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우대 조치의 종말 ③
• 댓글 1개 보기지금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진행 중인 적극적 우대 조치의 위헌 여부 논의는 아시아계, 특히 중국계 학생들이 주축이 된 SFFA(Students for Fair Admission, 공정한 입시를 위한 학생연합)라는 단체가 하버드 대학교를 상대로 낸 소송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계 학생 vs. 아이비리그 학교'라는 인상을 주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선 같은 단체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UNC)를 상대로 낸 같은 종류의 소송도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단체가 단순히 '학생들의 모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SFFA라는 단체의 대표는 학생이 아니라 에드워드 블룸(Edward Blum)이라는 사람이 대표를 맡고 있다. 블룸은 무려 2만 명의 학생들을 대표해서 일종의 집단소송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이런 소송이 흔히 그렇듯, 변호사나 로펌 소송을 진행하면서 원고를 모은다. 블룸이 모은 학생들은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고 이중에는 백인 학생들도 있다. 아시아계와 백인 학생들로 구성된 이유는 첫 번째 글에서 설명했던 아래의 도표가 잘 설명해준다.
같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아시아계와 백인 학생들은 다른 (소수) 인종에 비해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고, 이는 "피부색에 따른" 엄연한 인종차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학생들이 낸 위헌 소송이지만 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를 에드워드 블룸의 소송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소송에서 SFFA와 겨루고 있는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 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의 아래 기사를 보면 "에드(워드) 블룸이 적극적 우대 조치를 폐지하기 위한 오랜 싸움을 끝내려 한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싸움을 끝낸다는 건 승리하겠다는 얘기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싸움을 하는 걸까?
먼저 분명히 해야 하는 게 하나 있다. 앞의 글에서 에드워드 블룸을 변호사라고 소개했지만,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는 변호사 시험(bar exam)을 통과한 변호사(lawyer)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그를 "리티게이터(litigator)"라 부른다. 물론 재판에서 litigator는 대부분 시험을 통과한 변호사(lawyer)가 담당하기 때문에 litigator를 소송 변호사, 법정 변호사라고 부르는 일이 일반적이지만 예외도 있다. 그 예외의 대표적인 사람이 블룸이다.
에드워드 블룸은 미 중부 미시건주에서 좌파(left-wing) 성향이 강한 진보적인 유대계 부모에게서 태어나 텍사스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텍사스와 뉴욕에서 대학을 다녔고, 한 때 서아프리카 문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사회에 나와서 그가 택한 직업은 주식 중개인이었다. 그런 블룸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30대였던 1980년대 미국의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흔히 "네오콘"이라 부른다) 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진보적인 집안에서 자라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수주의를 접한 블룸은 자신이 사는 휴스턴 선거구에서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이 거듭해서 당선되는데 정작 공화당은 지역구에서 후보조차 내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공화당 후보 출마하기로 결정한다.
정치 초보였던 그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선거운동(미국에서는 후보가 유권자를 방문하는 선거운동이 허용될 뿐 아니라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을 하는 과정에서 왜 공화당이 이 선거구(텍사스 18 선거구)에 후보를 내지 않는지를 깨닫게 된다. 문을 두드리는 집마다 흑인 유권자들이 나왔던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한데, 블룸은 자신이 출마한 선거구는 흑인 동네와 백인 동네를 가르는 선을 따라 정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심각한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특정 후보자나 특정 정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는 행위)이었다.
흑인들만 골라내어 만든 18 선거구에서는 민주당만 당선되고, 이 선거구를 둘러싸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2 선거구에서는 공화당만 당선되는 식이기 때문에 블룸처럼 18 선거구에 출마하는 공화당 후보나 2 선거구에 출마하는 민주당 후보는 당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룸은 이 선거에서 참패한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gerrymandering을 "제리맨더링"이라고 발음한다. 미국에서 Gerry라는 이름은 Jerry와 똑같이 발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게리맨더링이 맞다. 이 행위는 미국의 18세기 말, 19세기 초 정치인 Elbridge Gerry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표현인데, 그의 이름은 '제리'가 아닌 '게리'로 발음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미국인들이 잘못 발음하고 있는 셈이지만, 어쨌든 미국인들은 예외 없이 '제리맨더링'으로 부르기 때문에 이게 표준 발음이 되었다.
게리맨더링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는 미국 정치의 심각한 고질병이지만 정치 초년생인 에드워드 블룸은 이 문제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런 선거구를 획정한 텍사스 주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재판에서 패했지만 굴하지 않고 항소를 거듭해 1996년에는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결국 승리한다.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유명한 사건의 이름은 부시 대 베라(Bush v. Vera)다. 베라는 블룸이 포함된 원고들의 대표이고, 부시는 우리도 잘 아는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다. 당시 텍사스 주지사였기 때문에 이 사건의 이름에 들어가게 된 거다.
이름 없는 주식 중개인, 실패한 정치인에 불과했던 에드워드 블룸은 대법원의 판결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게리맨더링이라는 불합리한 정치 행위에 머무르지 않고, 게리맨더링이 인종별 거주지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에 이르렀다. 블룸은 미국에서 법적이고 눈에 띄는 인종차별은 끝났다고 믿는다. 그리고 흑인과 같은 소수 인종이 법적으로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면 그들을 특별히 배려하려는 적극적 우대 조치는 위헌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조치에서 특별히 배려할 대상을 선정하는 조건은 피부색, 즉 인종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인종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한다면 그것은 차별이며, 위헌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논리는 법적으로 흠이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앞의 글에서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이야기를 했지만, 그와 같은 보수 판사와 대법관들이 실제로 블룸과 생각을 같이 한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고, 판사들 중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식 변호사도 아니면서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가 승리한 경험까지 얻게 되자 블룸은 이것을 자신의 커리어로 삼는다. 그는 1996년 부시 대 베라 판결 이후로 무려 여덟 개의 사건을 연방 대법원에 제출하게 되는데 이 모든 사건들이 궁극적으로 적극적 우대 조치에 대한 위헌 판결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잠깐, 블룸은 변호사도 아닌데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까? 그가 주도하는 소송은 미국의 보수 비영리 펀드인 도너스 트러스트(Donors Trust, 이 펀드는 기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와 같은 단체의 자금 지원을 받는데, 블룸은 그 과정에서 일종의 컨설턴트 자격으로 수수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식 변호사가 아닌 리티게이터라고 하지만 대법원에 사건을 올려 보내는 데 그 어떤 변호사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그렇게 에드워드 블룸의 도움을 요청한 대표적인 학생이 애비게일 피셔라는 백인 여학생이다. 텍사스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피셔는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University of Texas–Austin)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텍사스 대학교는 지원자를 두 그룹으로 분류해서 입학 심사를 하고 있었다. 우선 텍사스주의 고등학교 졸업생들 중 성적 상위 7~8%에 해당하는 학생이 지원할 경우 자동적으로 입학을 허가하는데, 이렇게 한 해 입학생의 75%를 선발한다. 이게 첫 번째 그룹(Tier 1)이다. 두 번째 그룹(Tier 2)은 나머지 25%로, 성적 외에도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 및 성취, 거주 지역과 가정 형편, 그리고 인종을 고려해서 뽑는다.
애비게일 피셔는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성적만으로 뽑는 첫 번째 그룹 전형을 포기하고 두 번째 그룹으로 지원하지만, 아무래도 소수 인종이 가산점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이 전형에서 떨어졌다. 피셔는 탈락 소식을 들은 그날로 아버지의 친구인 에드워드 블룸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했다. 항소와 상고가 이어질 이런 재판에서 판결이 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린다는 것을 피셔와 그의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대법원이 의견을 밝힌 2013년이 되면 피셔는 이미 다른 대학교를 졸업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적극적 우대 조치의 부당함을 증명하려는 것이었고, 블룸은 그 일을 도와줄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블룸은 이로 인해 다시 한번 '적극적 우대 조치와 싸우는 투사'라는 명성을 날리게 되지만 결과적으로 피셔는 연방 대법원에서 패했다. (대법원은 피셔 대 텍사스 대학교 사건을 두 번 심사했다. 1996년에는 하급심으로 돌려보냈고, 2016년에는 대학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소수 인종을 배려하는 정책을 두고 주류인 백인 학생을 대표해서 연방 대법원뿐 아니라 미국의 여론과 맞서는 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종류의 "피해자"를 찾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바로 또다른 소수 인종, 아시아계였다.
'적극적 우대 조치의 종말 ④'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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