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멀라 해리스가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팀 월즈가 내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의 작은 주 로드아일랜드에 온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들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왜?'였다. 미국 북동부를 가리키는 뉴잉글랜드는 대체로 진보적인 지역이고, 그중에서도 로드아일랜드는 트럼프와 J.D. 밴스를 뽑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이다. 선거일까지 석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 경합주들만 돌아도 시간이 부족한 부통령 후보가 왜 굳이 여기까지 오는 걸까?

기사를 읽어 보니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팀 월즈는 이곳에 '랠리(rally)'를 하러 오는 게 아니라 '펀드레이저(fundraiser, 모금 행사)'를 하러 오는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운동 중에서 랠리는 주로 승패를 결정하게 될 중요한 지역을 찾아다니며 가급적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체육관 같은 곳에 불러들여서 세를 과시하고 바람을 일으키는 작업이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거나, 지지자들에게 반드시 투표하도록 하는 게 집회의 목적이다.

모금이 목적인 펀드레이저는 다르다. 수천 명의 참석자가 아니라, 부자들이 참석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펀드레이저는 체육관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파티를 할 수 있는 장소를 고른다. 로드아일랜드에서 팀 월즈의 펀드레이저가 열리는 곳은 유명한 관광지인 뉴포트(Newport)의 맨션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쪽으로 오는 김에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도 들를 것이고, 거기에서도 더 큰 모금을 할 게 분명하다. 대부분 우리 돈으로 최소 수백에서 수천만 원 정도의 표를 사야 참석할 수 있는 모임들로, 지역 유지들에게는 미국의 대통령, 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눌 기회이고, 후보들에게는 선거 운동을 진행하는 데 필수적인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중요한 행사다. 그러니까 팀 월즈는 민주당의 아성인 뉴잉글랜드 지역에 들러서 모금을 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격전지, 즉 경합주에 가서 싸움을 하는 것이다.

참고로,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맨션들은 남북전쟁 후 대호황기(Gilded Age)에 "도둑남작들(Robber Barons)"이라고 불렸던 갑부들이 유럽 귀족들의 성을 흉내 내 만든 저택들로, 약 100년 전에는 이곳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위한 펀드레이저가 개최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미국의 역사가 반복되는 느낌을 받는다면 착시만은 아닐 거다.
뉴잉글랜드 지역(왼쪽)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 있는 역사적인 맨션 중 하나인 벨코트 캐슬 (이미지 출처: Katie Wanders, The New York Times)

펀드레이저를 하는 건 선거운동에 자기 돈을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에게 선거운동과 정치는 돈을 버는 수단이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다. 물론 부자들의 후원이 필요한 건 민주당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지만, 트럼프는 후원자들에게 확실하게 보답해 주기 때문에 부자들에게 인기 있는 후보이고, 그의 주변에는 갑부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달 초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유명한 부촌인 브리지햄튼(Bridgehampton)에서 열린 한 트럼프 펀드레이저의 풍경을 묘사한 뉴욕타임즈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금융업계의 유명한 부자가 자기 저택에서 개최한 펀드레이저 파티에는 유명 헤지펀드 매니저인 빌 애커먼(Bill Ackerman)을 비롯해 약 130명이 참석했다고 하니 우리 돈으로 수십억 원은 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 모인 부자들은 트럼프가 선거에서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로, 민주당이 대선 후보를 바이든에서 카멀라 해리스로 교체한 후에 눈에 뜨게 주춤하고 있는 트럼프가 반격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날 저녁에 모인 부자들을 실망시켰다. 지지자들은 그에게 현재 상황이 우려된다는 얘기를 했는데, 트럼프의 대답은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에 패한 후부터 반복해 온 "선거를 도둑맞는 걸 막아야 한다(We've got to stop the steal)"이었단다. 기사에 따르면 트럼프의 측근들은 그 주장을 하는 게 이번 선거에서 도움이 되지 않으니—트럼프는 2020년 선거가 공정했다고 생각하는 중도 유권자들을 끌어와야 승리한다—그만하라고 전달했지만, 트럼프는 같은 주장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하고 있다.

[디지털 세상 읽기] 트럼프에게 줄 서는 갑부들 | 중앙일보
지난주 미국 공화당 전당 대회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가 공식 대선 후보가 된 후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갑부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섰다. 평소 극우적인 성향을 드러내던 일론 머스크를 비롯해 그의 주변에 있는 피터 틸, 데이비드 색스 같은 부자들이 트럼프 지지를 밝힌 건 놀랍지 않지만, 미국 벤처 투자자의 상징이자 민주당 지지자였던 마크 앤드리슨, 벤 호로위츠 같은 사람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건 다소 의외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부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선 진짜 이유가 뭘까? 언론에서는 갑부의 트럼프 지지 이유로 세금을 지목한…
본문에 나오는 트럼프의 말, "한 달에 4500만 달러를 기부했다면서"는 "...기부하기로 약속했다면서"로 수정합니다. 칼럼을 송고한 후 일론 머스크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날(8월 2일)의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트럼프는 펀드레이저가 열리기 이틀 전, 미국의 흑인 언론인들이 모인 행사에 참석해서 카멀라 해리스가 진짜 흑인이 아니라 인도계인데 정치적인 이유로 갑자기 흑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해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한 표가 아쉬운 상황에서 흑인 유권자들을 분노, 단결하게 만드는 이 발언은 누가 봐도 하면 안 되는 실수였다. 하지만 펀드레이저에 참석한 트럼프는 같은 주장을 반복하며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서 후원자들을 긴장시켰다. 이들은 그날 트럼프에게서 정책이나, 선거 전략에 관해 듣고 싶어서 질문을 해봤지만 트럼프는 카멀라 해리스에 대한 공격만 반복하면서 "내가 원래 이런 사람(I am who I am)"이라는 태도를 유지했다고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인인 빌 오라일리(Bill O'Reilly)는 문제가 되었던 흑인 언론인 행사와 관련해서 흑인 저널리스트가 트럼프를 화나게 하는 질문을 준비해서 카멀라 해리스에 대한 인종적 모욕을 끌어냈다고 했다. 그는 모욕적인 질문을 받은 트럼프는 "화가 났고, 감정적이 되었다. (트럼프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감정적이 되고, 일을 키운다. 그 사람은 원래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게 트럼프를 지지하는 보수층의 불만이다.

보수 언론인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니스트들이 진행하는 오피니언 팟캐스트인 포토맥 워치(Potomac Watch)는 며칠 전 "트럼프의 선거 운동에 문제가 생겼는가?"라는 제목의 에피소드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의 교체 이후 트럼프가 주춤한 이유로 똑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카멀라 해리스를 상대로 중도 유권자를 가져오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아주 분명한 전략이 있는데, 그건 놔둔 채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싸움을 하면서 표를 잃고 있다는 거다.

이 신문의 칼럼니스트들이 보기에 카멀라 해리스는 진보적인 정치인이니 그걸로 공격하면 되고, 그의 러닝메이트 팀 월즈는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 이후에 일어난 시위대의 편을 들어준 걸로 공격하면 승산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쉬운 걸 놔두고 엉뚱한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게 이들의 불만이다. 참고로, 트럼프가 공격하는 사람 중에는 조지아주의 브라이언 켐프(Brian Kemp) 주지사도 있다. 조지아주는 트럼프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합주로, 켐프 주지사는 공화당 사람으로 주민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WSJ Opinion: Potomac Watch: Is Donald Trump’s Campaign in Trouble? on Apple Podcasts
‎Show WSJ Opinion: Potomac Watch, Ep Is Donald Trump’s Campaign in Trouble? - Aug 8, 2024

트럼프는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 많은 분석이 있지만 대개 비슷한 부분을 지적한다. 갑자기 바뀐 판세에 트럼프가 적응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는 거다.

가령, 조지 W. 부시의 연설문을 작성했던 빌 맥건(Bill McGurn)에 따르면, 트럼프는 선거 운동을 할 때 "여론 조사 결과를 봐라. 내가 이렇게 앞서 있다"는 말로 시작하곤 하는데, 카멀라 해리스의 등장 이후 여론 조사 결과가 뒤집어졌다. 아직 근소한 차이에 불과하지만, 뒤집힌 거고, 트럼프는 모멘텀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대통령 후보라면 이 시점에서 그동안 바이든의 나이에 맞췄던 공격 전략을 해리스의 정책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전면 수정해야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트럼프는 2020년 선거 기간 내내 했던 것처럼 "민주당이 부당한 방법으로 나의 당선을 막는다"는 불평만 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는 해리스가 부당하게 바이든의 후보직을 빼앗았다는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서 이를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다시 바이든을 후보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워낙 황당한 주장이라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의 진짜 위기는 여기에 있다. 그는 어처구니없는 주장—2020년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게 대표적이다—을 항상 해왔지만, 과거에는 그의 주장이 꽤 많은 사람들에게 통했다. 문제는 이제 열성적인 지지자를 제외하면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NPR의 스티븐 파울러(Stephen Fowler) 기자는 트럼프가 쌓인 불만을 길게 늘어놓는 식의 연설을 하는 건 2016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그때만 해도 트럼프는 정치 신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그가 하는 정치 주류에 대한 공격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같은 불만을 8년 째 하고 있다면 그걸 듣고 있을 사람은 많지 않다.  

해리스 선거운동 본부에서는 빈자리가 많이 보이는 트럼프의 집회와 해리스의 집회를 비교한다. (Edit: 트럼프 쪽 사진은 집회가 시작되기 전, 청중이 입장하던 시점에 찍힌 것으로 두 사진을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보도가 나왔다.)

게다가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던 과거와 달리, 올해의 트럼프는 게을러졌다. 나이 때문일 수도 있고, 신통치 않은 반응에 위축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선거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러닝메이트인 J.D. 밴스가 더 부지런하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트럼프, 흔들리다 ②'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