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예술의 창작은 대부분 남성들이 독차지했다. 흔히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묘사되는 뮤즈(Muse)는 그리스 신화의 여신이고, 남성 화가, 예술가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고 싶은 여성을 뮤즈라 부르는 일이 흔했다. 그렇다고 여성 예술가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여성이 초충도(草蟲圖)와 화조도(花鳥圖)를 그렸던 것처럼, 유럽의 미술사에서도 몇 안 되는 여성 화가는 예술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주제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

간혹 그런 제약에서 벗어난 여성 예술가들이 있었지만, 또 다른 제약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받는 불이익의 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그런 어려움을 뚫고 자기 실력으로 예술가로 성공한 후에도 관객은 여성의 작품을 남성과는 다른 눈으로 해석하려 하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아메리칸 픽션'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특정한 틀로 이해하려는 주류 백인사회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 예술가의 작품을 그의 여성성과 분리해야 이해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예술가의 여성성을 이해하면서도 "만든 사람이 여자니까"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이차원적인 이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꽤 추상적이고 복잡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아주 좋은 예가 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는 바로크 시대에 이름을 날린 뛰어난 여성 화가이지만, 사후에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 다시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18세 때 성폭행을 당한 일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해석하곤 한다. 아래의 글은 2020년 런던에서 열린 전시회를 앞두고 나온 아르테미시아의 인생과 작품 세계에 관한 기사로, 이 화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 우리가 여성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해석하는 방법을 쉽고 흥미롭게 설명한다.

제목은 'A Fuller Picture of Artemisia Gentileschi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더 완전한 모습)'이다.


기독교 성경 다니엘서(Book of Daniel)에 나오는 '수산나와 두 노인(Susana and Elders)'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 특히 16, 17세기에 꽤 인기 있는 주제였다. 그림의 내용을 보면 왜 인기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답고 음전한 젊은 여성인 수산나가 자기 집 정원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두 명의 노인이 훔쳐보는 장면이다. 노인들은 수산나에게 다가가 강간할 의사를 보이며 순순히 말을 따르라고 한다. 반항할 경우 수산나가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소문을 내어 행실이 나쁜 여자로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이야기가 이렇다 보니 화가들에게는 자기가 가진 관음증(voyeurism)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핑계가 된다.

가령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틴토레토(Tintoretto)의 경우 이 이야기로 몇 작품을 만들었다. 그중 1550년대에 그려진 그림 하나는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이 그림 속에서 수산나는 고요하고 추상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수산나는 수건으로 발의 물기를 닦으면서 거울을 보고 있고, 대머리의 노인이 장미 덩굴 뒤에 숨어서 자기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틴토레도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 (1556, 이미지 출처: Wikipedia)

약 50년 뒤에 루벤스(Rubens)가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은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전시 중인데, 이 작품의 경우 수산나는 두 남자가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옷으로 몸을 황급히 가리려 한다. 작품에 따라서는 노인들의 위협이 더 구체적이어서, 루도비코 카라치(Ludovico Carracci, 1555~1619)가 그린 작품에서는 한 노인이 수산나의 옷을 잡아당겨서 몸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의 경우 아예 관객을 음흉한 일에 끌어들여 참여시킨다. 체사리의 작품(아래 오른쪽) 속 수산나는 유혹적인 눈길로 우리(관객)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머리를 빗고 있다.

왼쪽부터 루벤스, 루도비코 카라치, 주세페 체사리가 그린 '수산나와 두 노인' (이미지 출처: Wikipedia, National Gallery, Arthive)

하지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가 그리는 수산나는 아주 다르다. 1593년 로마에서 태어난 아르테미시아는 17살이 되던 1610년에 '수산나와 두 노인'을 그렸다. 그의 버전에서 두 노인은 대리석으로 된 난간 뒤에서 나타나 목욕 중인 수산나를 위협한다. 수산나는 미약하게나마 자신을 방어하려는 듯 두 남자를 향해 손을 들고, 몸과 머리는 두 사람에게서 떨어지려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수산나가 다른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 속 수산나는 이 남자들이 자기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괴로워하는 자기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그림이 가진 구성과 완성도, 그리고 등장인물에 관한 심리적 통찰은 십 대 소녀가 그린 그림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뛰어나다. 미술사학자 매리 개라드(Mary Garrard)는 1989년에 발간한 책 'Artemisia Gentileschi: The Image of the Female Hero in Italian Baroque Art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 속 여성 히어로의 이미지)'에서 이 작품이 가진 미술사적 의미를 이야기하며, 성적 약탈(sexual predation)이라는 주제가 처음으로 피해자(여성)의 관점으로 묘사된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이 그림과 뒤이은 작품들을 통해 아르테미시아는 성적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을 예술의 주제로 승화시켰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수산나와 두 노인' (이미지 출처: Wikipedia

아르테미시아는 서양 미술사에서 화가로서 성공한 최초의 여성들 중 한 명으로, 생전에 유럽 다른 나라에까지 명성이 퍼졌지만, 사후에는 인기가 쇠퇴했다. 이는 유행이 바뀐 탓도 있다. 사람들이 좀 더 고전적인 양식의 그림을 선호하면서 아르테미시아의 자연스러운 묘사는 인기가 시들었기 때문이다.

한 때 인기를 끌던 화가가 대중의 취향이 바뀌면서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 일은 흔하게 일어난다. 렘브란트의 경우는 젊은 시절에 네덜란드에서 큰 환영을 받다가 말년에는 인기를 잃었다. 우리는 렘브란트를 17세기를 대표하는 대가로 생각하지만, 그의 그림이 재조명을 받고 다시 인기를 얻기까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긴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17세기의 학자들은 아르테미시아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아르테미시아가 언급된다 해도 아버지 오라치오 젠틀레스키(Orazio Gentileschi, 1563~1639)를 이야기할 때 곁다리로 등장했다. 오라치오 젠틀레스키는 역사, 신화를 묘사한 그림을 주로 그렸고, 그런 그림들이 인기를 끌던 당시 아주 유명한 화가였다. (젠틀레스키라는 이름은 아버지를 가리킬 때 사용했고, 딸은 아르테미시아로 표기하는 게 학계의 관행이다.)

미술사가들이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에 그나마 관심을 준 건 20세기 초였다.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가 아르테미시아가 "이탈리아의 여성 (화가) 중에서 유일하게 회화를 이해한 사람"이라며  "색채와 임파스토 기법 등 회화의 주요 요소들을 알고 있었다"는 마지못한 인정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비로소 미술사에서 아르테미시아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1976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에서 열린—그리고 이듬해 뉴욕 브루클린 뮤지엄에서도 개최된—기념비적인 전시회 '여성 화가들: 1550-1950'에 아르테미시아의 작품들이 등장한 것이 그 계기였다. 미술사가인 앤 서덜랜드(Ann Sutherland)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큐레이션을 담당한 이 전시회에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은 1610년 작 '수산나와 두 노인'을 포함해 대여섯 개가 포함되었다.

린다 노클린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당시 남성 학자들이 대부분이던 미술사학계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며 여성 학자들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특히 그가 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하던 1960, 70년대 미국에서는 여성의 인권운동과 페미니즘이 크게 일어나던 시절이었고, 이런 흐름을 미술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대표하던 학자가 노클린이다. 그의 저서 중에서 '리얼리즘'과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는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처럼 여겨지는 뛰어난 학술적 업적이다. (둘 다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등장하지만, 노클린이 큐레이터로 나선 전시회 중에서도 '여성 화가들: 1550-1950'은 대표적이다. 간혹 미술사에 새로운 조망을 주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사의 한 페이지가 되는 전시회들이 있는데, 이 전시회가 그런 전시회이고, 이 전시회를 통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화가 중 하나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였다.

1977년 브루클린 뮤지엄의 전시회 '여성 화가들: 1550-1950' (이미지 출처: Brooklyn Museum)

아르테미시아의 개별 작품이 뮤지엄에 등장한 건 처음이 아니지만, 그의 여러 작품이 함께 전시회에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 작가의 작품들이 함께 등장할 때 비로소 눈에 띄는 것들이 있고, 이 전시회가 그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이후 2001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회 'Orazio & Aretemisia Gentileschi'에는 아버지의 작품들과 함께 집중 조명을 받았고, 아르테미시아는 바로크 화가 중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하나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2020년에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아르테미시아 회고전이 열려,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과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30여 점의 작품이 한 자리에 모여 전시되기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장이 지연되었던 이 전시회에서는 작품들이 시기에 따라 전시되었고, 무엇보다 아르테미시아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대중에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현재 130점 정도가 되지만, 그중 약 절반 정도가 진짜 그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은 아버지의 작품과 함께 전시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2001년 전시회 (오른쪽 벽에 '수산나와 두 노인'이 보인다), 오른쪽은 2020년 런던의 단독 회고전 (이미지 출처: Semantic Scholar, Salterton Arts Review)

그중에는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성 카타리나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화가의 자화상(아래 그림)도 포함되었는데, 이 작품 속 카타리나/아르테미시아는 관객을 똑바로 바라본다. 자기가 보고 있는 대상에 집중하는 듯 인물의 미간은 힘이 들어가면서 살짝 파여있고, 얇은 터번을 비롯해 디테일이 강조된 옷, 장신구를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최근에 발견된 작품으로, 내셔널 갤러리가 2018년에 450만 달러(약 58억 원)를 주고 사들였다.

이로써 내셔널 갤러리가 소유하게 된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은 21점. 한 여성 화가의 작품으로 가장 많은 숫자다.

'성 카타리나의 모습을 한 자화상' (이미지 출처: National Gallery)

아르테미시아의 작품들을 다시 평가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림에 드러나는 그의 기술, 특히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의 완성도를 재평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를 극적으로 대비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흔히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으로 대표되는데, 카라바조는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 오라치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테미시아가 그림을 배우던 시절에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카라바조가 결투 중에 사람을 죽인 일로 1606년에 로마를 떠나서 살아야 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와 하녀'라는 그림은 1620년대에 완성된 아르테미시아의 대표작 중 하나로 현재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관(Detroit Institute of Arts)이 소장하고 있는데, 아르테미시아가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밝은 빛이 방금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등장인물을 강하게 비추고 있고, 황동 촛대와 벨벳 커튼의 질감은 아르테미시아의 뛰어난 테크닉을 잘 보여준다.

아르테미시아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와 하녀' (1623~1625, 이미지 출처: Wikipedia)

내셔널 갤러리의 아르테미지아 전시회 큐레이션을 담당한 레티지아 트레베스(Letizia Treves)는 아르테미시아는 생전에 루벤스(Rubens)나 반 다이크(Van Dyck)처럼 이름이 유럽 전역에 알려진 화가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르테미시아가 바로크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게 트레베스의 말이다. (다른 거장들과 달리) "아르테미시아의 화풍을 따랐다는 제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아르테미시아가 여성이라는 것과 무관할까? 그 시대에 어떤 남자 화가가 여자의 제자라고 인정했을까?


아르테미시아가 20세기에 다시 미술계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건 그의 삶에 일어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조 못지않게 사건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 아르테미시아는 1611년, 그러니까 '수산나와 두 노인'을 그린 지 1년 후, 아버지 오라치오의 친구인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에게 성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불가피하게 현대인들이 아르테미시아의 작품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로 사용된다.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서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게 화가가 표현하는 분노의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인류 사회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이에 대한 여성의 증언이 여전히 무시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해석을 이해할 수는 있다. 가령 2018년 크리스틴 블라지 포드(Christine Blasey Ford) 교수가 당시 미국 연방 대법관의 후보로 지명된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가 십 대 시절에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캐버노의 대법관 임명을 막지 못했다. 그러자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그림 몇 점 중에서 유난히 잔인한 묘사가 돋보이는 버전(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소장)이 온라인에 많이 공유되며 무수한 댓글을 낳았다.

당시 트위터에서 공유된 아르테미시아의 그림. "오늘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그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그림들을 공유해야 하는 날이다. 자신을 성폭행해서 사회적 평판을 파괴했지만 정작 범인은 처벌을 피한 사실에 대한 분노가 담긴 그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출처: X)

이 그림에는 성경 속 여성 히어로가 근육이 드러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아시리아 제국 장군의 목을 정확하게 겨냥해 자른다.

이 이야기를 읽는 기독교인 중에는 '성경에 그런 얘기가 있나?'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이 이야기가 들어간 '유디트기'는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취급했고, 과거 유럽 회화에서는 모두 성경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에 현대 기독교인에게는 다소 낯선 내용의 그림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정경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구약 사사기 5장에는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전쟁에 패해 달아나는 적장을 숨겨주고 쉬게 한 후에 말뚝을 머리에 박아 죽이는 이야기가 있다.

아르테미시아의 인생은 여러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안나 반티(Anna Banti)의 책 '아르테미시아'다. 안나 반티는 이탈리아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루치아 로프레스티(Lucia Lopresti)의 필명으로, 로프레스티는 위에서 언급한 (20세기 들어 아르테미시아의 작품을 처음 언급한) 로베트토 롱기의 아내였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탁(Susan Sontag)은 2003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반티 소설의 주인공(아르테미시아)이 "수치를 통해 해방된(liberated by disgrace)" 사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프랑스 감독 아녜스 멜레(Agnès Merlet)가 1997년에 발표한 동명의 영화에서는 아르테미시아가 자기를 성폭행한 타시를 은근히 좋아했다는 근거가 의심스러운 주장을 했고, 미국 작가 수저 브릴랜드(Susan Vreeland)가 2002년에 발표한 책에서는 성폭행 사건이 아르테미시아의 캐릭터를 형성하게 되는 트라우마라는 페미니즘의 시각을 충실하게 따랐다. 조이 매컬러(Joy McCullough)의 2018년 소설, 'Blood Water Paint'에서는 아르테미시아가 '수산나와 두 노인'을 그리면서 자기 경험을 대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폭행이 일어난 후에도 같은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옮긴이)

왼쪽부터 반티의 소설, 멜레의 영화, 브릴랜드의 소설, 맥컬러의 소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연구 논문들은 아르테미시아를 작품을 통해 복수하는 성폭력 피해자라는 이차원적이고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화가에 대한 자료가 점점 더 발굴, 연구되면서 아르테미시아는 훨씬 더 다층적인 인물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은 아르테미시아가 자신의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들—성폭행 뿐 아니라,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경험, 연인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야망—을 잘 알고 작품에 활용했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르테미시아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자기에게 작품의 주제에 관한 드문 조망과 권위를 주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소 추상적인 표현처럼 들리겠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옮긴이) 그는 작품 의뢰인에게 자신을 "여성의 영혼에 카이사르(시저)의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지났지만 마치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과 같은 자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런 통찰 때문이다.


'아르테미시아 이해하기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