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13년 겨울, 결혼과 함께 피렌체에 도착한 아르테미시아는 처음에는 재단사였던 시아버지의 집에 작업실을 차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작업실(스튜디오)을 만들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대형 캔버스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가 아르테미시아의 창의력이 크게 발휘되던 시기로,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들을 여러 점 그렸고,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에 있는 '류트(lute)를 연주하는 자화상'이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이 코시모 2세 데 메디치(Grand Duke Cosimo II de’ Medici)의 주문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코시모 2세의 컬렉션에 포함되었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이 그림에서 인물(아르테미시아)의 얼굴이 얼마나 미묘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졌는지를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현을 연주하고 있는 손에서 드러나는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도 보는 사람의 눈길을 끈다.

아르테미시아 '류트를 연주하는 자화상' (이미지 출처: Wikipedia)

1616년 7월, 아르테미시아는 여성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피렌체의 유명한 '회화 예술 아카데미(Accademia delle Arti del Disegno)' 회원이 된다. 그는 결혼한 여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사회 활동의 자유를 만끽하며 지식인과 음악인,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그중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였다—옮긴이), 르네상스의 대가 미켈란젤로의 조카이자 유명한 시인이었던 '작은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the Younger)'도 있었다. 이 시인은 자기 가문의 저택에서 미켈란젤로를 기념하는 회랑 천장에 들어갈 그림 중 하나를 아르테미시아에게 주문했다.

아르테미시아가 선택한 주제는 '창의성의 우화(Allegory of Inclination)'로, (타고난 성향, 창의력을 의미하는) 여성, 혹은 여신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누드화다. (원작은 누드화였지만, 1680년대에 이 그림이 외설적이라는 항의 때문에 다른 화가가 천을 두른 모습으로 덧칠했다—옮긴이)

'창의성의 우화'를 복원하는 모습 (이미지 출처: Widewalls)

아르테미시아가 (지금은 대표작처럼 여겨지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주제로 한 첫 작품을 완성한 것이 피렌체로 이사했던 시점이다. 이 작품은 현재 나폴리에 있는 카포디몬테 뮤지엄(Capodimonte Museum)에 있는데, 이 버전과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버전에서는 하녀인 아브라(Abra)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힘을 다해 누르고 있는 동안 유디트가 거침없이 그의 목을 자른다.

트레베스 큐레이터는 이 두 작품에서 "아르테미시아가 잘 알려진 전통적인 주제를 가져와 과거에는 시도한 적이 없는 방법으로 여성들에게 힘을 부여했다(empowering the women)"라고 설명한다. (우피치 버전의 경우 지금은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아마도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이유로—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19세기의 미술사가인 애나 브라우넬은 "이 그림을 내가 태워버릴 수 있으면 영광일 것"이라고 했다.)

왼쪽이 나폴리에 소장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오른쪽이 우피치 미술관 버전 (이미지 출처: Wikipedia, Uffizi Galleries)

트레베스는 아르테미시아는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장면을 "여성들이 힘을 합쳐 큰일을 해내는 동지애(sisterhood, 자매애)"로 묘사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대가였던 카라바조가 그린 같은 주제의 그림(아래)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현재 로마의 국립 고전 회화 갤러리(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가 소장하고 있는 카라바조 그림의 경우 그 초점은 공포에 질린 남성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있고, 이 일을 해내는 유디트는 마지못해 칼을 들고 있는 파리한 소녀로 등장한다. 홀로페르네스의 곱슬머리를 쥐었지만, 끔찍하다는 듯 팔을 뻗어 몸을 멀리하고 있는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적장의 머리를 벨 만한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카라바조가 약 1600년에 완성한 같은 주제의 이 그림을 보고 다시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을 보라. (이미지 출처: Wikipedia)

아르테미시아는 1613년부터 1618년까지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렇게 6년 동안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가 그 시기에 대형 작품들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더욱 대단한 업적으로 다가온다.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이 다섯 중 세 명이 아기 때 죽었고, 1615년에 태어난 아이는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1617년에 태어난 딸아이—아르테미시아는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이 아이에게 주었다—만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 계속해서 아이를 잃는 충격—그뿐 아니라 그렇게 연속으로 임신, 출산을 할 때 여성의 몸이 받는 충격—은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아이를 낳은 지 20여 년이 흐른 후 아르테미시아는 스페인의 필리페 4세에게서 '세례 요한의 탄생'이라는, 성경을 주제로 한 작품의 제작을 의뢰받는다. 이 주제는 틴토레토(Tintoretto)부터 무리요(Murillo)까지 많은 대가들이 그렸지만, 아르테미시아의 버전은 아이를 출산하는 방이 어떤 모습인지를 직접 경험한 사람의 눈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조산사 여성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대야에 손을 담그면서 갓난아이를 돌보고 있고, 산모인 엘리자베스는 지치고 창백한 모습으로 어두운 배경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탄생.' 산모는 왼쪽 위에 희미하게 등장한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남성 화가인 틴토레토가 1550년대에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이 묘사하는 여성들은 아르테미시아 그림에 등장하는 일하는 여성들과 다르다. (이미지 출처: Hermitage Museum)

인생 초기에 아르테미시아에게 일어난 일이 워낙 극적이었던 데다가 당시의 기록이 워낙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인생 중후반에 일어난, 덜 극적이고, 상대적으로 덜 기록된 일들은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의 화가로서의 활약이 워낙 엄청났기 때문에, 그가 어릴 때 겪은 성폭행 사건은—현대인들이 아르테미시아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것처럼—아르테미시아가 자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빠르게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성장했고, 이후로 수십 년 동안 그 지위를 유지했다. 물론 때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그렇기 때문에 커미션을 받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르테미시아는 고객들에게 자기가 "카이사르의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화가들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시켰다.)

요즘은 화가들은 작품을 완성한 후에 갤러리를 통해 판매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현대에 들어오면서 생긴 현상이다. 아르테미시아를 비롯해 서양 미술사의 예술가들은 의뢰받은 작품을 만드는 식으로 작업했다. 그런 아르테미시아와 동시대 화가인 렘브란트의 경우 고객이 찾아오면 자기 작품들을 볼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해서 어떤 수준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볼 수 있게 했고, 아내가 가격(커미션)을 흥정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집으로 찾아온 고객이 기다리는 방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일종의 샘플처럼 볼 수 있었다. (이미지 출처: Widewalls)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그렇게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장소에 남긴 작품이 거의 없다. 드문 예가 그가 첫 아이를 낳은 스무 살 때(1613년) 그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만약 당시 교회들이 아르테미시아에게 작업을 맡겼다면 얼마나 뛰어난 작품을 받을 수 있었을지 짐작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아기 예수가 손을 내밀어 엄마의 뺨을 만지려는 순간, 마리아는 행복감에 정신을 잃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아기 예수의 시선은 마리아에게 고정되어 엄마와 강한 애착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렇게 피렌체에서 6년가량을 지낸 아르테미시아는 고향인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시의 1624년 인구조사 기록을 보면 아르테미시아는 남편과 이혼한 상태였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플랑드르나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온 화가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트레베스 큐레이터는 "아르테미시아가 외국 예술가들과 교류한 건 아마도 자신도 로마에서 아웃사이더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시아는 1620년대 말, 그림을 주문할 고객을 찾아 베네치아로 갔고, 1630년에는 나폴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받은 그림 의뢰 중 하나가 당시 나폴리에 머물고 있던 스페인의 왕녀 마리아 안나(Infanta María of Spain)의 주문이었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런 여성 손님들에게 자기가 로마에서 주문한 아름다운 장갑을 선물하며 "고객 관리"를 했다고 한다. 아르테미시아는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폴리를 기반으로 활동했지만, 그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나폴리는 너무 붐비고, 가난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편지에서 나폴리는 "전쟁이 난 것처럼 혼란스럽고, 삶의 질이 나쁘고, 물가도 비싸다"고 불평했다.

이후 20년 동안 아르테미시아는 이탈리아의 귀족은 물론 유럽의 왕실에서 제작 의뢰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토스카나의 군주, 스페인의 필리페 4세, 잉글랜드의 찰스 1세의 컬렉션에 포함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고, 결혼 후 피렌체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그 후 베네치아에 잠시 머물렀고, 남은 인생은 나폴리에서 일했다.

아르테미시아의 말년이 어땠는지, 사망 연도와 사인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은 흥미롭게도 우리가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과 같은 '수산나와 두 노인'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17살 때 그리는 것과 59세에 그리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지막 편 '아르테미시아 이해하기 ④'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