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여자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르테미시아는 집안에서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여자아이가—혹은 젊은 여성이—혼자 돌아다니기에 로마는 안전하지 않았고, 그러기에 적절한 공간도 아니었다. (그렇게 조심했던 아르테미시아를 성폭행한 사람이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지금도 미성년자를 상대로 벌어지는 성폭력의 93%가 아는 사람의 범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옮긴이) 아르테미시아는 집안의 장녀였고, 밑으로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12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담당하게 된다.

아르테미시아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글을 읽을 줄 몰랐다가 20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읽고 쓰기를 배웠지만, 완전하지 않아 훗날 그가 남긴 편지에서는 오류가 보인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막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의 재능을 일찍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1612년, 오라치오가 토스카나의 대공녀(Grand Duchess)에게 쓴 편지에는 아르테미시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실력이 뛰어나게 성장해서 또래에서 따라올 학생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도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작품이 본보기가 되었다. 남자아이가 그림을 배운다면 교회나 공공건물을 방문해서 그곳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배웠겠지만, 여자아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만 동네에 있는 교회인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Santa Maria del Popolo)에는 카라바조의 그림 두 점이 있었기 때문에 아르테미시아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장면을 묘사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베드로'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바울이 땅바닥에 누워서 천국의 환상을 목격하는 모습을 담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회심'이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에 있는 카라바지오의 작품들 (이미지 출처: Web Gallery, Wikipedia)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그림 재료와 모델들을 사용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1613년에 그린 '바이올린을 든 젊은 여인 (산타 체칠리아)'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 속 연주자는 옴폭 들어간 턱과 도톰한 뺨을 하고 있고,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바이올린을 든 젊은 여인' (이미지 출처: Detroit Institute of Arts)

아르테미시아는 거울을 통해 자기 모습을 그리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이 종종 아르테미시아처럼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에 도톰한 뺨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그림들을 아르테미시아의 자화상으로 추정한다.

때로는 그의 작품 속 남성 인물의 경우도 여성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2018년에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으로 확인된 작품, '다윗과 골리앗'은 오래도록 바로크 화가 조반니 프란체스코 게리에리(Giovanni Francesco Guerrieri)의 그림이라고 여겨졌다. 뮌헨의 한 경매장에서 11만 9,000달러라는 낮은 가격에 이 그림을 구매한 사람이 보존 전문가에게 맡겨 캔버스를 꼼꼼히 검사하는 과정에서 다윗의 검 손잡이에 숨겨진 아르테미시아의 서명이 발견되면서 작가가 확인된 것이다. 요즘 거래되는 아르테미시아 작품들의 높은 가격을 고려하면 이제 이 그림은 수백만 달러를 호가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3월, 미술 전문 저널인 벌링턴 매거진(The Burlington Magazine)에 기고한 글에서 지아니 파피(Gianni Papi) 교수는 이 그림 속 다윗의 모습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 주인공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당당하고 느긋한 에너지(힘)를 보여준다"라며, 다윗의 얼굴과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에 있는 아르테미시아의 자화상 속 얼굴을 설득력 있게 비교한다.

'다윗과 골리앗'과 '아르테미시아의 자화상.' 왼쪽은 남성의 얼굴이지만 여성인 화가(오른쪽)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미지 출처: The Times, Wikipedia)

내셔널 갤러리의 큐레이터 레티지아 트레베스는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작품 속에서 아르테미시아의 얼굴을 찾아내려 한다면서,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모든 수산나와 유디트에 자기 얼굴을 그려넣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트레베스 큐레이터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가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자기 얼굴이 아니라, 그가 묘사하는 여성의 몸이다. 아버지가 그린 여성과 비교하면 아르테미시아의 그림 속 여성의 몸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알 수 있다는 것.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여성의 젖가슴을 보면 이 화가가 여성의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게 보이죠."

미술사학자 R. 워드 비셀(Ward Bissell)은 1968년에 쓴 유명한 글에서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클레오파트라' (1611~12)에 등장하는 누워있는 여성의 "완전한 관능미(uncompromising sensuality)"를 이야기하며 이 여성(클레오파트라)의 몸은 "거의 동물적"이라는 찬사를 했다. 레티지아 트레베스는 1612년 작품 '다나에'에 등장하는 여성의 누드에 특히 감탄한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뮤지엄에 있는 이 작품(아래 오른쪽)에서 여성의 겨드랑이에 잡히는 주름과 살짝 튀어나온 배의 묘사는 화가가 여성의 몸에서 살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흘러내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클레오파트라'(왼쪽)와 '다나에'는 거의 같은 그림이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Wikipedia)

이는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가 1620년대 초에 같은 주제를 그린 작품, '다나에와 황금 비' 속의 여성의 몸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 게티 뮤지엄에 있는 이 작품에서 침대보의 주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림 속 인물이 덮을 수 있을 듯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다나에 공주의 가슴은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튀어나와 있다. (아래)

오라치오가 그린 '다나에와 황금 비' (이미지 출처: Wikipedia)

성폭행 사건의 이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르테미시아는 안전한 아버지의 화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고스티노 타시의 성폭력을 피하지 못했다. 당시 타시는 잘나가는 화가였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가 타시에게 딸에게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앞의 글에서 언급한 소설 'Blood Water Paint'에서는 아버지가 타시를 통해서 작품을 의뢰받을 기대를 하고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아르테미시아를 아버지의 그런 야망의 피해자로 묘사한다. 성폭력 사건 후에 타시를 공개적으로 고소하기로 한 것도 아르테미시아가 아닌 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오라치오는 그렇게 해서 타시가 자기 딸과 결혼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어서 설명하지만, 성폭행범과 피해자를 결혼시키는 일은 인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일이다—옮긴이)

당시 재판의 기록은 로마의 국립 기록보관소에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기록에는 아르테미시아가 겪은 끔찍한 일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미술사학자 매리 개라드가 1989년에 발간한 책에서 소개한 아르테미시아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타시는 아르테미스를 침실로 밀어 넣고 방문을 잠근 후 아르테미시아를 침대에 밀쳐 눕혔다. 한 손으로 아르테미시아의 젖가슴을 쥔 채 아르테미스가 다리를 모을 수 없도록 자기 무릎을 사이에 넣었고, 아르테미시아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의 머리카락을 쥐고 얼굴을 할퀴며 싸웠고, 타시의 성기를 거칠게 잡다가 성기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성폭행 후 아르테미시아는 방에 있던 칼을 쥐고 타시에게 "나를 모욕했으니(dishonored me) 이걸로 죽이겠어"라고 말했다. 타시는 비웃는 얼굴로 코트를 열며 "그럼 죽여 봐"라고 말했고, 아르테미시아는 그를 향해 칼을 던졌다. 아르테미시아는 사건에 관해 묻는 조사관에게 자기가 던진 칼을 타시가 막았다며, "그러지 않았으면 타시가 큰 상처를 입어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로마의 기록보관소에는 아르테미시아처럼 성폭행당한 여성들의 법정 증언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 기록들을 연구한 요크 대학교의 엘리자베스 S. 코언(Elizabeth S. Cohen) 교수는 당시의 성폭행 사건이 가지는 문화적 함의는 지금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당시는 강간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기보다는 피해자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코언은—비록 아르테미시아의 초기 작품에 그런 분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그를 '분노한 페미니스트의 원형(原型, proto-feminist)'으로 취급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말한다.

17세기 로마 풍경 (화가 미상, 이미지 출처: Media Storehouse)

코언은 17세기 유럽의 여성이 오늘날의 여성들처럼 자기 몸을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corporeal essentialism")했을 것 같지 않다며, "아르테미시아가 재판 중에 자기 몸을 언급할 때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범죄가 저질러진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증언 기록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의 분노는 자신이 폭행당했다는 사실보다 명예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타시는 성폭행 직후 아르테미시아에게 너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아르테미시아는 "그 약속을 듣고 분노가 가라앉았다"라고 증언했고, 그 결혼 약속을 믿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고 했다. 아버지 오라치오가 이 사건을 법정 소송으로 가져간 건 타시(아르테미시아보다 13년 연상이었다—옮긴이)가 자기 딸과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오늘날의 성폭행 재판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법정에서 아르테미시아가 증언한 내용을 보면 그런 재판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어쩌면 변호사를 통해—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듯, 유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 말한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성폭행당했을 경우 거쳐야 했던 대로 조산사(midwife)가 하는 검사를 거쳐 더 이상 처녀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성폭행당한 여성이 자신의 증언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고문을 받아야 했다. 나사를 돌려가며 엄지손가락을 조이는 중세의 고문 도구(thumscrew)와 비슷한 방식으로 손가락을 노끈으로 감싸고 조이면서 사실을 말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손가락이 조여드는 고통 속에서도 아르테미시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입니다, 사실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며 자신의 증언을 번복하지 않았다.

법정 기록을 보면 아르테미시아는 손가락에 고문을 받으며 증언을 하던 중에 가해자 타시를 노려보며 "이게(고문용 노끈) 당신의 청혼 반지입니까? 이게 당신의 약속입니까?"라고 항의한다. 아르테미시아의 강한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손가락을 죄는 고문 기구 썸스크루 (이미지 출처: Wikipedia)

결국 가해자 타시는 유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받은 처벌은 일정 기간 로마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었고 (이런 종류의 유배형 당시 이탈리아에서 흔했다—옮긴이) 타시는 그마저도 무시하고 그냥 로마에 계속 머물렀다. 타시는 아르테미시와 결혼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재판 중에 그가 이미 다른 여성과 결혼한 관계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버지 오라치오는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딸 아르테미시아를 피에란토니오 스티아테시(Pierantonio Stiattesi)는 남성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이름 없는 화가였던 스티아테시는 법정에서 "타시가 내게 자기가 아르테미시아의 순결을 빼앗았다고 털어놨다"고 증언한 오라치오의 친구 조반니 바티스타 스티아테시(Giovanni Battista Stiattesi)의 동생이기도 했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렇게 결혼한 남편의 존재를 사실상 무시하고 살았고, 약 10년 후에 둘은 이혼한다. 스티아테시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 결혼은 아르테미시아가 로마—와 자기의 과거—를 떠날 수 있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아르테미시아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을 이제 아버지에게서 독립된 화가라고 알릴 수 있게 되었고, 결혼한 여성이라는 지위는 그가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자유를 주었다.


'아르테미시아 이해하기 ③'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