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와 관련한 마지막 기록은 1654년 8월 나폴리에서 그가 미납된 세금을 냈다는 내용이다. 아르테미시아가 세상을 떠난 후 시신은 나폴리의 산 조반니 데이 피오렌티니(San Giovanni dei Fiorentini)에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비석에는 "아르테미시아, 여기 잠들다 (HEIC ARTEMISIA)"라고 단출하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건 이탈리아의 사학자 알레산드로 다 모로나(Alessandro da Morrona)이지만, 그가 1812년에 이 내용을 적었을 때는 이미 비석은 사라진 후였고, 교회는 20세기에 들어 파괴되었다.  

자세한 사망 기록을 확인할 수 없게 된 학자들은 아르테미시아가 흑사병이 나폴리를 휩쓸었던 1656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시 인구의 절반인 15만 명이 죽은 해였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작품은 1652년에 대형 캔버스에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이다. 그가 가장 먼저(17세이던 1610년) 그린 작품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살면서 여러 차례 다시 그렸던 주제다. 1610년에 그린 버전 속 수산나와 마찬가지로 이 마지막 작품 속 수산나도 난간(balustrade)에 앉아있다. 하지만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하늘이 어둡고 침침하다. 무엇보다 마지막 작품 속 수산나는 자신을 보고 있는 두 노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그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 그림은 10여 년 전 멜버른 대학교의 아델리나 모데스티(Adelina Modesti) 교수가 볼로냐의 국립 갤러리(Pinacoteca Nazionale)의 수장고에서—발견 당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찾아냈다. 모데스티 교수는 이 그림을 주제로 한 논문에서 수산나가 왼팔을 들어 올린 것에 주목한다. 수산나는 두 노인이—반투명의 옷감으로 감싼—자기 몸을 바라보는 "남성 시선의 침입"을 들어 올린 왼손으로 돌린다. 하지만 수산나는 노인들의 시선을 막는 게 아니라, 그들의 눈을 똑바로 노려봄으로써 자기 몸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남성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인간(인격체)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아르테미시아가 17세 때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왼쪽), 59세 때인 1652년에 그린 버전 (이미지 출처: Wikipedia, Wikipedia)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아르테미시아를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겪고, 극복한 화가로서보다 자신의 공적인 이미지(public persona)를 능숙하게 관리한 화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르테미시아는 화가로 일하면서 당시에는 극히 드물었던 '여성 화가'라는 위치가 자기의 작품에 어떤 가치를 더해주는지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표현의 형식적인 수준에서 보면 자기 얼굴을 다양한 인물, 심지어 다른 젠더의 모습으로 그림에 넣은 아르테미시아는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년생) 같은 포스트모던 작가의 원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셔먼과 달리 아르테미시아는 동료 여성 예술가가 없다시피 했던 시절에 활동했다.

신디 셔먼의 사진 작품들(아래)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 예외 없이 예술가 자신이다. 문화적 정체성(아이덴티티)이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고 일상적으로 접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실체를 이해하게 도와주는 작가들 중에 니키 리(Nikki S. Lee, 이승희)도 주목할 만한 작가다. 여기에서 리의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리의 작품은 초기에도 그랬지만 근래 들어서 더욱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에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신디 셔먼의 작품들 (이미지 출처: Artlead, Wikipedia, MutualArt)

17세기 초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여성 화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북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페데 갈리치아(Fede Galizia)는 정물과 초상을 주로 그리던 여성 화가였다. 1578년에 태어난 갈리치아는 아르테미시아보다 십여 년 연상이었는데, 아르테미시아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화가였다.

두 여성 모두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19세기 화가 로자 보뇌르(Rosa Bonheur, 1822~1899)는 당시 여성 화가들이 그리지 않은 야외 풍경을 그린 개척자였는데, 그가 화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화가였던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남녀의 성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던 시절에 딸이 자기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을 확인한 아버지들의 지지와 교육이 선구자, 개척자 여성을 만들어낸 예는 아르테미시아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여성 히파티아(360~415)는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그의 아버지 테온이 재능을 알아보고 당시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고 교육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아버지의 뒤를 잇던 그의 철학을 이단 종교 정도로 생각한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히파티아를 잡아 고문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이야기는 이후로 인류 역사에서 무수하게 반복된 패턴의 원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남성 화가들 사이에서 자기가 혼자라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고객, 후원자였던 안토니오 루포(Antonio Ruffo)에게 보낸 편지에서 "작품을 보면 생각이 바뀌지만, 사람들은 화가의 이름이 여자 이름이면 일단 실력을 의심합니다"라고 했고, 작업 중 작품에 대해 "여성이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확신시켰다.

미술사학자 엘리자베스 크로퍼(Elizabeth Cropper)는 2001년에 발표한 글에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가 살던 시대에 화가가 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당대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르테미아 스스로도 자신이 독립적인 여성이며, 세상이 경탄하는 재능을 가졌고, 인류 역사가 영원히 기릴 만한 가치 있는 인물로 생각한 것에 전혀 지나침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라고 썼다. 미술 관련 온라인 블로그들에서는 아르테미시아의 힘과 그가 자신의 실력을 지독할 정도로 강조하며 했던 말들이 그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야기된다.

이제 인터넷에서 아르테미시아는 "badass bitch(좋은 의미에서 '독하고 쎈 년')"으로 인정받는다.

바탕 이미지: 1620년대 중반에 제작된 자화상 (이미지 출처: Linda Montano)

근래 들어 아르테미시아의 도덕적인 측면을 새롭게 보게 하는 연구가 나왔다. 이 연구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를 우리가 흔히 영웅을 보는 시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프란체스코 솔리나스(Francesco Solinas)가 2011년에 발표한 이 연구는 그가 피렌체에서 금융으로 유명한 프레스코발디(Frescobaldi) 집안에서 보관해 온 자료를 뒤지다가 발견한 아르테미시아의 편지 묶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중에는 아르테미시아가 피렌체의 귀족 프란체스코 마리아 마링기(Francesco Maria Maringhi)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었는데, 편지 내용에 따르면 아르테미시아는 20대 중반 어느 한때 마링기와 뜨거운 연애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시점은 아르테미시아가 결혼 생활 5년 차에 들어선 때였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가 2020년에 개최한 아르테미시아 전시회에 이들 편지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솔리나스는 전시회 도록에 이 편지와 관련한 글을 썼다. 그 편지들에서 아르테미스의 "열정적이고, 모험적이고, 자유분방(libertine)하기까지 한 삶의 방식이 드러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편지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마링기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영어 번역으로는 my dearest heart)"라고 썼고, 다른 편지에서는 마링기가 보낸 편지 내용이 두 줄밖에 되지 않는다고 나무라면서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편지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썼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마링기가 갖고 있는 아르테미시아의 자화상을 언급하면서 그 그림을 보면서 자위행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슬프게도 그게 어느 자화상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같은 편지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마링기에게 "당신의 오른손" 외에는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면서, 마링기의 손은 "내가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것을 갖고 있어서 무척 부럽다"라고 썼다.

프랑스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최근에야 발견된 아르테미시아의 1620년대 초반 작품 '황홀경에 빠진 막달라 마리아' 속 인물은 관능적인 자세로 뒤로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고개를 젖힌 여성의 얼굴은 턱 쪽으로 빛을 받고 있고, 입고 있는 슈미즈가 흘러내리며 풍성한 어깨가 드러난다. 제목대로 해석하면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종교적인 환상(ecstasy)에 빠진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사실 이 그림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에로틱한 작품이다. 깍지 낀 손가락은 미동도 보이지 않지만, 얼굴에 아주 미묘하게 비치는 미소는 손가락과는 다른 감정을 보여준다.

아르테미시아는 여성의 성적 즐거움(sensuality)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황홀경에 빠진 막달라 마리아' (이미지 출처: Wikipedia)
기도, 혹은 종교적 명상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 경험(ecstasy)을 현대적 의미의 엑스터시, 혹은 성적 엑스터시와 섞어서 사용하는 게 신성 모독적인 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아르테미시아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탈리아의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작품들은 이를 훨씬 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작품이 교회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예술가들이 엄격한 통제를 교묘하게 피했다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여성의 성적 감정이 지금과 달랐던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성적 흥분은 중세의 종교적 엑스터시와 완전히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이 신비한 경험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엄격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 흥미로운 건 프레스코발디 가문이 보관하고 있는 편지들 중에 아르테미시아의 남편 스티아테시가 마링기에게 쓴 편지도 있다는 사실이다. 내용을 보면 스티아테시는 아내와 마링기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마링기가 아내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 편지에서 스티아테시는 아르테미시아가 직접 답장을 쓸 시간을 내지 못해 자기가 대신 쓴다면서, 집에 추기경과 귀족들이 계속 찾아오는 바람에 아르테미시아는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 만큼 바쁘다고 이야기한다.

솔리나스는 아르테미시아가 "엄청난 용기를 가졌을 뿐 아니라, (편지 내용에서 보는 것처럼) 남들의 시선이나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야망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미술사학자들은 아르테미시아의 편지—그리고 성폭행 재판 중에 했던 증언—에서 볼 수 있는 아르테미시아의 에너지와 열정이 그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바로 그 에너지임을 알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아르테미시아의 명성이 높아진 건 그가 그린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그림('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다. 적장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는 오래된 주제를 새롭게 해석한 아르테미시아의 그림들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아이콘이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수산나와 두 노인'이라는 주제를 다르게 접근한 작품들은 힘이 없는 여성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강력한 교훈이 되었다.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수산나는 두 노인의 강간 위협에 응하지 않고, 그 후에 노인들이 수산나가 남성과 사랑을 나눴다고 거짓 고발하자 이에 맞서 법정에서 싸워 그들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림을 통해 들려주는 이런 저항의 이야기는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학계에서 아르테미시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린 다소 조용한 그림 한 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1630년대 말, 아버지가 궁정 화가로 일하고 있던 영국을 방문해서 몇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의 왕실 컬렉션에 들어간 작품 중 '회화의 알레고리로 등장한 자화상 (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은 흔히 "라 피투라(La Pittura, 그림을 여성형으로 칭한 표현)"라는 애칭으로 불리는데,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전통적으로 알레고리(allegory, 우화. 숨겨진 의미를 가진 이야기나 그림) 속 인물로 여성을 사용한다.

2020년 내셔널 갤러리 전시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그림 속 여성은 숱이 많고 헝클어진 머리에 통통한 뺨을 하고 있다. 갈색 앞치마를 허리에 동여맸고, 실크 드레스의 굽이치는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이 여성, 아르테미시아는 전형적인 초상화에서처럼 화면 밖을 바라보는 대신 캔버스를 보면서 한 손에는 팔레트를, 다른 손에는 붓을 들고 있다. 상체를 앞으로 숙인 아르테미시아는 우아한 자세가 아닌, 경험 많은 예술가의 능숙함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아르테미시아는 자기가 일하는 사실적인 모습과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추구했던 장르인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여성을 하나로 결합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남성 화가 중에는 이렇게 영리한 시각적 이중성을 시도한 사람이 없다.

이 그림 속 아르테미시아는 직업적 성취를 이룬 독창적인 예술가,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며 몰두한 여성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 이거다. 🦦

'회화의 알레고리로 등장한 자화상' (이미지 출처: Royal Collection Tr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