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 댓글 8개 보기최근 언론에 부고 기사가 하나 떴다. 데이빗 A. 케이(David A. Kay)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낯익은 이름은 아니었다. 한 때 공직에 있었지만 물러난 지 20년이 되어가는 사람이고, 말년에는 웨딩사진작가로 일하면서 근근이 생활하던 사람이었다. 얼마나 관심 밖에 있었냐면, 그가 세상을 떠난 건 8월 13일인데, 소식이 알려진 건 열흘 가까이 지난 22일이었다. 무슨 일을 했던 사람이길래 언론이 이 사람의 사망 소식에 관심을 가졌을까?
데이빗 케이는 정치학 박사로, 젊은 시절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였지만 커리어를 바꿔 국제 원자력 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에서 일하게 되었다. 한국 언론에는 북한의 핵개발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는 IAEA는 원자력의 군사적 사용을 억제하고 평화적 사용을 장려하는 UN 산하의 독립 기구로, 케이 박사는 그곳에서 각 나라의 의무 이행을 사찰하는 부문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1991년에 UN의 무기사찰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케이 박사가 UN의 무기 사찰 책임자가 된 것은 걸프 전쟁(1990~1991)이 끝난 직후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을 계기로 미국을 주도한 연합군이 참전한 이 전쟁은 화학무기를 사용해 민간인을 학살한 혐의가 있는 독재자 후세인의 무기를 사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케이 박사가 이끄는 UN 사찰단은 이라크에서 후세인이 숨긴 생화학 무기를 찾아내는 역할을 담당했고, 2년 후인 1993년에 UN의 사찰 책임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미국 정부가 그를 찾은 건 2002년의 일이다. 당시 백악관은 이라크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유는 잘 알려진 대로 한 해 전인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테러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테러는 알 카에다라는 국제 테러조직이 저질렀고,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해 이를 실행에 옮긴 많은 사람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적이었고,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그곳 정부와 탈레반의 도움을 받아 숨어있었는데 조지 W. 부시와 백악관 참모들은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한 것이다.
알 카에다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와 전혀 무관한 이라크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나 황당한 얘기인지는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 정부는 사담 후세인이 테러리스트를 숨겨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배경에는 폴 울포위츠(Paul Wolfowitz)라는 인물이 있다. 당시 울포위츠는 국방부 차관으로 도널드 럼스펠드(국방부 장관)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9/11 테러가 일어난 날 밤 회의 때 그가 "이라크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처음 꺼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세인의 WMD
정확하게 왜 조지 W.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있다. 아버지(조지 H. W. 부시)가 수행한 걸프 전쟁 때 살려둔 사담 후세인이 중동의 위험 요소로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라크의 풍부한 석유 때문이기도 하고, 공화당, 특히 딕 체니 부통령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는 주장도 있다. 딕 체니는 부통령이 되기 직전 (이라크 전쟁으로 큰돈을 번 기업인) 할리버튼의 CEO를 역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군대를 동원해서 다른 나라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고민하던 부시와 그의 참모들은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WMD, Weapons of Mass Destruction)을 숨기고 있다"라는 것을 그 이유로 삼기로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부시와 딕 체니, 럼스펠드, 그리고 울포위츠였지만 이들은 국제사회에서는 물론, 미국 내에서도 신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하는 주장은 특별한 설득력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신뢰할 만한 전문가가 필요했다. 데이빗 케이 박사의 이름이 언급된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케이 박사는 1991년에 이라크를 사찰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으로 후세인이 WMD를 만들고 있다고 확신했다. 부시 행정부에게는 더없이 완벽한 인물이었다.
물론 케이 박사가 이라크를 사찰하는 건 미군이 이라크군을 제압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고, 전쟁으로 가기까지는 부시 행정부에서 가장 신뢰를 받고 있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사용했다. 부시의 측근은 파월 장관에게 틀린 정보를 전달했다는 주장도 있고, 그 정보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파월도 알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일단 이라크를 점령한 후에는 사찰이 가능했고, 부시 정권은 2003년에 케이 박사를 사찰 책임자로 세워 후세인의 WMD를 찾게 했다. 이 임무를 맡은 것이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만든 이라크 서베이 그룹(Iraq Survey Group)이었고, 케이 박사는 그 책임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이라크를 샅샅이 뒤진 케이 박사가 찾아낸 건 사담 후세인이 WMD 개발 프로그램을 대부분 포기했다는 사실이었다. 화생방 무기를 만들 생각으로 재료를 모은 흔적은 있지만 무기나 개발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았고, 장거리 탄도탄 개발 프로그램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는 부시 정권의 주장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1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고 수천 명의 군인들이 양측에서 전사한 전쟁이 "틀린 정보"에 기반해서 일어났다는 얘기였다.
데이빗 케이 박사는 2003년 말 이라크에서 돌아온 후 CIA 국장 조지 테넷(George Tenet)을 찾아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내밀었고, 곧이어 조사단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2004년 1월 미국 상원 국방위원회의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먼저, 우리가 거의 모든 점에서 틀렸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Let me begin by saying we were almost all wrong). 여기에는 분명히 저도 포함됩니다 (...) 전쟁 전까지만 해도 저는 그때까지 나온 정보를 보고 이라크가 WMD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 판단으로 우리가 모두 틀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실이 가장 충격적입니다."
청문회 때까지만 해도 케이 박사는 그래도 이라크 침공은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후세인은 민간인을 학살한 잔인한 독재자였기 때문에 그를 제거한 것은 인도주의적인 결정이라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전쟁 중에 사망한 민간인과 그 이후에 이라크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을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케이 박사도 생각을 바꿨다. 2006년 한 유명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서 침공을 결정할 당시 조지 테넷 CIA 국장이 파월에게 틀린 정보를 전달한 사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면 백악관에서 반기지 않을 것을 알고 그들 사이에 들어가고 싶어서 (틀린 정보를 전달)한 것"이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솔직한 고백이 백악관을 분노하게 한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당시 케이 박사를 가까이에서 취재했던 기자 밥 드로긴은 그를 회고하는 칼럼에서 CIA와 백악관은 불리한 증언을 한 케이 박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고 했다. 워싱턴에서 케이 박사는 모든 끈이 끊어졌고, 생계를 잇기 위해 웨딩사진을 찍기도 했다는 것이다. 드로긴은 권력 앞에서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미국의 가치라도 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고 개탄한다. 드로긴에 따르면 케이 박사가 이라크에서 돌아와 사직서를 냈을 때 CIA에서는 그에게 고문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이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함임을 알았기에 거절했고, 진실을 알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 대가로 그는 워싱턴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로긴 기자는 데이빗 케이 박사야말로 진정한 미국의 영웅이라고 말하지만 케이 박사는 무엇보다 전문가로서의 자세를 보여준 사람이다. 사담 후세인이 WMD를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이라크에 들어갔지만 자신의 신념이 사실을 가리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때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앞길을 막을 것임을 알았어도 진실을 말하는 쪽을 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로긴의 말처럼 세상은 이런 전문가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을 하거나 입을 다무는 사람을 좋아한다. 케이 박사는 잊혀졌지만 9/11 테러가 일어난 날 백악관 사람들에게 이라크를 침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후세인이 WMD를 숨기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폴 울포위츠는 충성의 대가로 2005년에 세계은행 총재가 되었고 (하지만 오래지 않아 성추문 등의 문제로 2년 만에 사퇴했다), 부시의 다른 충성파 멤버들도 대부분 영전했다.
데이빗 케이 박사의 용기가 더욱 널리 알려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험 많은 전문가의 정직한 의견을 듣기 싫어하는 사회는 대중을 속이려는 사람들이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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