetterman)이다.

페터먼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언급하는 건 2미터가 넘는 그의 키다. NBA 선수들이 모인 곳에 가지 않는다면 그는 그가 가는 모든 곳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다. 하지만 그를 사진에서 보면 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옷차림과 수염, 그리고 양팔에 커다랗게 새긴 타투(문신)다. 공장을 배경으로 찍은 (아마도 픽업트럭에 팔을 얹고 있는 듯한) 위의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민주당 상원후보라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페터먼은 "트럼프 지지자처럼 생겼다."

블루칼라 백인 남성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외모이지만 그의 정책은 민주당의 방향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었고, 일부 정책에서는 바이든 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펜실베이니아의 부지사(Lieutenant Governor)로 일했고, 그 전에는 피츠버그 외곽의 작은 도시인 브래덕(Braddock)의 시장을 10여 년 했다. 인구가 2천 명이 채 되지 않는 교외 지역 마을 수준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무보수 봉사에 가까운 일이었다. 페터먼은 그 외에도 다양한 시민 봉사단체 일을 하며 살았는데, 변변한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꽤 넉넉한 것으로 알려진 아버지로부터 생활비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배경 때문에 페터먼은 공화당 지지자들로부터 "자기가 일해서 돈을 벌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뉴욕타임즈는 페터먼의 경력에 대한 공격이 대체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부지사가 되어서야 먹고살만한 월급을 받게 된 건 사실이다.

그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캐주얼한 복장으로 선거 유세를 해서 유명해졌다. (이미지 출처: The Daily Wire)

페터먼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의 외모가 트럼프 지지층을 끌어가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긴 수염과 타투는 물론이고, 그가 양복 대신 입고 다니는 후드티와 헐렁한 반바지는 페터먼이 마치 공장이나 탄광에서 일하는 블루칼라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그는 그런 경력이 없다. 특히 그가 항상 입고 등장하는 후드티 브랜드인 카하트(Carhartt)는 미국에서 노동자들의 작업복으로 유명한데, 하버드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그걸 입고 다니면서 마치 블루칼라인 것처럼 유권자들을 속인다는 거다.

트럼프가 지지한 후보, 오즈

하지만 공화당의 비난과 상관없이 페터먼은 큰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옷차림이 제일 먼저 사람들의 눈을 끌었겠지만 그의 상식적이고 허심탄회한 화법은 펜실베이니아 유권자들이 싫어했던 "워싱턴의 정치인들"과는 달랐다. 그런데 사실 '워싱턴의 정치인과 다르다' '대중 소통력이 뛰어나다'는 건 트럼프의 브랜드다. 따라서 민주당의 페터먼 후보는 트럼프 브랜드의 공화당 후보가 노렸을 유권자 그룹을 선점한 셈이다. 그렇다면 공화당은 어떤 후보를 선택했을까?

공화당 주류, 즉 비 트럼프 그룹에서는 데이빗 매코믹(David McCormick)이라는 인물을 지지했다. 헤지펀드의 대표였던 매코믹은 2012년에 오바마를 상대한 공화당 대선 후보 밋 롬니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친기업적이고, 사회적인 이슈에서 온건 보수(한 때 민주당원이기도 했다)인 매코믹이 경선에 승리했다면 펜실베이니아는 본선에서 공화당 승리로 끝났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공화당 경선에서 승리한 인물은 메멧 오즈(Mehmet Oz)였다.

인기 프로그램 닥터 오즈 쇼 (이미지 출처: USA Today

앞선 글에서 언급했지만 오즈는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유명해진 의사로, 우리나라에는 '내 몸 사용설명서' 시리즈의 공저자로 알려져 있다. '오즈의 마법사 (The Wonderful Wizard of Oz)'에 나오는 이름과 같아서 예명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부모(Mustafa Öz, Suna Öz)가 터키 출신으로 터키식 이름일 뿐이다. 심장병 전문의로 1990년대에 심장 이식 수술에 성공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이런저런 기회로 방송에 출연해서 뛰어난 언변과 외모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방송 쪽 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프라 윈프리 쇼에 의학 전문가로 고정 출연하다가 오프라 윈프리가 운영하는 하포 프로덕션의 제안으로 자신만의 쇼를 시작한다. 그게 닥터 오즈 쇼(Dr. Oz Show). 트럼프가 정치에 뛰어들 수 있게 해 준 프로그램이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였던 것처럼 메멧 오즈는 이 쇼를 통해 대중적인 기반을 넓혔다.

문제는 그가 멀쩡한 의사이면서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이나 유사과학(pseudoscience), 신앙 치유(faith healing)를 퍼뜨렸다는 사실이다. "다이어트나 운동을 하지 않고도 살을 뺄 수 있다"라고 주장해서 연방거래위원회(FTC)의 조사를 받고 상원 청문회에 출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주류 과학, 의학에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태도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성향과 잘 맞았고, 오즈의 팬과 트럼프의 팬들 사이에는 꽤 큰 교집합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오즈가 트럼프와 정치적으로 가까워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16년 대선 출마 당시 오즈와 인터뷰를 하는 도널드 트럼프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er)

브랜딩, 브랜딩

민주당이 이번 중간 선거를 앞두고 존 페터먼을 내세워 상원 의석을 하나 빼앗을 생각을 (상원이 50:50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1석은 아주 중요하다)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당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단속해야 했는데 그 공석은 공화당 상원의원의 은퇴로 생긴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후보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벌어진 당내 경선에서 앞서 언급한 데이빗 매코믹과 트럼프가 미는 메멧 오즈가 대결했고, 트럼프 지지자들의 힘으로 오즈가 경선에 승리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민주당과 공화당의 후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뒤바뀐 느낌이다. 트럼프를 지지할 것 같은 블루칼라 노동자의 분위기를 내는 존 페터먼은 민주당의 후보로 나왔고, 부유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독특한 이름의 의사인 메멧 오즈는 공화당 후보, 그것도 트럼프 티켓을 타고 출마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선거는 미디어 선거다. 따라서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효과적인 브랜딩에 힘쓴다. 트럼프가 선거 때 리얼리티 쇼에서 매번 사용했던 자신의 캐치프레이즈 "넌 해고야!(You're fired!)"를 자주 사용했던 것처럼 메멧 오즈는 자신의 쇼의 타이틀 로고를 그대로 가져와 색만 바꿔서 사용했다. 단순하지만 더없이 효과적인 브랜딩이다.

그에 비해 페터먼의 선택은 훨씬 더 교묘하다. 아래가 그가 사용한 로고 디자인이다.

페터먼이라는 성도 흔하지 않지만, 대부분 빨간색과 파란색을 주요 색상으로 사용하는 미국 정치판에서 검은색을 사용하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굵은 선으로 박스를 만들어 이름을 둘러싼 형태가 눈길을 끈다. 왜 이런 디자인을 사용했을까?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미국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트럭이나 공구 등의 브랜드가 이렇게 볼드한 박스 디자인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페터먼은 트럼프가 빼앗아간 블루칼라 백인들의 표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브랜딩을 한 것이고, 오즈는 자신의 미디어 인지도를 십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두 후보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달아오르던 시점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내일 발행되는 '페터먼 vs. 오즈 ② 인식의 변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