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일보 '박상현의 디지털 읽기'에 게재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지난 2월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은 국제 정세를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미국과 유럽의 긴밀한 발맞추기다. 한동안 그 필요성을 의심받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존재의 의미를 회원국들이 새롭게 확인하면서 단결하고 있다. 유럽은 유럽연합(EU)과 NATO에 맡기고, 중국과의 경쟁에 집중하려던 바이든 행정부는 유럽이 여전히 중요한 파트너임을 깨닫고 관계를 새롭게 다지기 시작했다. 최근 EU가 중국을 위협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미국이 오래도록 기다리던 반가운 변화다.

그런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만큼 눈에 띄지는 않아도 최근 미국과 유럽이 물밑으로 조용하게 협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빅테크 규제 노력이다.

EU는 지난달 ‘디지털시장법(DMA)’을 도입하기로 합의하면서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이 법의 핵심은 아마존과 애플, 구글, 메타와 같은 대형 디지털 기업들이 자사 플랫폼을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관행을 없애고 독과점의 폐해를 끝내는 데 있다. 기업 규모가 일정 수준(시가총액 101조원) 이상인 기업들은 ‘게이트키퍼(gatekeeper·문지기)’로 지정해 따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페이스북 메신저나 애플 앱스토어의 폐쇄적 운영, 그리고 아마존, 구글의 자사 서비스 우대 조치 등이 도마에 오르게 된다.

이런 법의 적용은 유럽 시장에 국한된 것이지만, 디지털 시장의 특성상 빅테크 기업이 유럽에서 완전 철수하지 않는 한 이 법의 기준을 전 세계 시장에도 적용해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 본토의 사용자들이 EU 법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는 셈이다. 원래 미국은 자국의 기업이 해외에서 강력한 규제나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이런 일이 있을 경우 정부가 나서서 보복을 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이번 디지털시장법 합의에 대해 미국 정부는 별다른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왜일까?

여기에는 미국의 국내 사정이 있다. 지난 20년 가까이 특별한 규제 없이 실리콘밸리 테크기업을 육성해온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 독점의 폐해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규제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아마존의 반독점 패러독스’라는 논문으로 빅테크 규제의 기치를 세웠던 리나 칸을 독점 여부 심사를 하는 연방거래위원회(FTC) 의장으로 세운 것이 이런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미국이 사용하려는 방법은 독점기업의 분할이라는 아주 크고 무거운 칼이고,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준비와 절차가 필요하다. 실제로 적용되는 데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장악한 테크 생태계에서는 당장 새로운 혁신 기업의 등장이 제한받고 있다는 불만이 많다. 게다가 FTC는 진보적인 의장 혼자 결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칸이 반대하던 아마존의 MGM 스튜디오 인수 빅딜이 통과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EU가 빅테크를 규제하는 칼을 꺼내든 것이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연방거래위원회(FTC) 건물

그런데 EU는 같은 문제를 미국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EU 집행위원회에서 공정 경쟁을 총지휘하는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는 기업의 분할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그보다는 당장 기업들이 돈을 버는 시장에서 경쟁을 회복하는 방법에 집중한다. 이런 노력의 최종 목표는 기업 분할이 아니라 경쟁의 회복이어야 한다는 것이 베스타게르의 주장이다. 그는 또한 해결책을 마련한 후에는 실제로 작동하는지 지켜봐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속도’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천천히 큰 칼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과는 다른 방법이다.

이처럼 접근 방법이 서로 다른 이유는 미국과 유럽의 사회 문화와 제도적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는다. 미국은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부터 거대 기업을 쪼개는 일을 해왔고, 이를 위한 법과 제도적 근거가 잘 마련되어 있지만, 기업의 활동을 세밀하게 규제하는 것에 대해선 문화적 거부감이 존재한다.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방임에 가까운 자유를 기업에 부여한다. 반면 유럽은 세계적인 초거대 기업에 익숙하지 않고, 유럽인들은 기업을 분할한다는 아이디어를 낯설게 생각한다. 즉 EU의 법안은 유럽적인 해결책인 셈이다.

1989년생인 칸과 1968년생인 베스타게르는 자신들이 서로 다른 세대에 속해있음을 종종 이야기한다. 

미국에는 말 못 할 사정도 있다. 미국에서 빅테크 규제를 주도하는 기관인 FTC는 120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으로 거대 공룡의 세상이 된 미국의 기업 환경에서 쏟아지는 이슈를 처리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EU가 신속한 입법을 통해, 미국 정부가 사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빅테크를 규제하려고 하니, 미국 입장에선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해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지난해 말 FTC의 리나 칸과 EU의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가 만나 테크 산업의 독점 규제를 함께 추진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 합의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EU의 이번 DMA법안 합의에 대해 미국 정부가 항의하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EU는 왜 이 문제를 주도하고 있을까? 유럽에는 미국이 자랑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빅테크 때문에 생기는 폐해도 있지만 돈이라도 벌고 있는데, 유럽의 경우는 오로지 시장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시장 경쟁을 회복해 자기 지역에서 새로운 기업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유럽인들의 이해(利害)와, 빅테크를 규제하려고 하지만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해하는 미국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연방거래위원회(FTC) 건물 양쪽에는 'Man Controlling Trade'라는 흥미로운 조각이 건물 양쪽에 설치되어 있다. 힘있고 도움이 되는 말이라도 사람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우화(alleg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