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요르겐 리스너(Jorgen Lissner)가 1981년에 쓴 글을 번역한 것이다. 제목은 '고통을 파는 사람들(Merchants of Misery)'이고,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고통을 파는 사람들

1981년 6월 1일

제3세계 (구호) 단체들이 하는 광고는 이 단체들의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을 모금하고, 대중에게 단체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개발 이슈와 관련한 정보를 전달하도록 설계된다. 이런 목표들은 서로 충돌할 수 있다. 빈곤의 원인을 설명해서는 큰 돈을 모금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해서 지갑을 열게 하는 광고는 저개발 국가들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 글쓴이 요르겐 리스너는 현재의 정책과 미래의 대안을 살펴본다.

편의상 그들을 단순하게 '광고주(the advertisers)'라 부르기로 하자. 큰 집단은 아니지만 이 소수의 사람들은 제3세계의 현실이 서구의 대중들에게 인식되는 방식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북미에 있는 수천 개의 자원봉사 구호단체들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다. 이 단체들의 홍보와 모금 운동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게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중 일부는 전문적인 광고회사의 직원들이고, 일부는 봉사단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홍보(PR)와 기금 모금 담당자들이다.

이 광고주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상당한 열정을 갖고 효율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왔다.

이들은 거의 언제나 굶주린 아이에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음으로써 성공률을 높인다. 그 결과 우리는 TV 화면과 신문 1면, 옥외 광고판, 포스터 등에서 튀어나온 배와 초점 없는 눈을 가진, 바짝 마른 아이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때로는 체념한 아버지, 애통해하는 어머니, 그리고 슬픈 표정의 십 대도 함께 등장하지만 굶주린 아이의 이미지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모금 운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광고주들 사이에서 조용한 반란의 조짐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굶주린 아이의 이미지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혹한 현실에 눈을 뜨게 도와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모금의 '수익성' 차원에서 굶주린 아이만큼 효과적인 이미지는 없으며, 이런 단체들에 기금을 가져다주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접근법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광고주들은 여전히 많다. 하지만 비록 소수라도 이 접근법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이런 방법이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역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굶주리는 아이들의 사진은 비윤리적인 이유는 첫째, 이런 이미지가 위험할 정도로 포르노그래피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포르노그래피를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그 사람에 대한 아무런 존중이나 존경 없이 발가벗겨 내보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기아부종(飢餓浮腫)으로 배가 불룩하게 나온 아이들을 광고 사진으로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 포르노그래피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고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간의 삶에서 섹슈얼리티만큼이나 아주 개인적이고 섬세한 것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공개하는 것은 한 인간의 신체와 고통, 슬픔, 그리고 공포를 무분별하게 낱낱이 확대해서 전시하는 행동이다.

이런 종류의 사회적 포르노그래피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다른 인종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에는 흔하지만 국내 문제와 관련해서는 사실상 전혀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나는 서구 국가에서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모금 광고나 포스터가 이런 포르노 형태로 제작되었던 사례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런 놀라운 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국의 아동 복지 단체인 닥터 바나도스(Dr Barnado's)의 광고가 무심결에 밝힌 바 있다. 이 광고에서는 세살 짜리 영국 소녀의 슬픈 사연이 등장한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제3세계 아이들의 불우한 사연과 별로 다를 게 없었지만 이 광고에는 소녀의 사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작은 여자아이의 흑백 실루엣만 보이고 "이 아이들의 신원은 절대 공개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걸 보면 아마 "왜?"라는 의문이 들 거다. 그럼 왜 제3세계 아이들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 걸까?

굶주리는 아이의 이미지가 비윤리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물질적 풍요가 삶의 질에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신화를 존속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광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우리는 매우 운이 좋다...그러니 운이 좋지 않은 저 불쌍한 사람들에게 돈을 좀 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무너진 가정, 공해, 범죄, 마약, 외로움 등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편리하게 숨겨지고, "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가진 독창성이나 문화적 정체성, 긴밀한 가족 관계, 관대함, 손님에 대한 환대 같은 장점과 풍부함도 감춰진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한번 어쩔 수 없이 서구 문명과 서구적 가치가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984년 영국의 구호 단체가 기금 모금을 위해 만든 광고 (출처: NPR)

그런 광고주들이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은 관광용 브로셔를 만드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두 경우 모두 현실을 왜곡하는데, 그 이유는 두 작업 모두 주된 목적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도에는 깨끗한 해변과 숨 막히게 아름다운 스키 리조트가 있고, 자메이카와 발리에 있는 호텔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게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소말리아의 난민 수용소에는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쑥 나온 아이들이 있고, 굶어 죽게 된 사람들이 쥐가 들끓는 곳에서 음식을 구하는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광고주들–이 현실의 특정한 부분을 일방적인 관점으로 선택해서 자신이 보는 광고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기회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게 모금된 돈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파생될 정치적인 부작용이나 그런 이미지가 청중의 심리와 태도, 정치적 감정, 행동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거의, 혹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의도가 좋았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굶주리는 아이들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데 반기를 들기 시작한 광고주들은 다양한 대안들을 시도했다. 어떤 이들은 제3세계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자원의 한계 내에서 영리하게 행동하는, 근면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이미지와 슬로건을 사용했다. 고소득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처럼 행동하거나 인류를 구원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손을 좀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영국의 크리스천 에이드(Christian Aid) 같은 단체가 평범하고 감상적이지 않은 언어를 사용한 것에도 같은 접근법이 보인다. "이 사람들은 거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하수를 찾을 드릴이 필요하고, 씨앗과 쟁기와 밭일을 도울 소가 필요하고, 교사와 생명을 살릴 의사가 필요하며,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도록 기술 훈련이 필요한 겁니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어떤 광고주들은 사람들이 연대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동기를 부여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상황을 바꿨다. 덴마크의 단처치에이드(DanChurchAid)는 1978년 사순절(Lent)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덴마크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을 담은 포스터를 네 개 만들었다. 포스터에 등장한 한 노부부는 "저희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죠"라고 했고, 한 농부는 "좋은 수확을 거둔다는 게 어떤 건지 알기 때문에" 참여했다고 말했고, 한 가정주부는 "제 아이들은 건강하고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십 대 학생들은 "누구나 인생을 잘 시작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참여했다고 했다.  

특정 인물을 끌어내는 대신 원칙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림을–그중에는 상징적인 것들도 종종 있다–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쪽을 선택한 광고주들도 있었다. 스웨덴의 단체인 루터헬펜(Lutherhjälpen)은 1977년 사순절 모금 운동 때 서로 다른 인종의 아이들 세 명이 지구의 모양을 한 커다란 밥솥 옆에 숟가락을 들고 앉아 있는 그림을 로고로 선택했다. 그 밑에는 "지구의 자원은 우리가 함께 나눌 때에만 충분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영국의 단체 '결핍과의 전쟁(War on Want)'은 1975년부터 영국 내에서 가장 흔한 편견과 오해 12가지를 지적하는 만화처럼 생긴 포스터를 배포해왔다.

글쓴이가 언급한 루터헬펜의 1977년 로고가 이것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svenskakyrkan.se)

이런 사례들이 혁명적이라고 하기는 힘들고 (원문에는 "hardy revolutionary"라고 적혀있지만 "hardly revolutionary"의 오타로 보인다–옮긴이) 뉴인터내셔널리스트(The New Internationalist, 이 글이 실린 잡지–옮긴이)의 독자들은 이런 변화가 굶주리는 아이들의 이미지들보다 조금 나은 수준 정도라고 느낄 것이다. 필자도 그런 조급한 마음에 공감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사람을 모멸하는 대신 그들에 대한 존엄과 존중의 태도를 보여주는 광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출발이다. 나는 세상이 완벽하지 않다고 욕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많은 광고주들이 단순히 고통을 파는 상인이 되는 데서 벗어나 진정으로 연대(solidarity)를 파는 세일즈맨이 되려는 용기를 보여줬다는 사실이 반갑다.

나는 이러한 프로세스가 지속되고 모멘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이들 구호 단체들이 단결해서 광고 분야에서 전문적인 성과 표준을 만들고, 업계가 그 표준을 따르게 하도록 설득할 것을 제안한다. 의료계, 법조계 등 다른 단체들은 제3세계가 상당수 참여하는 '감시 위원회'를 만들어 단체 내에서 윤리기준을 따르는지 감시하고 있다. 광고주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런 기구의 목적은 엄격한 통제나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게 아니라 업계가 스스로 원칙을 지키고 이런 문제에 관한 내부 논의가 꾸준히 이어지게 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