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여름 캠프 ①
• 댓글 남기기장애인 인권운동의 어머니라 불리던 주디 휴먼(Judy Heumann)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공공장소에서 장애인의 이동권과 접근성을 보장받기 위해 평생을 싸웠던 휴먼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장애는 사회가 장애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데 실패할 때만 비극이 된다." 휴먼은 "내가 나에게 장애가 없었으면 하고 바랄 거라고 단정 짓지 말라. 나는 평생 휠체어를 탔기 때문에 이건 나의 정체성"이라면서, 사회가 휠체어 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휠체어를 탄 게 불편한 게 아니라고 했다.
이런 생각은 한 때 미국에서도 혁명적이었다. 휴먼은 1960년대부터 그런 말을 했지만, 1980년대에도 미국인들의 생각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1987년에 처음 주디 휴먼을 취재했던 기자에 따르면 장애는 사회가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할 때만 비극이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뜻밖이고 낯설어서" 자신이 일하던 잡지에서 그 기사를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의 미국은 그런 생각이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미국에서는 일상적인 생활 반경에서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 흔치 않다. 공공건물의 화재경보기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강한 스트로브 라이트를 터뜨린다. 하지만 이 과정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아름다운 결정을 내리고 장애인을 배려하자는 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법과 돈의 나라인 미국의 흔한 작동 방식은 이렇다:
매장에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지 않거나, 법이 정한 규격에 맞지 않아 경사가 심하거나 회전반경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걸 발견한 사람(변호사들이 직접 나서서 찾아서 소송인을 모으기도 한다)이 소송을 걸어서 매장 주인이 벌금을 내고 고치게 한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를 갈지만 결국은 따를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처음부터 제대로 법을 지키는 게 좋다는 게 상식처럼 된 것이지, 모두가 아름다운 마음으로 접근성을 높이자고 한 게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건물주에게 요구하려고 해도 법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오래도록 잠자고 있던 이 법안(재활법 504조)에 서명하게 만든 게 주디 휴먼을 비롯한 장애인 운동가들이다. 주디 휴먼에서 관해서는 2022년 5월 오터레터에서도 '주디 휴먼의 도로 점거'라는 글로 소개한 적 있지만, 그때는 그가 했던 연설을 중심으로 소개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빌어 그의 인생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이 글은 오터레터의 독자들이 꼭 보셨으면 하는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 (Crip Camp: A Disability Revolution)'에 대한 감상이기도 하다.
주디 휴먼이 폴리오(소아마비)에 걸린 건 태어난 지 18개월 되던 1949년 봄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걸어다닌 기억이 없다.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였던 휴먼의 부모는 휴먼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뉴욕시의 공립유치원에 보내려고 했지만, 뉴욕시 교육청은 화재 발생 시 위험하다는 이유(fire hazard)로 입학을 불허했고, 대신 간간이 교사가 집을 방문해서 휴먼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이가 또래 친구들과 같이 배우지 못하는 것이 싫었던 어머니는 학교 측과 싸워 이겼고, 결국 휴먼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휴먼에게 장애인도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가르쳐 준 사람은 어머니 일제(Ilse)였다. 훗날 대학을 졸업하고 언어치료 교사가 되려다가 '건물에 화재가 날 경우 휠체어를 탄 교사는 학생들을 대피시키지 못한다'라는 이유로 자격증을 거부 당한 휴먼은 뉴욕시 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냈는데 그때 휴먼에게 힘이 되었던 것도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는 "폴리오에 걸렸던 사람이 대통령은 될 수 있지만 교사는 될 수 없다니 (You Can Be President, Not Teacher, with Polio)"라는 제목의 기사로 휴먼의 소송을 소개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대통령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다.
뉴욕시 교육청과 싸우던 휴먼은 이런 말을 했다. "가식적인 사회가 우리 장애인들에게 생색내기로 교육의 기회를 준 다음에는 묻어버리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교육을 받는 이유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 기회를 얻기 위함이고, 그러려면 직업을 가져야 하는데, 교육만 허용하고 (휠체어를 탄 여성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인) 언어치료 교사가 되는 것조차 막는다면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교육의 기회는 그야말로 생색내기라는 거다.
생각해보면 휴먼이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싸워서 얻어낸 기회이기 때문에 '어차피 다른 사람들처럼 취업할 수 없을 것을 아는 장애인이 왜 굳이 교육을 받겠다 고집을 피웠냐?'라고 나무랄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리는 '하나를 얻어냈으니 당분간 입을 다물고 있는' 식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휴먼은 울분에 찬 얼굴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된 것에 계속 감사해야 하는 데 지쳤습니다. 남들이 다 누리는 이런 당연한 권리에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면 우리가 과연 동등한 존재인가요?" 휴먼의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엇보다 뉴욕 교육청의 주장은 변화를 꺼리는 집단이 들고나오는 전형적인 핑계였다. 주디 휴먼이라는 교사 한 명을 채용하기 위해 바꿔야 할 게 많다면 그냥 그 한 명을 무시하는 게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두 가지를 알지 못했다. 하나는 주디 휴먼 한 사람을 위해서 건물과 법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이런 제도적 장벽 때문에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아주 많은 사람을 위해 바꿔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이 문제를 제기한 주디 휴먼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의 변화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특별한 한 사람이 없으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변화도 있다. 이게 과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할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바란다.
캠프 제네드에 모인 사람들
주디 휴먼에게 장애인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음을 깨우쳐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지만, 휴먼이 장애인들과 함께 권리를 위해서 싸워야겠다는 목적의식과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그가 20대 초반에 카운슬러(캠프 지도교사)로 참여했던 한 여름 캠프였다.
여름방학이 아주 긴 미국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여름 캠프에 몇 주씩 보내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여름 캠프라는 게 워낙 야외 활동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과 함께 캠프에 참여하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1960, 70년대의 미국 분위기는 대안 문화와 히피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각종 실험적인 시도가 많았고, 장애인들만 참여하는 여름 캠프를 계획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약 3시간 가까이 떨어진 산속에 있던 캠프 제네드(Camp Jened)가 그런 곳이었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Crip Camp)'의 전반부는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에만 갇혀 지내던 1970년대 초 십 대 장애인들(그중에는 시설에 수용되어 있던 아이도 있었다)이 처음으로 참여한 여름 캠프에서 얼마나 큰 해방감을 느꼈는지 잘 보여준다. 다른 캠프와 마찬가지로 함께 수영이나 야구 같은 체육활동도 하고, 마음에 드는 아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모두들 난생 처음 경험하는 해방감이었고, 훗날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당시에 찍은 흑백 자료 화면을 통해 크립 캠프의 분위기를 자세히 설명하다가 휠체어에 탄 캠프 카운슬러 한 사람에 주목한다. 유난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참가한 아이들에게 다음날 하게 될 활동을 설명하면서 식사 메뉴를 묻는 이 카운슬러가 바로 23세의 주디 휴먼이다.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캠프 제네드 장면은 1971년에 촬영된 것이다. 이 캠프는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지속되었고, 여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여름마다 같은 캠프에 오면서 친구가 된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1973년에 재활법(Rehabilitation Act)이라는 중요한 법에 서명한다. 각종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재활과 취업훈련 지원,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 등으로 골자로 하는 이 법안에는 504조라는 일종의 인권 조항이 포함되어있었다. "자격을 갖춘 사람이 단지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 조항은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공민법(Civil Rights Act)에 사용된 표현을 가져온 것이다. 이 504조를 제대로 지키려면 적어도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관들에서는 장애인의 접근성을 보장해야 했다.
하지만 이 좋은 법이 통과되었음에도 한국에서 장애인 접근성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마주하게 되는 똑같은 반대와 저지에 부딪히게 된다. 수많은 건물, 시설물에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려면 엄청난 예산이 들어간다며 504조의 발효를 주저한 것이다. 504조가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당시 미국의 보건교육복지부(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장관이 서명을 해야 했는데 여러 이익단체의 반대에 부딪히자 서명하지 않고 묵혀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무려 4년 동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1977년이 되었다. 주디 휴먼과 장애인들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대대적인 점거 농성을 준비한다. 이들의 행동은 미국 현대사에 남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된다.
'세상을 바꾼 여름 캠프 ②'에서 이어집니다.
무료 콘텐츠의 수
테크와 사회, 문화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찾아냅니다.
유료 구독자가 되시면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으실 수 있어요!
Powered by Bluedot, Partner of Mediasp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