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린–혹은 젊은–시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처음 타자를 배우던 때를 기억할 거다. 대부분 처음에는 두 손가락만을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하지만)으로 자판을 두드리다가 속도의 한계를 느껴서, 혹은 부모나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타자를 배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글자와 단어를 하나씩 없애면서 힘들게 배운 결과, 지금은 자판을 보지 않으면 자음이 왼쪽에 있는지, 오른쪽에 있는지도 잠깐 생각해야 할 만큼 손가락은 저절로 자판을 떠다니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컴퓨터에 찍어 넣는다.

한글 타자에 익숙해진 후에는 영문 타자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우리가 한글과 한글 자판에 고마움을 느끼는 때가 바로 영어로 자판을 두드릴 때다. 자음+모음, 혹은 자음+모음+자음으로 구성된 한글은 양손의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오가면서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정작 타자기와 키보드를 탄생시킨 영어는 그렇지 않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자판을 영어로 바꿔서 아래 단어들을 쳐보면 된다:

• puppy, jump, kilo, hill, you, onion, opinion
• start, rest, sad, cast, crew, straw, swear

윗줄의 단어들은 오른손, 아랫줄은 왼손만을 사용하게 되어 한글 타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어색하다. 표준 영문 자판의 배열이 타자에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건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한글 자판처럼 자음, 모음을 분리한 게 아니라서 위의 단어들처럼 한 쪽 손만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잦고, 자주 누르는 키가 반드시 자주 사용하는 손가락에 배정된 것도 아니라서 한글 타자에 비해 손에 무리가 많이 간다.

그런데 이런 비효율성이 의도된 거라는 주장이 있다. 초창기 타자기의 구조를 보면 (아래 사진) '스트라이커(striker)라 불리는 막대들이 하나씩 올라와서 종이를 때리게(=strike) 되어 있는데, 타자를 너무 빠르게 하다 보면 여러 개의 스트라이커가 동시에 한 지점으로 몰려 엉키면서 고장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자판을 일부러 비효율적으로 배치해 빠른 타자가 불가능하게 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고, 그저 영문 자판의 배열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야사(野史)일 가능성이 높다.

영문 키보드를 지칭하는 '쿼티'는 윗줄 왼쪽의 6개 글자를 발음해 만든 이름이다. (이미지 출처: Fine Art America)

더 재미있는 야사도 있다. 타자기가 처음 상업용 제품으로 등장해서 팔리기 시작했을 때 이를 판매하던 세일즈맨들이 고객이 보는 앞에서 타자기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는데, 이들은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지 훈련받은 타자원(기자나 작가가 아니라면 타자는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다)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하는 글자를 찾느라 고생할 게 분명했다는 것. 그래서 타자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TYPEWRITER, 즉 타자기라는 단어를 쉽게 칠 수 있도록 이 단어에 들어가는 글자들을 전부 윗줄에 배치했다는 얘기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 글자들이 모두 윗줄에 있는 건 사실이다.  

대략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부가 좀 길어졌지만, 이 글은 영문 자판에 관한 이야기도, 한글 자판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사실 두 언어는 기계화에 가장 유리한 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언어들이 많다. 기계화가 힘든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키보드 세상에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 중에서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 그리고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글자를 빌려서 사용했던 중국은 어쩌면 기계화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나라다. 지금도 상형문자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은 과연 어떻게 기계화된 입력 장치에 적응했을까?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중국의 자판 입력 시스템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게 된 건 몇 년 전, 팟캐스트로도 잘 알려진 뉴욕 공영라디오 프로그램 '라디오랩(Radiolab)'에서 소개한 우비효과(Wubi Effect)라는 에피소드를 통해서였다. 이걸 이 시점에 오터레터에서 소개하려는 이유는 (아마도 3편이 될)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해지겠지만, 최근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챗GPT를 비롯한 생성(generative) AI가 인류에게 미칠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 글은 이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하고 이해를 위해 원래 내용에 없는 설명을 넣었고, 불필요한 부분은 생략했다. 가령 에피소드의 앞부분에는 우리는 잘 알고 있는 한자가 어떤 글자인지 자세하게 소개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간략하게 넘어가고, 라디오 특유의 구성을 글에 맞게 조금 수정했다.


이 에피소드는 뉴욕 맨해튼의 스타벅스와 홍콩의 스타벅스를 비교하면서 시작한다. 두 곳 모두 사람들이 모여서 노트북과 태블릿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입력 방식을 사용한다. 한 곳은 영어, 다른 곳은 중국어 타자를 한다는 점만 다른 게 아니다. 맨해튼의 스타벅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입력 방식으로 타자를 하고 있지만, 홍콩 사람들은 같은 중국어를 입력하는데도 전부 제각기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우리나라에서 스마트폰 이전에 사용되었던, 그리고 지금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폰에서 사용하고 있는 천지인 자판과 일반 한글 자판을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렇게 서로 다른 입력 방식이 두 개 있다면, 중국에는 무려 50개의 입력 방식이 존재한다. 키보드의 모양을 바꿀 수 있는 스마트폰에서만이 아니라 모양이 일정한 물리적인 쿼티 키보드를 통한 입력 방식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얘기다.

스마트폰 화면 속 천지인 자판(왼쪽)과 일반 한글 자판
사용자가 많지 않지만 세벌식 자판(아래)도 물리적으로 같은 모양의 키보드를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미지 출처: 코딩캣)

한자 폐기론

지금은 한자를 입력하는 방법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때 중국은 기계화된 입력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큰 문제였다.

중국인들이 이 문제를 처음 인식하게 된 것은 중국이 바깥 세상에 눈을 뜨고 현대화를 고민하던 1910년대, 당시 기계식 타자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미국 사무실의 풍경을 목격하면서부터다. 현대적인 기계식 타자기가 일반인들에게 팔리기 시작한 것은 1874년이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사무실에서 쉽게 마주칠 정도로 흔해진 것은 1880년대 중반이었다. 그러니까 20세기 초의 미국의 사무실은 요란한 기계식 타자기 소리로 가득했고, 여전히 손으로 한자를 쓰던 중국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거다.

타자기는 손 글씨에 비해 여러모로 우수했다. 손 글씨는 쓰는 사람마다 달라서 읽기 힘들 때가 많지만, 누가 기록해도 동일한 글씨체가 보장되는 타자기는 사무 현대화의 출발이나 다름없었다. 더 뛰어난 건 속도였다. 당시 빠른 타자원은 손으로 쓰는 것보다 4배나 빨리 글을 쓸 수 있었다. 이를 본 중국인들이 위기감을 느낀 건 당연했다. 단 26자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영어, 혹은 다른 유럽어와 달리 중국어는 기계화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산화를 이끈 마오쩌둥(毛澤東)이 한 때 한자를 완전히 포기하고 알파벳과 같은 형태로 표기법을 바꾸자는 생각을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비효율적인 한자를 고수해서는 서구의 빠른 현대화를 따라잡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역사와 문화의 본질이나 다름 없는 한자를 포기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결국 중국인들은 한자를 버리지 않고 기계화를 추진하려는 고민 끝에 중국식 타자기를 만들어낸다. 26개의 알파벳 대신 무려 2,400개의 활자가 놓인 판이 있고, 레버를 조종해서 그중에서 원하는 글자를 골라 집어내어 종이에 찍고 다시 내려놓는 장치다. 아래 영상에서 작동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만, 타자기라기 보다는 타자기와 활자 인쇄를 적당히 섞은 기계에 가깝다.

이런 물건을 만들어놓고 한자가 기계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자는 종이 위에 예쁘고 읽기 쉽게 찍혔겠지만, 그 속도에서 서구의 알파벳 타자기에 비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자는 폐기될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

진짜 위기는 반세기가 지난 후인 1970년대에 찾아왔다.


'자동 완성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