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여행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카페에 놔둔 폰, 지갑, 노트북 컴퓨터가 도둑맞지 않고 안전하게 주인을 기다린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공공장소가 안전한 나라 중 하나다. 물론 "한국에서도 자전거는 도난이 잦다"거나 "여성들은 아직도 밤길이 무섭다"는 반론도 많지만,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 중에서도 여성이 밤에 혼자 길거리를 다닐 수 있는 사회는 많지 않다. 위험한 사회들은 원래 위험했을까, 아니면 과거에는 안전했다가 위험해졌을까?

사회마다 다른 역사를 거치며 지금의 상황에 도달했을 것이니 그 질문에는 하나의 답이 존재하지 않을 거다. 과거에는 안전했다가 위험해진 도시도 있고, 위험했다가 범죄율이 떨어진 도시도 있다.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의 경우, 과거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로 부흥했다가 공장이 떠난 후 최악의 범죄도시라는 오명이 붙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다시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 미국 사회 전반으로 보면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가 범죄율이 높았던 시기(미국의 실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는 대개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이고, 그 이후로는 꾸준히 떨어진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미국에서도 엄마가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상점 밖에 세워두고 간단한 쇼핑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어떻게 가능했고, 지금은 왜 불가능할까?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무의미하지만 정확한 답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이 변하면 규범도 바뀐다. 1970년대만 해도 한국이나 미국이나 아이들을 "방목"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집에 던져두고 밖에 나가 놀았고, 부모는 아이들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저녁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서 집에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기대대로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1979년 어느 날, 뉴욕시에서 한 아이가 학교가 끝난 후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이의 실종은 미국 사회를 바꿨다. 요즘처럼 부모가 아이의 위치를 24시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해진 "현대 사회"는 1979년에 시작되었다.

실종된 아들 에이탄의 포스터 앞에 선 부모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사건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1979년 5월 25일 아침, 뉴욕시에 사는 에이탄 페이츠(Etan Patz)라는 6살 짜리 아이가 소호에 있던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학교 버스 정류장으로 혼자 걸어갔다가 실종된 것이다. 그 후로 아이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 어른 걸음으로 1, 2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그동안 엄마 줄리 페이츠(Julie Patz)와 함께 걷다가 처음으로 에이탄 혼자 버스를 타러 간 날 실종된 것이다. 엄마는 집에서 아이가 찻길(Wooster Street)을 무사히 건너는 것까지 확인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에이탄은 그날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다. 교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부모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아파서 안 왔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바로 부모에게 문자가 가겠지만, 그런 절차가 확립되기 전이었다) 줄리는 아이가 등교한 줄 알았다. 하지만 하교 시간이 되어도 에이탄이 귀가하지 않자 비로소 부모가 경찰에 신고했다.

에이탄의 부모가 집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모습. 살던 집에서 에이탄이 학교버스를 타러 갔던 길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Google Maps)

수십 년이 지나 확인된 바로는, 에이탄은 길을 건넌 직후 점심 때 마실 탄산음료를 사러 동네 구멍가게(뉴욕에서는 이런 작은 가게를 '보데가'라고 부른다)에 들렀는데, 그 가게에서는 18살짜리 페이드로 헤르난데즈(Pedro Hernandez)가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헤르난데즈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에이탄이 찾는 음료가 지하실에 있다고 말해 아이를 지하로 유인했고, 그곳에서 목을 졸라 살해했다. 헤르난데즈는 아이의 사체를 비닐백에 넣고, 이를 다시 상자에 넣어 거리에 있는 대형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장소는 뉴욕시에서도 지금은 고급 패션 매장들로 유명한 소호(SoHo)다. 이 사건의 의미를 잘 설명한 크라임리즈(Crime Reads)의 기사에 따르면 페이츠 가족은 지금은 거대한 애플 매장과 폴로랄프로렌 매장이 있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에이탄의 부모인 스탠리(Stanley)와 줄리 부부는 에이탄이 태어난 1972년에 건물 3층에 있는 넓은 로프트(loft, 건물 최상층)를 구입했다.

이때만 해도 소호는 지금처럼 고급스러운 지역이 아니었다. 원래 이곳에는 의류 공장, 인쇄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공장들이 1950~1970년대 사이에 점점 빠져나가면서 그 빈 자리에 예술가, 보헤미안들이 찾아왔다. 지금은 "힙지로"라 불리는 서울의 을지로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을지로는 원래 공구상, 인쇄소들이 모여있던 곳이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2015년 전후로 젊은 예술인들이 둥지를 틀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소호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와 그들의 가정도 있었다. 페이츠 가족도 그중 하나였다. 이들은 아직 거칠었던 소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동지 의식을 느끼며 함께 "생존했다"고 한다. 1970년대의 소호가 "거칠었다(gritty)"는 건 과장이 아니다. 당시만 해도 뉴욕시 전체가 위기였다. 지금은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몰리는 타임스퀘어도 당시만 해도 성인영화, 쇼가 넘쳐나는 "부적절한" 동네였고, 높은 범죄율을 해결하지 못해 뉴욕시에는 "Fear City(공포 도시)"라는 별명이 붙었다.

상황이 나아지기 전까지 "뉴욕시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는 게 상식이 되었던 시절에 소호에 찾아온 예술가들과 그곳에 정착한 가정들은 서로 의지하는 단단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그런 환경에서 사는 부모가 어떻게 6살짜리 아이를 혼자서 버스를 타러 가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때만 해도 그랬다"이다.

에이탄 페이츠와 비슷한 또래인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당시 내가 살던 중곡동에는 새로운 초등학교("용곡 국민학교")가 지어지고 있었는데 완공되려면 1년 넘게 남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다소 먼 중곡 초등학교에 다녀야 했다. 당시만 해도 학교 버스라는 건 없었고, 버스 안내양이 바깥에 매달려 가는 미어 터지는 출근시간 일반 버스를 타고 5, 6 정거장을 가야 했다. 지금 같아서는 7살짜리를 그런 버스에 혼자 태워 보낸다는 걸 이해하기 힘들지만, 내 어머니는 나를 예비 소집 때 한 번 데려가면서 가는 법을 알려주고는 혼자 다니게 했다.
물론 내 어머니가 좀 특이했던 거고, 다른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함께 버스를 탔다. 혼자 버스에 서 있는 나를 본 친구 엄마들은 "어머, 너 혼자 가는 거니?"하고 놀랬고, 자기 아이를 보고 "쟤 좀 봐라. 혼자서 씩씩하게 학교 가잖아. 너도 앞으로는 혼자서 좀 해봐"라는 잔소리가 예외 없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고, 나는 괜히 으쓱해졌다. 내가 처음 에이탄 페이츠의 이야기를 읽고 끌렸던 건, 그런 게 가능했던, 그리고 정상적이었던 시절을 살았기 때문이다.

에이탄의 실종은 전국을 흔든 뉴스가 되었다. "범죄율 높은 뉴욕"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었고 "엄마가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바로 코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고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2009년에 이 사건을 다룬 책 'After Etan(에이탄 이후)'을 쓴 저자 리사 코언(Lisa Cohen)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에이탄의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혼자 가게 했느냐'고 개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게 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모가 아기가 탄 유모차를 길거리에 세워두고 가게에 잠깐 들르는 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에이탄의 어머니 줄리는 당시에 다들 하는 것처럼 했을 뿐이다.


에이탄의 실종은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고, 경찰은 용의자들을 불러서 조사했지만, 사건은 20년이 넘게 미제로 남았다. 결국 2001년, 이 사건을 담당한 맨해튼의 판사가 에이탄이 사망한 것으로 선언하고 사건을 종료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에이탄의 부모는 아들을 애타게 찾았고, 실종된 아이들과 희생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에이탄의 실종과 부모의 호소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기사에 따르면 뉴욕은 "공포 도시에서 두터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으로" 바뀌었다. 유명한 "깨진 창문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 등장한 것도 이즈음(1982년)이다. 그리고 루돌프 줄리아니(Rudolph Giuliani)가 뉴욕 시장에 당선될 시점이면 뉴욕은 더 이상 위험한 도시가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에이탄의 실종이 그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도 다르지 않지만, 미국의 X세대 사람들은 "우리는 부모가 '방목'해서 키운 마지막 세대"라고 말한다. X세대가 1965~1980년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 그리고 1979년에 에이탄이 실종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니다. 1980년부터는 부모들의 사고와 행동 방식이 판이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일이 비슷한 시점에 한국에서도 있었다. 바로 1980년에 일어나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경우 희생자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납치 살해범은 희생자가 다니던 학교의 교사였지만, 한국에서 자란 X세대 중에서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에이탄 페이츠 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 사건 이후로 한국인 느끼는 사회의 '공기'는 분명히 달라졌다.

리사 코언의 책. 에이탄과 어머니 줄리의 모습 (이미지 출처: web.happystays.com)

2015년에 이 사건을 회고한 뉴욕타임즈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에이탄 페이츠가 남긴 유산은 어디에 있을까? 뉴욕 브루클린의 한 거리에서 "나는 좋은 엄마야, 나는 좋은 엄마야"라고 혼자 되뇌며 뛰어가는 여성의 빠른 걸음에 있다. 여성은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혼자 집으로 뛰어간 아이를 뒤쫓으며 자기가 왜 그걸 허락했는지 후회하고 있었다.

에이탄 페이츠가 남긴 유산은 어디에 있을까? 자기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항상 돌아보며 자란 여자아이의 기억 속에 있다. 이 아이는 자라서 엄마가 될 것이고, 자기 아이에게 누가 따라오는지 살피라고 주의를 줄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날 혼자서 학교에 가다가 실종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에이탄 페이츠가 남긴 유산은 어디에 있을까? 어린 시절 TV에서 에이탄 페이츠의 실종 뉴스 업데이트가 나올 때마다 방에 있던 식구들이 조용해졌던 걸 기억하는 아빠에게 있다. 이 사람은 "내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자기 뒤를 의식하며 자랐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는 어떤 변화를 불러왔을까? 크라임리즈의 글에 따르면 이런 사회적 불안감이 확산하면서 백인들이 도시를 떠나 교외지역(suburbs)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연방 정부가 그런 지역의 내집 마련 자금을 지원해 주고, 도시와 교외 지역을 잇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준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돈이 있는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면서 도시의 조세수입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도시의 예산이 줄어들면서 정치인들은 더욱더 긴축재정을 실시했고, 그 결과 쓰레기 수거부터 복지제도까지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들이 중단되었고, 이는 도시민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에이탄의 아버지 스탠리 페이츠는 전문 사진작가였다. 실종 아동 찾기 포스터 속 에이탄의 사진이 유독 눈에 띄게 잘 찍힌 이유는 스탠리가 평소에 아들의 스튜디오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포스터는 당시 뉴욕을 뒤덮다시피 했고, 실종 후 2년 동안 전국적으로 50만 장이 퍼졌다고 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에이탄의 얼굴을 모든 미국인이 기억하게 된 건 TV와 신문의 적극적인 보도와 포스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미국에서 우유 팩(milk carton) 뒤에 실종된 아이들의 얼굴을 인쇄하는 운동도 사실상 에이탄 페이츠로 인해 촉발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실종된 아이들의 얼굴은 대부분 백인이다.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의 미디어는 실종된 아이들, 범죄의 희생자들 중 백인을 부각했고, 이는 "백인은 피해자, 비백인은 범죄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우유 팩에 인쇄된 실종 아이들의 얼굴 (이미지 출처: 9News)

아이들의 안전 문제가 크게 부각되면서 범죄와 성인오락으로 가득했던 맨해튼과 타임스퀘어는 "디즈니화(Disneyfication)"를 거치면서 "가족친화적인" 관광지로 변모했고, 성인용품점 등의 가게들은 멀리 고속도로 주변으로 밀려났다. (비슷한 변화가 20세기 말 라스베거스에도 일어나서, 포르노와 성매매, 도박의 중심지처럼 여겨졌던 라스베거스는 각종 컨퍼런스와 가족 휴양지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범인 페이드로 헤르난데즈는 어떻게 체포되었을까? 2012년, 호세 로페즈(Jose Lopez)라는 남자가 경찰에 자신의 처남이 과거에 에이탄 페이츠를 살해했다고 털어놓는 걸 들었다고 제보했다. 그 처남이 헤르난데즈였고, 이 제보를 받은 경찰이 헤르난데즈의 주위 사람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1980년대에 같은 성당에 다니는 신자들에게 자기가 에이탄을 죽였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집안에서는 다들 알고 있지만 쉬쉬하는 비밀이었다. 체포된 후 헤르난데즈는 무죄를 주장했고, 2015년 재판에서는 배심원 한 명이 끝까지 버티며 재판이 무효가 되었고, 2017년에 새로운 재판이 열려 결국 유죄가 선고되어 현재 종신형을 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뉴욕도 변하고, 21세기에 들어와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범죄율도 떨어졌지만, 뉴욕시민은 물론 미국인들은 지금도 아이들을 밖에서 혼자 놀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2008년에는 레노어 스케나지(Lenore Skenazy)라는 여성이 자기의 9살 짜리 아들이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혼자서 백화점에 가서 놀게 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이에 분노한 스케나지는 아이들이 예전처럼 부모의 감시 없이 놀 수 있게 하자는 '방목 아이들(Free-Range Kids)' 운동을 시작했다. 에이탄 페이츠의 실종에서 비롯된 부모들의 공포가 오히려 아이들의 세상 탐구를 막고 있다는 사회적 반성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부 "특이한" 부모들에 국한되는 인식이고, 대다수의 부모들은 여전히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이 놀 친구들도 정해주는 플레이데이트(playdate)를 선호한다.

1980년대 미국에서 나온 E.T.(1982), 구니스(Goonies, 1985),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1986) 같은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어른들 몰래 세상을 탐구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건, 이미 끝난 과거에 대한 향수였을지 모른다. 미국에서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내고 서부 시대가 끝난 후부터 인디언과 카우보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서부극이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

영화 '스탠 바이 미'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Cinesp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