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브랜드도 다르지 않다. 많은 좋은 브랜드들이 외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서서히 인기를 잃는 과정을 겪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브랜드는 큰 사랑을 받다가 돌연 몰락하기도 한다.

최근 미국에서 토크쇼 '엘렌Ellen'과 골든글로브 어워드가 몰락한 것은 미국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는 케이블 TV와 인기가 줄어드는 시상식 중계라는 환경변화를 감안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오래된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해서 당장 문을 닫아야 하는 건 아니다. AOL이나 야후를 잘나가는 테크기업으로 부르지는 않아도 여전히 많은 사용자들이 매일 찾아오는 비즈니스인 것처럼, 시상식과 데이타임(daytime) 토크쇼도 엄연히 작동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그런데도 이 두 브랜드처럼 돌연 몰락을 경험할 때는 내부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엘렌의 브랜드 이미지

'엘렌'은 미국 연예계에서 게이/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최초의 코미디언으로 유명한 엘렌 드제너러스Ellen DeGeneres가 2003년 부터 진행하는 인기 토크쇼다. 많은 심야 토크쇼의 타이틀이 'Late Night with Jimmy Fellon'처럼 '브랜드+진행자 이름'의 형태를 갖고 있는데 반해 대개 주부들을 대상으로 낮방송 토크쇼들은 진행자 본인의 브랜드로 승부를 본다. Oprah Winfrey Show("Oprah")를 비롯해 Maury, Dr. Phil, The Wendy Williams Show, The Kelly Clarkson Show 같은 것들이 그렇다. 엘렌 역시 The Ellen DeGeneres Show의 약칭으로 코미디언인 엘렌 드제너러스의 개인 브랜드 파워에 크게 의존한 프로그램이다.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라는 존재 자체가 희귀하던 시절에 남자들만 가득하던 미국의 코미디계를 뚫고 진입한 드제너러스는 인기가 치솟던 1990년대에 방송에서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하면서 (이 커밍아웃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낮방송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이루어졌다)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죽이는 자살행위"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던 당시 미국의 환경에서 당당히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좋은 이미지를 얻고 20년 가까이 순항하던 엘렌 쇼에 경종이 울린 건 작년(2020) 여름이었다. 버즈피드뉴스에서 엘렌 쇼에서 일하던 전직 직원의 말을 인용한 폭로 기사를 냈다. 그 직원에 따르면 엘렌 쇼 제작팀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 일상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종차별도 일어나고 있는데 정작 진행자인 엘렌 드제너러스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드제너러스 본인도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직원들에게 잔인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 외에도 드제너러스에 대한 나쁜 소식이 쏟아졌다. 특히 드제너러스의 신변경호인으로 일했던 사람이 드제너러스가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따뜻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직원들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폭로는 이 프로그램의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여기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엘렌이 여성으로서, 그리고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으로서 받게 되는 필요 이상의 비판 가능성이다. 엘렌은 최근 자신과 직장 문화에 대한 비판이 여성혐오적(misogynistic)이라고 반박했다. 이는 일리있는 지적이다. 미국 토크쇼의 전설 조니 카슨Johnny Carson의 경우 좋지 않은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그가 은퇴하기 전까지 그에 대한 나쁜 보도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언론이 보호를 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랬던 언론이 드제너러스에 관해서는 훨씬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드제너러스 본인이 아닌 '엘렌'이라는 토크쇼의 브랜딩이 있다. 과거의 조니 카슨 쇼를 지금 보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방송되기 힘들 만큼 문제있는 장면이나 표현들이 많다. 아니,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남성이 진행하는 토크쇼의 경우 폭력적이고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엘렌 쇼는 달랐다. 주 시청자층이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진행하는 방식과 크게 달랐고, 항상 밝고 따뜻하고 시청자와 초대손님의 감정을 배려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시청자 눈 앞에서 일어난 괴롭힘

하지만 버즈피드뉴스의 기사와 이후로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이어진 폭로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드제너러스는 문제를 확인하고 직장 문화를 바꾸겠다고 약속했지만 별다른 PR 노력은 없었고, 시청율을 계속 떨어졌다. 그래서 최근 드제너러스가 "이제 토크쇼가 내게 도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번 시즌으로 끝내겠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아쉬워하는 대신 과거의 엘렌 쇼를 되짚어가면서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가령 이 장면이 그렇다:

인기 배우 다코타 존슨이 초대손님으로 나온 이 장면에서 드제너러스는 존슨에게 "왜 나를 생일파티에 초대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존슨은 "무슨 소리냐, 분명히 초대했는데 당신이 오지 않은 거다"라고 반박한다. 존슨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에 이 프로그램에 초대했을 때도 드제너러스가 똑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지난 번 생일 때는 절대 잊지 않고 초대장을 보냈고, 이 사실은 엘렌 쇼 제작진도 전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설명을 하고 있는 다코타 존슨의 얼굴을 잘 보면 분명히 웃고 있지만 '나를 희생시켜서 웃음을 만들어내지 말라'는 분명한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흔히 말하듯, 코미디언이 사람들을 웃기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자신을 놀리는(self-deprecating) 유머를 사용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방법이 옆사람을 놀리는 방법인데, 드제너러스는 이 장면에서 자신보다 브랜드가 약한 젊은 배우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게다가 분명히 초대장을 보냈다는 배우에게 웃음기 없는 얼굴로 "너는 내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개스라이팅으로 인식될 만한, 거의 일방적인 공격처럼 보인다.

존슨이 제작진에게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고 묻고, 그걸 플로어 디렉터가 드제너러스가 잘못 기억하고있다고 (혹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인해주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로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이 장면은 "The beginning of the end for Ellen (엘렌 쇼 종말의 시작)"이라는 말이 온라인에 퍼졌다.

결국 다양성의 문제

요즘은 거의 모든 문제가 조직의 다양성으로 귀결되는 듯 하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엘렌 제작팀의 전 직원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 조직이 다양성을 갖고 있지 못하고, 그래서 비백인 직원들이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발견되지 못하는 문제를 낳는다. 시청자 그룹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제작진이 특정 인종이나, 젠더, 연령층에 편중되어 있다면 시청자들이 보고 불편하게 느낄 장면을 걸러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드제너러스가 다코타 존슨을 몰아붙이는 장면의 불편함은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가진 문제의 표출인 셈이다.

골든글로브의 문제도 바로 이 다양성에서 시작되었다. 아카데미(오스카)상의 경우 #OscarSoWhite이라는 해시태그가 돌아다니기 시작한 2015년 이후로 꾸준한 변화를 시도하면서 2년 연속으로 <기생충>과 윤여정 배우의 수상을 낳았고, 그 결과 백인 위주의 잔치라는 불명예를 많이 벗었지만, 골든글로브는 변화를 거부해왔다. 미국에서 미국 감독이 만든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포함시킨 것은 내부적으로 정해진 원칙 때문이지만, 빠르게 바뀌는 세상은 이런 원칙의 변화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골든글로브가 그런 변화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궁금해했는데, LA타임즈가 이 상을 주관하는 헐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에서 이 협회에 흑인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결국 조직 다양성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 이 문제는 계속 커졌고, 급기야 NBC방송사가 중계를 포기하고, 톰 크루즈는 이제까지 받은 골든글로브 상 3개를 모두 반납하면서 "골든글로브는 끝났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넷플릭스는 "HFPA가 의미있는 변화를 보이기 전에는 골드글로브와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골든글로브가 나름 변화책을 제시했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반박한 대목이다. HFPA에는 진정한 변화를 원하는 회원들도 있겠지만 내놓은 정책변화가 "조직에 퍼진 다양성과 포용성 문제들"을 해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작년 여름에 엘렌 쇼에 대한 폭로가 나왔을 때 드제너러스가 서둘러 문제 해결을 약속했지만 실질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다양성의 부족으로 생긴 문제는 다양성의 증가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엘렌과 골든글로브 모두 이 병을 앓고 있었지만, 두 조직은 원인 치료 대신 증상만 없앨 생각을 한 것이다. 두 브랜드의 몰락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