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세계는 다가올 컴퓨터 시대에 들떠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의 바람이 불기까지는 아직 10년 이상 더 남았을 시점이지만, 훗날 애플의 공동 창업자가 될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을 비롯한 실리콘밸리의 젊은 엔지니어들은 자기 손으로 직접 컴퓨터를 만들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거라고 믿었고, 돌이켜 보면 그런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미국은 학교와 기업, 정부 기관이 가진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넘어 개인용 컴퓨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당시 9억 명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는 고작 3,000대의 컴퓨터밖에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한자였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가 가진 메모리는 몇 바이트(byte)밖에 되지 않았다. 이메일 메시지 하나도 저장할 수 없는 작은 용량이었기 때문에 당시 상업용 컴퓨터로는 70,000자가 넘는 한자를 저장하는 게 불가능했다. 컴퓨터로는 한자를 표기할 방법이 없으니 컴퓨터의 보급률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1980년대 초 컴퓨터 모니터 (이미지 출처: Flickr)

게다가 지금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큰 픽셀(정확하게는 도트)을 갖고 있던 초창기 모니터로 한자를 보여주는 것 자체가 힘들었고, 비슷한 이유로 당시 사용되던 도트 프린터(dot matrix printer)로 인쇄도 할 수 없었다. 특히 프린터의 경우는 물리적인 장벽이 존재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도트 프린터는 '프린트헤드(printhead)'라는 작은 바늘이 여러 개의 점을 찍어 선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 점은 말하자면 종이에 찍힌 픽셀인 셈. 그런데 주어진 공간 안에 획수가 많은 한자를 넣으려면 점이 훨씬 더 작아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늘 자체가 더 가늘어야 하는데, 당시 프린터에 사용되던 프린트헤드보다 더 가늘면 종이에 누르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휘거나 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한자가 넘을 수 있던 물리적인 장벽이었던 셈이다.

이런 장벽 때문에 중국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인구조사를 컴퓨터로 처리하지 못하고 일일이 종이와 펜을 이용했다고 한다. 세계 각국이 컴퓨터를 사용해 발전하는 순간에 한자가 중국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도트 프린터의 원리 (이미지 출처: Wikiwand, PO Tools)

왕용민의 집념

이때, 중국을 구원하는 천재 엔지니어가 등장한다. 왕용민(王永民, Wang Yongmin)이라는 이름의 이 사람은 1943년 중국 허난성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에만 전념했고, 당시 중국의 MIT라고 할 수 있었던 중국과학기술대학교(USTC)에 진학할 때까지 한 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왕용민은 대학교 재학 중에 일어난 문화혁명 때문에 졸업 후 농촌으로 가서 "노동을 통한 사상 재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문화혁명이 종료된 후에는 본업으로 돌아와 국가 방위 연구소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그가 하게 된 연구는 바로 컴퓨터 개발, 정확하게는 컴퓨터를 중국화하는 작업을 맡은 것이다.

그는 그 연구소에 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컴퓨터를 봤다고 한다. 그는 입력기인 키보드를 보고 키가 70여 개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안에 70,0000개나 되는 한자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지'에 대한 그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이 기회에 과감하게 한자를 없애자는 반세기 전의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중국인들 사이에 "결국 컴퓨터가 한자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배하던 그때 왕용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한자는 중국 문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컴퓨터화할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 믿었다. 그는 한자를 화학물질이라는 틀로 생각했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분자들이 존재하지만, 그런 분자를 구성하는 원소는 백여 개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한자는 수만 개라고 해도 그 안에 들어가는 일정 수의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고, 이들의 다양한 조합이 개별 글자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자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분석 작업에 돌입했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는 먼저 한자 1만 개를 골라서 이를 작은 하위 요소들로 나누는 작업을 했다. 한 글자에 들어있는 요소들을 하나씩 분리해서 하나의 카드에 적어 분류하는 작업으로, 가령 강(江)의 경우 삼수변(氵)과 장인 공(工)으로 두 장의 카드로 나누는 식이었다. 그렇게 1만 자에 들어간 요소를 분리하니 만들어진 카드가 12만 장이었다. 고스란히 쌓으면 12미터의 높이가 나오는 방대한 작업을 그와 몇 명의 조수가 해낸 것이다.

당연히 그 안에는 중복이 발생한다. 그렇게 같은 요소들끼리 한데 모았더니 수천 개가 되었고, 이를 공유하는 글자들의 그룹이 만들어졌다. 가령 삼수변이 들어간 江(강), 汁(즙), 液(액), 津(진)이 같은 그룹에 들어가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수천 개의 키가 들어간 키보드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시 각 요소들을 더 쪼갤 수 있는지 살폈다. 그렇게 해서 더 작은 단위로 쪼개진 요소들을 또 분류하고, 그렇게 분류된 요소들 중에 더 쪼갤 수 있는 것을 찾아 또 나눠 분류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런 작업을 무려 5년 동안 반복한 끝에 최종적으로 125개의 핵심 요소를 추려낼 수 있었다. 왕용민은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을 한자의 원소주기율표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입력에 사용할 수 있을까? 아래의 키보드를 보자. 이 키보드가 왕용민이 만든 우비 입력기 (Wubi Input Method, 중국 명칭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오필자형수입법, 五笔字型输入法)다. 각각의 키에는 왕용민이 분류한 한자를 이루는 최소 단위들이 10개 안팎으로 모여있다. 키보드 사용자는 자신이 입력하려는 한자를 머릿속에서 분석해서 각 요소에 해당하는 키보드를 순서대로 치면 컴퓨터는 사용자의 의도를 파악해서 원하는 글자를 만들어내게 된다.

예를 들면, 쉴 휴(休)의 경우는 사람인변(亻)과 나무 목(木)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W와 S를 연이어 치면 화면에 休라는 글자가 뜨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아주 단순한 예이고, 외워야 할 좀 더 많은 규칙이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이 영상에서 설명한다) 이로써 과거에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한자의 컴퓨터 입력이 처음으로 가능해졌다.

우비입력기, 혹은 五笔字型输入法 (이미지 출처: Wikipedia)

우비 입력기는 중국을 현대화로 이끌 혁명적인 업적이었다. 왕용민은 1984년 UN 총회에 초대되어 이 발명을 직접 시연했을 정도이니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가 자판을 두드리자 컴퓨터 화면에 복잡하게 생긴 한자가 등장했고, 이를 본 사람들은 마치 마술을 보는 듯 놀랐다. 일부는 왕용민이 사용한 키보드에 특수 장치가 부착되지는 않았는지 뒤집어서 밑을 확인하기도 했다.

왕용민은 당시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앞에서도 자신의 발명품을 시연하고 설명했다. 후야오방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왕용민 동지, 중국은 한자를 버려야 하는 거 아니오?"라고 물었고, 그 질문에 왕용민은 "아닙니다, 한자는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영어만큼 효율적으로 입력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중국 정부가 주도하던 중국어 개혁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왕용민은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중국의 한자를 지켜낸 것이다. 이제 중국 학생들은 우비 입력기를 익혀야 했고, 컴퓨터를 배우는 것과 우비 입력기를 익히는 건 동의어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낸 줄 알았던 우비 입력기는 사실 문제의 시작이었다.


'자동 완성 ③ 입력기 경쟁'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