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랜만에 뉴욕에 갔다가 새로운 커피 전문점/체인을 목격했다.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매장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블루 보틀(Blue Bottle)처럼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매장도 아니고, 라 콜롬브(La Colombe)처럼 개성이 있지도, 스타벅스처럼 세계적이지도 않은 커피 전문점인데 뉴욕에서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고 들었다.

바로 블랭크 스트리트 커피(Blank Street Coffee)다.

매장이 잘 나오게 찍은 사진이 있었지만 폰으로 찍고 나서 보니 창가에 앉은 사람이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지우기로 했다. (이미지 출처: 글쓴이)

이 커피 전문점이 워낙 빠르게 늘어난다고 해서 뉴요커들 사이에서는 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이 도시 소식에 절대 뒤질 수 없는 뉴욕타임즈가 얼마 전에 이 현상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그 얘기를 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커피의 세대 구분을 잠깐 이야기해보는 게 좋겠다. 마침 작년에 한 신문에 쓴 글(링크된 기사 속 사진 설명이 뒤바뀌어 있다)이 있어서 내용을 일부 가져와 본다.


커피 전문가들은 현재 세계의 커피 소비가 세 번의 세대(wave)에 걸쳐서 진행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커피의 종류를 이해해야 한다. 에티오피아 커피, 브라질 커피 같은 지역별 종류가 아니라 큰 품종에 따른 분류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크게 로부스타(Robusta)와 아라비카(Arabica), 두 종류로 나뉜다. 지금은 커피의 약 80%가 아라비카, 20%가 로부스타일 만큼 아라비카 커피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로부스타 커피를 마셨다.

가장 큰 이유는 로부스타 커피콩이 아라비카보다 재배에 덜 까다롭고 지역적 제한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대량생산에 용이하고 값도 저렴하다. 게다가 사람들이 로부스타 품종의 커피를 마셨던 것은 현대에 들어 커피를 대규모로 소비하기 시작하면서 길들여진 커피가 바로 ‘인스턴트 커피’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개 커피와 크림, 설탕이 함께 들어가 있는 ‘커피믹스’의 형태로 소비하지만 예전에는 냉동건조 커피가 담긴 병에서 ‘커피 두 스푼, 크림 두 스푼’ 하는 식으로 일일이 퍼서 취향에 맞게 마시는 일이 더 흔했다.

물론 사람들이 처음부터 냉동건조 인스턴트 커피를 마신 건 아니다.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를 보면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콩을 빻아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서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대목이 있다. 이 글이 발표된 해가 1938년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백화점에서 커피를 갈아서 집에 가져와 내려 마실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을 거다. 커피가 ‘커피숍’이 아닌 집에서도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된 것은 인스턴트 커피의 등장으로 가능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인기있던 1세대 인스턴트 커피. 지금도 제품을 팔고 있는 브랜드들이다.

로부스타의 가장 큰 단점은 맛이 없다는 것이다. 카페인은 많지만 맛이 쓰기 때문에 인스턴트 커피를 설탕 없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다들 설탕과 우유, 크림을 넣어 마시기 때문에 오히려 맛은 중요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저 달달하고 쌉싸름한 맛으로 마시고, 정신이 번쩍 드는 각성효과 때문에 마시던 음료다. 이건 한국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맥스웰하우스, 네스카페를 비롯해, 폴저스(Folgers) 같은 브랜드들이 진공포장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를 팔았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이런 인스턴트 커피 문화를 미국에서 수입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에서 커피에 건조 용법을 도입해서 인스턴트 커피를 제조하는 기술은 일본계 미국인 사토리 게이토가 차에 이용하던 방법을 전용해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미국의 커피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다. 당시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알프레드 피트(Alfred Peet)라는 네덜란드인이 살고 있었다. 피트는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가 도대체 쓰기만 하고 커피 본연의 향은 하나도 느낄 수 없는 형편없는 로부스타 인스턴트 커피라는 것을 알고 “진짜 커피 맛을 미국인에게 소개하겠다”라고 작정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네덜란드에서 커피 로스터였기 때문에 피트는 커피의 참맛을 잘 알 뿐 아니라, 좋은 콩을 구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수입하기로 한 원두가 바로 아라비카 콩이었다.

피트는 원두만 수입해서 판 것이 아니라 커피를 어떻게 로스팅하고 브루잉하는지를 아낌없이 주위에 전파했다. 곳곳에서 찾아와 새로운 커피 만드는 법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에게서 배운 것을 가지고 1971년 시애틀에서 스타벅스 커피숍을 만든 제리 볼드윈도 있었다. 스타벅스는 한동안 피트의 가게(Peet’s)에서 좋은 아라비카 원두를 공급받았다. 처음에는 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퍼지던 새로운 커피가 서서히 미국인들 사이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를 미국 커피의 제2세대(Second Wave)라고 하고, 스타벅스와 함께 지금은 스타벅스의 경쟁자가 된 피츠(Peet’s) 커피 같은 기업들이 주인공이다. 특히 스타벅스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미국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미국의 2세대 커피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1971년 처음 문을 연 스타벅스의 시애틀 매장. 스타벅스의 설립자는 알프레드 피트에게서 커피를 배웠다. (이미지 출처: Starbucks)
스타벅스에 원두를 공급하던 피츠는 직접 커피 전문점을 세웠다. 버클리에 위치한 1호점 (이미지 출처: Peet's Coffee)

하지만 커피 혁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002년을 지나면서 스타벅스처럼 정형화된 대형 체인의 커피가 아닌 ‘스페셜티’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커피 매장의 브랜드보다 어디에서 재배된 커피콩을 어떤 바리스타가 내렸느냐를 따지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커피를 재배하는 농부들에게 얼마나 제대로 이익이 돌아가는지를 확인하는 공정무역(fair trade)을 중시하는 현상도 이 3세대의 특징.

재미있는 건 이런 새로운 흐름이 탄생한 것도 역시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를 중심으로 한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필즈(Philz), 버브(Verve), 블루 보틀(Blue Bottle)은 각각 샌프란시스코, 산타 크루즈, 오클랜드에 본사가 있는 커피 매장으로 국내에서도 커피광들에게는 잘 알려진 ‘성지’ 같은 곳들이다.


그렇다면 블랭크 스트리트 커피는 스타벅스부터 스페셜티 커피까지 다양한 커피 전문점이 넘쳐나는 뉴욕시에서 왜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까? 숫자가 갑자기 늘어서다. 2020년부터 시작해서 뉴욕 곳곳에 파스텔톤의 배경에 검거나 흰 글자로 적힌 BLANK STREET COFFEE라는 간판이 보이기 시작한 거다.

블랭크 스트리트 커피는 뉴욕시의 핫 플레이스에 모여있다. (이미지 출처: Google Maps)-

하지만 맛으로 유명한 건 아니다. 이 커피를 맛본 사람들에 따르면 "good enough" 그러니까 적당한, 마실 만한 커피다. 가격도 적당하다. 16온스, 그러니까 스타벅스 분류로 '그란데' 크기 한 잔에 4.25달러로, 스타벅스의 5.50달러, 던킨의 3.75달러의 중간 수준이다. 소리 소문 없이 늘어난 매장에 호기심으로 들어왔던 손님들이 맛도, 가격도 적당하다는 생각에 단골이 된다고 한다.

이런 고객 확보는 이제까지 "차세대 커피"가 더 나은 맛으로 승부하던 방식과 다르다. 왜냐하면 창업자 두 사람이 커피 전문가 출신이 아니라 테크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커피가 "손님이 이제까지 마셔보지 못한 최고의 커피가 될 필요가 없고" 그저 "매일, 하루 두 번 마실 수 있는 아주 좋은 커피"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단다.

(이미지 출처: The New York Times

위에 옮긴 설명에서 '2세대(second wave) 커피'에 해당하는 스타벅스, 피츠 커피 같은 곳이 내세운 매력 중 하나는 집도 아니고 직장도 아닌 '제3의 공간(third place)'이다. 스타벅스의 CEO를 지낸 하워드 슐츠가 이를 강조하기도 했고, 인기 시트콤 '프렌즈'에서 친구들이 모이는 장소 센트럴 퍼크(Central Perk)도 바로 그런 장소였다.

하지만 블랭크 스트리트는 이런 공간이 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내부가 좁아서 손님들이 오래 머무는 장소라기보다는 와서 빨리 커피를 사들고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히 아직 미국에서는 한국만큼 흔하지는 않은 앱을 통한 주문을 장려해서 한 매장 당 두 명의 직원으로 운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블랭크 스트리트가 처음으로 문을 연 2020년은 어차피 손님들이 실내에서 커피를 마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당시 뉴욕의 가게들은 매상이 급락하면서 월세를 내지 못해 줄줄이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 최소의 종업원으로 테이크아웃에 주력하는 작은 매장은 비용 절감에서 대형 유명 매장과 비교가 안 되게 유리했다.

물론 이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사업 아이디어다. 과연 수익이 날 만큼 장사를 잘 할 수 있느냐, 그리고 줄어든 손님들이 그나마 찾아오는 좋은 길목에 가게를 차릴 만큼의 돈이 있느냐일 거다. 블랭크 스트리트는 작년에 타이거 글로벌(Tiger Global) 같은 VC들에게서 6,70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VC를 잘 아는 테크 업계 출신들인 것도 도움이 되었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큰 투자금으로 최첨단의 커피 머신을 사서 매장에 배치했다. 블랭크 스트리트가 사용한다는 에버시스(Eversys)라는 이 에스프레소 메이커의 웹사이트에 가보면 이 머신이 기존의 커피 매장에서 바리스타가 하는 일을 자동화해서 처리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이미지 출처: Eversys)

뉴욕타임즈는 이 메이커의 가격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비슷한 스위스제 에스프레소 메이커의 가격은 약 5만 달러라고 한다. 이 돈이면 뉴욕시에서 바리스타 한 명을 일 년 동안 고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스위스제 머신의 경우 한 시간에 700잔의 에스프레소를 만들 수 있다. 한 설명에 따르면 바리스타가 빨리 일하면 한 시간에 80~90잔을 만들 수 있다고 하니 10배에 가까운 속도로 일할 수 있고, 쉬는 시간도 필요 없다. 사람이 일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산성이다. 블랭크 스트리트 커피가 노리는 틈새가 여기에 있다.

미국은 팬데믹 이후로 일손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워졌고, 모든 업종 중에서도 서비스 업종, 특히 음식점들이 고전 중이다. 인플레이션으로 값을 올리는 대신 양을 줄이는 것을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이라고 한다면, 서비스 업종에서는 적은 일손 때문에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면서 스킴프플레이션(skimpflation)이 일어나고 있다. 블랭크 스트리트 커피는 이렇게 바뀐 환경에서 아예 대단한 서비스를 기대하지 않는 손님들에게 더 발전한 기술을 통해 'good enough'의 커피를 적당한 가격에 제공하면서 틈새를 찾은 거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블랭크 스트리트야말로 5세대(fifth wave) 커피라고 부른단다. 4세대 커피가 (정확하게 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커피콩의 종류와 거래방식, 지속가능성 등의 차별화를 이야기했다면 5세대는 원료가 아닌 서비스 방식, 즉 자동화가 그 핵심에 있다는 것. 세상에 하나뿐인 인생 최고의 커피가 아니라, 로봇이 만들어서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맛을 내는 커피가 뉴욕을 넘어 세계 시장을 휩쓸게 된다면 진정한 5세대 커피라고 할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