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대착오 ①
• 댓글 2개 보기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서 무려 70년 동안 왕위에 머무른,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그런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를 두고 "한 시대의 종말(end of an era)"이라고 표현하는 건 과장이 아니다. 20세기의 중반부터 시작해 21세기에 들어와 무려 22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70년은 영국이 제국의 위치에서 내려와 서서히 힘이 약해지는 시기였다. 물론 여전히 세계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세계 1, 2차 대전을 치르면서 영국은 더 이상 세계를 호령하는 나라가 아님을 세계가 확인했고, 그 자리는 미국이 차지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그렇게 영국의 힘이 이양되는 과정을 지켜본 여왕이다.
무엇보다 여왕 본인이 젊은 시절 강조한 것처럼 과거의 왕과 달리 "국민을 전쟁으로 끌고 갈 수도 없고, 법을 만들 수도, 판결을 내릴 수도 없는 (I cannot lead you into battle. I do not give you laws or administer justice)" 권력이 없는 왕이었다. 그런 형식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의 죽음을 "한 시대의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뭘까?
BBC를 비롯한 영국 언론의 행동
여왕의 건강이 "우려스러운(concerned)" 상황이라는 소식이 나온 건 서거가 발표되기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온라인에서는 여왕이 이미 서거했고, BBC를 비롯한 언론사들은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하지만 바로 이틀 전만 해도 새로 총리로 선출된 리즈 트러스(Liz Truss)와 만나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떴다는 게 믿기 힘들었고, 처음에는 그냥 근거 없는 루머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다니는 얘기를 들어보니 단순한 루머가 아니었고 꽤 신빙성이 있었다. BBC 방송이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배너를 검은색으로 교체했고, 세계의 주요 뉴스만 전달하는 앵커가 검은 넥타이를 하고 등장했다는 거다. 무엇보다 영국인이나 영국을 잘 아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그럼 여왕이 서거한 게 확실하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모습이었다. 각종 포럼과 소셜미디어에서는 영국 왕실이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여왕의 서거를 기정 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몇 시간 후에 확인해보니 사람들의 추측이 맞았다. 모든 가족이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오후 6시가 지나 발표를 할 것"이라는 예측대로 6시 30분에 왕실이 여왕의 서거를 공식 발표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내게는 몹시 낯선 풍경이었다. 언론사들은 이미 알고 있는데 단지 가족들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 살아있는 사람처럼 "건강이 우려된다"는 의사의 말을 전하고 있는 건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미국에도 사고나 살인사건이 난 경우 유족들에게 알리기 전에는 경찰이 언론에 사망한 사람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관례는 있다.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경우에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군에서 먼저 가족을 찾아가 알린 후에 일반에 공개하는 게 예의다. 하지만 다들 정황을 통해 여왕이 사망한 것을 아는데 모든 언론과 국민이 합심해서 여왕의 건강을 염려하며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발표하는 건 언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국 언론과 국민들은 왜 알면서도 이런 연기(charade)를 하는 걸까?
뉴욕타임즈가 만든 영상
뉴욕타임즈는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가 공식화되자 준비했던 영상을 발표했다. (워낙 나이가 많은 여왕이라 다들 준비하고 있었다. 영국 왕실은 Operation London Bridge라는 이름으로 왕위 계승을 준비해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을 보면서 영국 언론과 영국인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유산: 미디어 여왕 (The Legacy of Elizabeth II: The Media Queen)'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이 영상은 짧지만 워낙 뛰어난 내용이라 꼭 한 번 보시길 권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를 번역해서 아래에 첨부했다.
그가 여왕이 되었을 때 영국은 아직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1953년의 즉위식은 TV로 중계된 최초의 왕위 즉위식이었다. 이를 본 영국인들은 더 나은 시절이 올 거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는 왕실 가족들이 방송으로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관습이 있었고, 엘리자베스 공주는 2차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0년 14세의 나이로 라디오를 통해 대국민 연설을 했다.
참고로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1936년 당시 국왕이자 엘리자베스의 큰 아버지였던 에드워드 8세가 미국 출신의 월리스 워필드 심슨(Wallis Warfield Simpson)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리면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갑자기 왕이 되었다. 이 아버지가 조지 6세로 2010년에 나온 영화 '킹스 스피치(King's Speech)'의 실존 인물이다. 엘리자베스는 연설할 때 말을 더듬던 아버지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되어 힘들어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당시 뉴스 화면에는 왕과 왕비(엘리자베스의 부모)가 독일군의 폭격을 맞은 런던의 피해를 살펴보는 장면이 등장했고, 영국인들은 왕과 왕비가 자신들과 함께 있고, 똑같이 폭격 아래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피해를 살피다가 폭격이 시작되어 대피해야 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왕실은 이미지의 힘을 이해했고, TV는 왕실이 가장 잘 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화려한 왕실의식(pageantry)은 이 지위를 찬양하고, 왕위와 이를 뒷받침하는 데 필수적인 신비로움(mystique)을 강화한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이후 우리는 처음으로 금을 입히고 화려하게 채색된 정교한 왕실의 마차를 목격했다.
여왕의 마차를 설명하는 앵커의 목소리: "이 마차는 아마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대착오(world’s most beautiful anachronism)가 아닐까요?"
이는 오래되고 (국민과는) 거리가 먼 제도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정보를 형성하고 다듬는 기술이었다.
60년이 넘는 (70년이지만 사전에 제작된 탓에 이렇게 이야기한 것 같다–옮긴이) 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은 사실상 과거의 섬나라로 줄어들었고, 다른 국가로 변했다. 새로운 영국은 과거처럼 여왕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존중은 크게 줄어들었고, 더 많은 주장을 했으며, 부에 이끌렸고, 더 탐욕스러워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에는 왕실의 내러티브를 통제하고 그 중요성을 지키는 데 라디오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매스미디어와 TV를 사용하는 게 더욱 중요해졌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여성이 이끄는 왕실이 어떤 비난도 받지 않으며, 왕실의 행동은 의심받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어지는 내용은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이 영상은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던 여왕이 거센 여론에 밀려 메시지를 발표하고 장례 마차가 지날 때 영국 왕실에서는 극히 드물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보여준다–옮긴이) 왕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고개는 사람들이 왕에게 숙이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대중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행동은 왕실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구하는 일이 점점 쉬워지면서 영국의 왕실도 자체 웹사이트를 만들고,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으며, 중요한 행사를 유튜브를 통해 중계했다. 사람들이 이런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건 왕실이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이미지를 만들고 강화하도록 세심하게 사전 제작된 메시지였다. 왕실은 발언에 실수가 없도록 했고, 신비로움을 지켰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왕가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뒤이어 영국을 떠나 해리 왕자와 그의 아내 메건 마클이 왕실을 비난하는 인터뷰를 오프라 윈프리와 하는 내용이 나온다. 왕실이 인종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마클의 말도 나온다–옮긴이)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힘은 방향을 바꿨고, 왕실은 내부자에게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일은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공이 입원한 시기에 일어났고, 여왕에게는 이중고가 되었다. 여왕은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겠지만 공개발언은 삼갔다. 발언은 항상 적을수록 더 좋다는 원칙이었다.
(이어서 필립공의 사망 뉴스가 나온다–옮긴이) 남편의 사망 이후 한동안 대중 앞에 나서지 않았던 여왕은 자신의 의무를 다시 시작했다. (공개 행사에서 웃음을 보이는 여왕 영상)
큰 틀에서 보면 엘리자베스 2세는 재위 기간 동안 왕실이 가진 특권을 버리지 않으면서 왕실을 현대화했다. 세계가 (왕실이라는) 오래된 기관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고, 왕실이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을 바꿨다. 하지만 군주제는 여전히 모순적으로 남아있다. 통치할 힘은 없고 오로지 국민의 암묵적인 동의로 군림하지만 영국의 정체성의 중심에 존재한다.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간을 돌아보면서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자신의 역할을 정의한 게 언제였지?' 어쩌면 이 질문의 답은 여왕이 1957년에 했던 연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여러분을 전쟁에 이끌고 갈 수 없습니다. 법을 만들 수도 없고, 판결을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제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I can give you my heart)." 이것이야말로 영국에서 가장 오래 군림한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떠나며 남긴 유산일 것이다.
'아름다운 시대착오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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