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자백 ② 남미의 나치 소굴
• 댓글 5개 보기결론부터 말하면 아돌프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1961년의 재판을 통해반 인류 범죄, 전쟁범죄 등의 혐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이듬해 6월 1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따라서 아무도 그를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의 글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나 아렌트가 그의 범죄를 두고 '악의 평범성'이라고 설명한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그저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아이히만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한 것은 아렌트만이 아니었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취재를 위해 재판에 출석한 400여 명의 사람들이 대부분 같은 견해였다고 한다. 물론 악마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서 수백만의 사람들을 가스실에 보낸 것이 무죄는 아니지만, 그는 재판을 통해 대학살을 주도한 악마에서 흔한 전쟁 범죄자이자, 그저 명령을 이행한 관료로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악마의 자백: 사라졌던 아이히만 테이프' 공개된 아이히만의 육성 기록은 그가 단순히 명령을 따른 사람이 아닌 학살의 주도자였고, 유대인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철저하게 믿었던, 그리고 그들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악마였음을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하게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는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가 인류의 역사와 기억에 들어오게 된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고–심지어 이스라엘 정부나 모사드도 처음에는 아이히만의 체포에 큰 관심이 없었다–몇몇 사람들의 노력 때문에 가능했음을 설명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질문들이 떠오를 것이다. 1) 아이히만은 왜 자신에게 불리한 육성 증언을 수십 시간에 걸쳐 녹음했고 2) 그 녹음된 증거는 왜 법정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며 3) 그 테이프들은 왜 이제야 발견되었을까? 이 다큐멘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많은 사람이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내막은 모르는 전후 아르헨티나에 존재하던 나치 커뮤니티를 설명해야 아이히만이 왜 그런 녹음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나치 독일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독일이 패한 후에는 연합국의 수배를 받는 나치 인사들을 몰래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아르헨티나에 들어온 나치 인사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몰래 숨어지내지 않았다. 자신들이 나치였음을 숨기지 않고 모여 살면서 함께 교류했고, 심지어 그들이 자주 모이는 식당에서는 종업원들이 발뒤꿈치를 소리나게 붙이면서 거수 경례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저 전쟁에서 패했을 뿐 떳떳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건 아니기 때문에, 아이히만은 토끼를 키워 팔기도 하고, 메르세데스 벤츠 자동차 공장에서 일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유럽에 남은 가족들과 떨어져 자신의 본명을 숨긴 채 오토 에크만(Otto Eckmann)이라는 가명으로 살면서 자신의 과거 정체성과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이야기는 대중문화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보통은 대규모 범죄조직을 기소한 검찰이 조직의 일원의 증언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신원을 세탁해주지만, 범죄자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 사는 일은 흔하다. (사실 장기 수배자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범죄조직의 일원이 살인 혐의를 피해 프랑스로 건너가 무려 16년 동안 피자 가게 요리사로 일하다가 붙잡힌 뉴스도 나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가족, 친지, 지인들과 단절하고 살아야 하는 데 있다.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에 이런 단절을 견디고 사는 것이고, 아이히만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히만은 이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가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때 나치의 제3제국의 장교로 수백만의 목숨을 좌지우지했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1945~48) 때 주요 인물로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사람인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잡일을 하며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빌헬름 자센(Wilhelmus Sassen)이라는 이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언론인으로, 나치 동조자였다. (나치가 침공한 나라들에도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명령을 받아 종군기자 활동을 했고,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SS)의 일원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전범이었지만,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유럽을 탈출해서 아르헨티나에 잠입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과 마찬가지로, 아니 아르헨티나에 모인 대부분의 나치 전범과 마찬가지로 자센은 나치즘을 진심으로 믿었고, 이를 되살리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21세기에도 존재하는 네오 나치는 사라진 나치즘의 부활이 아니라, 20세기 나치즘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자센은 그렇게 아이히만을 만나게 되었고, 서로 생각이 통하는 이들은 주기적으로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 1950년대 중반의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애초에는 자센이 홀로코스트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각종 문서와 사진, 증언, 시신 등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온 지금도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증거가 나오기 시작한 1950년대에 나치 동조자들이 이를 믿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나치가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말살하려 했다는 물증이 본격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했고, 이를 알게 된 자센은 유럽에서 이런 책들을 수입해서 읽었다고 한다.
자신이 믿는 나치가 어린아이와 여성들까지 가스실로 보내서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센은 이를 연합국이 퍼뜨리는 허위정보라고 굳게 믿었고, 아이히만을 만나서 직접 얘기를 들어보면 히틀러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듣게 된 것은 아이히만의 사실인정이었다.
여기에는 아이히만의 허영심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젊은 시절부터 책을 쓰고 싶었다. 그는 어렸을 때 공부에 소질이 없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런 그에게 자센과 같은 언론인이 찾아와서 취재를 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었고, 나중에 책이 나와서 다만 얼마라도 벌 수 있다면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자센과 만날 때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모여 살던 나치들이 함께 모였다. 유럽을 탈출해서 남미까지 와야 했던 사람들이라면 나치 중에서도 고위급 인사들이었고, 아이히만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어서 이들이 모여 대화를 나눌 때면 아이히만 옆에 앉으려고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아이히만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마음 놓고 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미에 숨어 무명인으로 사는 데 지쳤던 그가 자신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났고, 그들 사이에서 영웅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자 그동안 목숨을 지키기 위해 굳게 걸어 잠그고 있던 빗장을 풀고 방심하게 된 것이다.
자센과 아이히만,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치들은 매 주말 만나서 몇 시간씩 (길게는 7시간까지) 대화를 나눴고, 이를 책으로 펴내려고 생각했던 자센은 이 대화를 모조리 녹음했다. 그렇게 녹음된 테이프 릴(reel)이 무려 67개. 하지만 당시만 해도 녹음용 테이프가 비싸고 귀해서 녹음된 내용은 일일이 타자를 쳐서 녹취본을 만든 후에는 테이프를 다시 녹음을 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기록으로 남았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아이히만의 자백은 그렇게 탄생했다.
'악마의 자백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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