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를 찌른 가시 ④
• 댓글 1개 보기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로 유죄 평결을 받은 것은 카를로스에게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는 형 마리오에게 시카고 친구들에게는 자기가 삼촌이 살고 있는 스페인으로 이주했다고 말하라고 했다. 카를로스는 텍사스 아마릴로에 있는 주에서 가장 큰 교도소 중 하나에 수감되었다. 클레멘스 유닛(Clemens Unit)이라 불리는 이 시설은 끊임없이 들리는 소음과 사나운 교도관들로 악명이 높았고, 재소자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는 폭행 사건 때문에 카를로스는 처음에 겁을 먹었다. 시카고 교외 지역의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교도소 안에서는 친구를 조심해서 사귀어야 하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미국 교도소에서는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재소자가 다른 재소자들의 공격을 받는 일이 흔하다고 알려져 있다—옮긴이)
카를로스는 이 모든 일이 착오로 벌어졌기 때문에 사실만 밝히면 풀려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형은 카를로스의 변호사에게 사설탐정을 붙여주고 항소를 하게 했지만, 카를로스는 항소심에서도 패했다. '무죄 프로젝트(Innocent Project)'라는 비영리단체에 관한 글을 읽고 형을 통해 그 단체에 재판 속기록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지만, 그 단체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DNA가 발견되고 사용된 사건들만 지원한다며 속기록을 그에게 되돌려 보냈다.
한두 해가 지난 후 마리오 형과 형수가 시카고에서 그가 수용된 텍사스의 교도소를 찾아왔다.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는 걸 본 형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카를로스가 사회로 복귀할 가능성은 점점 사라져 갔다. 시카고에서 육류 도매상을 하면서 세 아들을 키우는 그의 형은 카를로스와 통화할 때마다 "포기하지 말라"며,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카를로스 수형생활을 시작한 지 5년이 된 199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카를로스에게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요청을 교도소가 거절한 것도 그의 절망을 더욱 깊게 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USA 투데이 신문과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읽었고, 매주 수요일 미사에 참석해 기도했다. 감방 침대에 누워 답이 없는 질문—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걸까?—을 던지며 잠 못 이루는 밤도 있었다.
카를로스는 교도소 내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처음에는 시설을 정비하는 일을 했고, 2006년부터는 교도소 내 법률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재소자들이 도서관에 들러 카를로스에게 질문을 하면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챙겨주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카를로스가 모범수였던 탓에 교도소는 그에게 구내에 있는 작업실에서 일하도록 허용했다. 그곳에서 그는 목공 일을 하며 벽시계, 장미 장식이 붙은 하트모양의 보석상자 따위를 만들었다.
카를로스는 남는 시간—하루 6, 7시간—에 목공예를 하며 자신의 슬픔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든 물건은 교도관이나 교도소 직원, 외부인에게 팔았다. 타고난 사업가였던 그는 교도소에서도 여전히 제품을 주문 받고, 재료를 주문하고, 일찍부터 늦은 시간까지 열심히 일하는 사업가로 살았다.
TV에서 가끔이나마 그가 응원하는 시카고 컵스의 게임을 중계할 때면 카를로스는 빼놓지 않고 봤다. 그는 교도소 친구들에게 "내가 죽기 전에 컵스가 우승하는 걸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자주 했다. 그의 바램은 2016년에 이뤄졌다.
카를로스는 교도소 내에서 종종 죽음을 목격했다. 그가 있던 교도소에서는 3층에서 머리를 밑으로 향하고 뛰어내려 자살하는 재소자들이 가끔 있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자신은 절대로 자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좋은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믿었고, 자기가 진공청소기를 팔던 시절, 대리점 직원들에게 강조하던 말, "끈질기면 성사된다(persistence over resistance)"를 되뇌었다.
에스텔라의 삶도 편안하지는 않았다. 카를로스의 재판에 참여했을 무렵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고혈압과 출혈성 궤양으로 병원 신세를 지곤 했고, 1994년에는 일하던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해고 당하기도 했다. 파트타임으로 방문 요양보호사를 하면서 남편과 중고 자동차를 사서 되파는 부업도 했고, 근처 모텔에서 중고 매트리스를 하나에 10달러에 사서 125달러에 되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텔라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들들이 있었다. 첫째 조니는 공군에서, 마이클은 육군에서, 데이비드는 국경 경비대에서 일했고, 막내 토미는 샌안토니오에서 집 짓는 일을 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때마다 에스텔라는 카를로스를 생각했다. 카를로스를 감옥으로 보낸 일은 에스텔라를 찌르는 작은 가시(espinita)였다. 에스텔라는 그 가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보통은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가끔 식구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에스텔라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던 손녀 트리샤 이바라는 "할머니가 그 일을 아주 가슴 아파하셨다"고 한다. 에스텔라가 대학에 가서 학사학위를 받고,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옆에서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이 이 손녀, 트리샤였다. "카를로스 이야기를 할 때면 할머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죠."
2017년 어느날, 에스텔라는 서랍을 정리하며 오래된 서류를 버리다가 27년 된 낡은 봉투를 발견한다. 열어 보니 법원에서 보낸 감사장이었다. 그는 남편에게 "내가 무고한 사람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고 받은 게 이거"라고 말했다. 그 해 에스텔라의 나이가 75세였다. 그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한 세대 동안 억누르고 살았다. 당시만 해도 그에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 에스텔라는 자기를 둘러싼 세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자기 아이들과 손자, 손녀가 당당한 시민으로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모습도 지켜봤다.
더 중요한 건 에스텔라 자신의 변화였다. 자기 생각을 더욱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성격으로 바뀐 것이다.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내 생각을 말하는 건 절대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도요." 에스텔라는 반대하는 사람들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옳은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이제 에스텔라는 그걸 하기로 했다.
에스텔라는 먼저 엘파소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자기가 1990년 사건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했는데, 그때 유죄평결을 받은 사람이 무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에스텔라의 전화를 받은 여성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뭘 해보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에스텔라는 다시 경찰서에 전화해서 다른 사람과 통화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사람에게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면서 자기가 기억하는 재판의 내용을 자세하게 들려줬다. 그걸 들은 직원은 그렇다면 엘파소 지방 검사인 하이메 에스파르자(Jaime Esparza)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에스텔라가 지방 검사의 사무실에 전화해서 같은 이야기를 다시 전부 들려줬더니, 이번에는 항소 부서의 책임자인 톰 다놀드(Tom Darnold)를 연결해 주었다.
지방 검사실은 평소에도 특이한 전화를 종종 받는다. 그중에는 자기가 평결에 참여한 재판에 회의가 들어서 연락하는 배심원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재판이 끝난 직후에 연락한다. 그런데 에스텔라는 20년이 넘은 재판으로 전화한 것이다. 에스텔라는 다놀드에게 그때 내린 평결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놀드는 에스텔라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에스텔라의 말 속에서 뭔가가 그로 하여금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에스텔라에게 자기가 그 문제를 살펴보겠다고 약속했다.
다놀드는 항소심의 결정 내용을 읽어봤지만,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상사인 에스파르자 검사에게 에스텔라 이야기를 했고, 에스파르자는 계속 파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놀드는 첫 재판의 기록을 읽으면서 당시 엘파소 검사실에서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동차의 색이 다르다는 것, 입고 있던 옷이 다르다는 것도 눈에 띄었고, 사건 당시 카를로스의 알리바이도 아주 탄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에스파르자 검사를 다시 찾아가 상의했고, 검사는 조사의 강도를 더욱 높이라고 했다.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더 깊이 파보자고 한 것이다. 에스파르자 검사는 부하인 로베르토 라모스(Roberto Ramos)를 불렀다. 라모스는 엘파소 검사실에서 해외로 도주한 범인들을 추적하는 일을 담당하는 검사로, 일이 끝나지 않으면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성실한 검사였다. 에스파르자는 라모스를 카를로스의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었는지 확인하는 비공식 책임자로 임명했다. 라모스는 증거를 포함해 사건을 모두 살피고,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검사실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는지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검찰의 수사가 원칙을 무시하고 진행되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검사실의 파일들은 대부분 오래전에 폐기된 상태였기 때문에 부하들에게 관련 자료를 샅샅이 수소문해서 찾으라고 했다. 그렇게 자료를 찾던 검사실 직원들은 2017년 8월 초에 연방수사국(FBI)에 연락했다가 큰 소득을 얻게 된다. 1989년과 1990년 사이에 FBI의 실험실과 엘파소 경찰서 사이에 오고 간 다섯 개의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편지의 수신인은 아동 성폭행 피해자인 마리아의 사건을 담당한 형사 릴리아 비어드 형사였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DNA 프로파일링을 할 수 있는 곳은 FBI 실험실을 포함해 몇 군데밖에 없었다. 이 기술이 사건 해결에 처음 사용된 건 그보다 한 해 전인 1988년 텍사스에서다. 그만큼 첨단기술이었던 거다. 그 편지들에 따르면 1989년 7월 12일 비어드 형사가 FBI 실험실 담당자에게 연락해 두 피해자의 옷과 거기에 남아있던 체모, (다른 사건의) 피해자 안드레아의 옷에 묻어 있던 정액 표본을 보내겠다고 했다. 엘파소 경찰은 카를로스가 두 아이를 모두 성폭행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의 혈액과 체모, 타액 샘플을 FBI 실험실로 보냈다.
그런데 FBI가 비어드 형사에게 보낸 편지들이 충격적이었다. 첫 번째 편지는 카를로스가 체포된 지 6개월이 지난 1990년 1월 9일에 보낸 것으로, 마리아의 옷에 남아있는 체모가 카를로스의 것과 "같지 않다"고 했고, 바로 다음 날 도착한 두 번째 편지는 안드레아의 옷에 묻은 정액도 카를로스의 것과 "같지 않다"라고 했던 것이다. 4개월 후—카를로스의 재판이 시작되기 7개월 전—FBI는 안드레아의 옷에서 발견된 범인의 DNA에 대한 분석 결과, 그 정액은 "이 인물(카를로스)에게서 나왔을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과들이 사용되었다면 카를로스는 DNA 검사를 통해 무죄가 입증된 첫 사례가 되었을 것이었다.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도 있었다. 검사는 물론이고, 카를로스의 변호사인 깁슨도 그 검사에 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방 검사실의 지나 롱고리아 검사는 1990년 1월에 DNA 검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재판일을 연기해달라는 요청 동의안을 제출했다. 롱고리아는 편지에서 깁슨 변호사에게 이미 DNA 샘플에 대해 알렸을 뿐 아니라, FBI 실험실에 전화해서 안드레아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도 나눴다.
모두가 FBI의 DNA 검사에 관해 알고 있었고, 그 결과에 따르면 카를로스가 성폭행범일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 편, '에스텔라를 찌른 가시 ⑤'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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