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를 찌른 가시 ②
• 댓글 1개 보기1980년대 텍사스주 엘파소의 경찰과 검찰은 범죄 행위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엘파소의 검사 스티브 시몬스(Steve Simmons)는 "우리는 범죄자들과 협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 당시 엘파소 주민들은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한 범죄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실제로 발생한 범죄도 있지만, 사람들의 공포가 만들어 낸 것들도 있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미디어와 근거 없는 소문으로 이런 공포가 많이 퍼지곤 했다—옮긴이)
가령 1986년, 엘파소 YMCA의 어린이집에서 일하던 여성 두 명이 아이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 그렇다. 아이들이 몬스터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죄목도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몬스터가 키가 3미터가 넘는다고도 했다. 아이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은 것이다. 두 명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재판 절차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유죄 확정까지 가지 못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검사들은 이들을 상대로 다시 소를 제기해 그중 한 명의 유죄 평결을 끌어냈지만, 결국 처벌은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십 대와 이십 대 여성의 시신 6구가 도시 북쪽에 있는 벌판에서 발견되면서 엘파소 주민들이 공포에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서른 살의 자동차 정비공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후에 엘파소 이스트 사이드에 '바바리맨'이 출몰해서 십 대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일이 발생했다. 아이들이 모인 곳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고 자위행위를 한 것이다.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했지만, 용의자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다. 1989년 4월 28일, 17살의 멜라니 니에토(Melanie Nieto)가 친구와 함께 등교하던 중, 녹색 캐딜락 차량이 다가와 그들 옆에 멈췄다. 차 문이 열리더니 바지를 발목까지 내린 남자가 "얘들아, 이리 와"하고 말했다. 그 직후 남자는 차를 몰고 달아났다.
그런데 니에토는 그날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에 그 남자를 다시 목격했다. 니에토가 경찰에 신고한 내용에 따르면 범인은 백인이거나 히스패닉이었고, 약 165cm의 작은 키에 체중은 60kg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얼굴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긴 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며, 때 묻은 회색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게 니에토의 진술이었다. 니에토는 경찰에게 "키가 아주 작은 남자였다"고 강조했다. 마침 함께 있다가 그 남자를 본 니에토의 남동생은 그 남자가 (니에토가 말한 것보다 더 작은) 더 작은 160cm라고 했다.
일주일 후, 니에토는 남자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똑같은 녹색 캐딜락 승용차를 탄 그 남자를 다시 보게 된다. 그들은 그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그리고 그 남자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차를 멈추고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주소를 확인했다.
2825 Chaswood Street이었다.
니에토가 신고한 사건을 수사하던 폴 블로트(Paul Blott) 형사가 쓴 보고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신고받은) 주소를 확인해 보니 카를로스 헤일레가 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이는 틀린 내용이었다. 카를로스는 그 집에서 이미 9년 전에 이사를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로트 형사는 개의치 않고 카를로스의 전과 기록을 찾아내어 과거에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카를로스는 수염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니에토가 묘사한 것과 전혀 다른 외모를 하고 있었다.
블로트 형사는 그런 불일치를 무시하고 카를로스의 사진을 수염을 기른 다른 히스패닉 남성들의 사진들 사이에 섞어서 니에토에게 보여줬고, 니에토는 그 사진 중에서 카를로스를 지목했다. 블로트 형사는 절차를 무시하고 니에토에게 카를로스의 이름까지 알려줬다.
그렇게 해서 카를로스는 자기가 일하던 사무실에서 과다노출 음란죄로 체포된 것이다.
카를로스는 아내 팸이 낸 보석금으로 잠시 풀려날 수 있었고, 이 모든 게 그저 착오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만 밝혀지면 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은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다.
그보다 2년 전, 마리아라는 8살짜리 여자아이가 베이비시터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집을 나와 길을 돌아다녔다. 혼자 있는 마리아를 발견한 한 남성이 차를 세우고는 스페인어로 자기가 "네 엄마의 차를 고치는 정비공"이라며 아이를 차에 태우고 벌판으로 끌고 가 성폭행했다. 이 끔찍한 범죄에 엘파소 경찰은 경악했다.
마리아는 성폭행범이 몰던 차가 베이지색 승용차(세단)였다고 했고, 경찰은 아이의 진술 내용을 바탕으로 용의자의 몽타주를 그려 현상수배 했다. 수사를 주도한 베니토 페레즈(Benito Perez) 형사는 엘파소에 있는 모든 경찰서에 이 전단을 보냈다. 아이 말에 따르면 범인은 히스패닉 남성으로 체구가 크고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범인은 정액이나 혈액, 침 등의 증거를 남기지 않았고, 경찰이 발견한 것은 몇 개의 체모가 전부였다.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마리아 성폭행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89년 6월 말, 카를로스가 체포된 후였다. 카를로스를 체포한 블로트 형사는 마리아 사건을 수사 중인 페레즈 형사에게 카를로스가 몽타주 속 인물과 무척 닮지 않았냐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페레즈는 구치소로 찾아가 카를로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주에 그가 적은 진술서에 따르면 블로트 형사는 카를로스를 "보는 즉시 소름이 돋았다. 몽타주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카를로스가 보석금을 내고 잠시 풀려난 날, 페레즈 형사는 블로트 형사에게 연락해 카를로스를 경찰 라인업에 세우자고 제안한다. 피해자인 마리아에게 범인을 지목하라고 하자는 것. 그러는 동안 블로트 형사는 용의자 사진들을 들고 바바리맨을 목격한 또 다른 피해자인 켈리 잭슨(Kelly Jackson)을 찾아갔다. 그 사건이 일어난 1988년에 당시 14살이었던 잭슨도 범인이 배가 나온 (아마도) 히스패닉계 남성으로, 녹색 캐딜락을 몰고 있었다고 했다. 약 일 년 만에 찾아온 경찰이 내민 사진들을 본 잭슨은 카를로스의 사진을 지목했다. 카를로스는 이번에도 우연에 의한 실수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블로트 형사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경찰의 단순한 실수라고 치부하던 카를로스의 생각이 바뀌게 된 건 경찰이 그를 다른 다섯 명의 히스패닉계 남자들과 함께 라인업에 세우면서였다. 그 자리에 있던 그의 변호사는 카를로스가 왜 경찰 라인업에 서게 되었는지 알려줬다. 어린 여자아이가 성폭행당한 사건의 용의자가 된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카를로스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건 후 2년이 지나 이제 열 살이 된 마리아는 카를로스를 지목했다.
마리아의 진술서에 따르면 "방에 들어가는 순간, 2년 전에 나를 폭행한 사람을 알아봤다"고 한다. 마리아는 이 말을 스페인어로 했고, 그 말을 릴리아 비어드(Lilia Beard) 형사가 영어로 번역해서 적은 것이다. 그런데 비어드 형사는 또 다른 아동 성폭행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1987년 7월, 5살 여아 안드레아가 납치, 성폭행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용의자도 녹색 차량을 타고 있었다. 비어드 형사는 그보다 5년 전 엘파소 경찰학교를 수석 졸업한 최초의 여성으로, 엘파소 경찰서에서 유명했다. 그는 아이들을 상대로 한 성범죄를 전담하고 있었고, 그의 수사를 지켜본 검사들은 릴리아 비어드가 "아주 강인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마리아가 카를로스를 지목한 후 15분 후에 니에토와 잭슨이 각각 들어왔고, 둘은 3분 간격으로 카를로스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수사선상에 있는 용의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담당 형사가 피해자, 목격자와 함께 방에 들어가는이런 방식의 경찰 라인업은 지금은 금지됐다. 잘못된 유죄 판결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가 목격자의 틀린 진술 때문이다. 텍사스 주의회는 2011년이 되어서야 경찰 라인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명문화했다. 의식, 무의식적으로 목격자가 특정 인물을 지목하도록 암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참가할 수 없다는 "블라인드(blind)" 룰이나, 목격자에게 하는 말까지 문서로 규정하게 하는 게 그렇다.
하지만 카를로스가 체포된 1989년에는 그런 원칙이 없었고, 경범죄 혐의로 카를로스를 체포한 경찰은 뜻하지 않은 횡재를 했다고 믿었다. 당시 '엘파소 타임즈' 기사에 따르면 엘파소 경찰은 카를로스를 20여 건의 과다노출 범죄와 여아 납치, 강간 사건을 저지른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엘파소의 검찰은 카를로스를 납치와 폭력에 의한 강간죄로 기소했다.
카를로스는 형 마리오에게 전화해서 이 문제를 상의했다. 형이 물었다. "네가 한 일이니?"
"당연히 아니지." 카를로스가 대답했다.
형은 "그래. 그 대답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마리오는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엘파소로 와서 카를로스를 돕기 시작했다. 엘파소 최고의 변호사이자, 가장 비싼 변호사 중 하나였던 마이클 깁슨(Michael Gibson)을 고용했고, 카를로스는 그 변호사 비용과 사설탐정, 그리고 보석금을 내기 위해 자신의 자동차는 물론, 자기가 세워 운영하던 대리점까지 팔았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아내 팸이 그를 떠난 것이다. 팸은 구치소에서 전화를 한 카를로스에게 결혼 생활을 끝내겠다고 했다. "더 이상 당신의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게 팸의 말이었다. 카를로스는 자기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항변했지만, 팸은 전화를 끊었다.
카를로스가 열심히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잃었고, 이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만 남았다. 그는 변호사 깁슨에게 물었다. "무죄한 사람도 감옥에 갑니까?" 400번가량의 재판 경력을 가진 깁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 무죄한 사람이 감옥에 갈 때도 있어요."
'에스텔라를 찌른 가시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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