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짧은 버전이 세계일보의 '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에 두 번에 걸쳐 게재되었습니다.


1. 진품의 가치

올해들어 예술계에서 ‘대체 불가능 토큰(NFT)’이 큰 화제가 되었다. NFT, 즉 Non-Fungible Token은 이더리움이라는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발행하는 암호화된 디지털 자산이다. 예술계에서 NFT의 인기에 흥분하는 이유는 복제되기 쉽고 ‘원본’임을 주장하기 어려웠던 예술작품들을 자산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품의 가치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간혹 뉴스에서 특정 작품 위작 논란을 접하기는 하지만 이는 아주 드문 일이고, 대부분의 유명한 작품은 존재하는 물리적 원본의 정체가 잘 알려져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령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이라는 작품의 원화는 하나뿐이고, 현재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에 있음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마네의 이 작품을 아주 정교한 솜씨로 똑같이 복제했다고 하자. 전문가들이 현미경과 물감의 화학분석을 동원하지 않으면 맨눈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할 만큼 똑같다고 해도 사람들은 위작보다 진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왜일까?

논리적으로만 말해서, 만약 ‘피리 부는 소년’의 가치가 오로지 그 작품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에 있다고 하면, 원작과 (완벽한) 위작 사이에는 가격 차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작품을 현미경과 시약을 동원해서 분석하면서 감상하는 관객은 없기 때문이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는 사실 진품이 아니며, 진품은 안전한 곳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는 항상 나오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앞에 몰려가서 (그 작품이 원작이기를 바라며) 사진을 찍는다. 그들에게는 그런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자신의 눈으로 구분할 수 없어도 원작에 가치를 두는 일은 관객의 논리로 보면 의미없는 일이다.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다.

그러나 투자가치로 본다면 원작을 구분해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특정 자산에 투자하는 사람은 그 자산을 시장에 내놓을 경우 그것을 사게 될 잠재적 구매자의 지불의사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뿐인 진품, 원작을 원한다면 그 작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뿐인 진품, 원작임을 증명해야 자산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복제 가능한 작품이 가진 딜레마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판화다. 똑같은 작품을 사실상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는 이유로 같은 유명작가의 작품이라도 판화의 가격은 낮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방법이 일정 숫자만 찍어낸 후에 판을 부수거나 큰 흠집을 내어 다시 찍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투자가치, 자산의 가치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관객의 가치, 혹은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어리석은 일도 없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원본을 즐길 수 있고, 그래서 판화가 존재하는 건데 순전히 투자, 즉 돈의 논리 때문에 판화의 존재 이유를 무시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2. NFT가 해결한 문제

그런데 투자의 가치 외에도 생각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아티스트가 하는 노동의 대가다. 아티스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한 대가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생활인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판화 원판을 가져가서 무한히 찍어내어 퍼뜨리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작품이 아무리 유명해져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대가가 돌아오지 않게 된다.

우리가 온라인에서 공짜로 쉽게 볼 수 디지털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이 대부분 이런 처지에 있다. 디지털 사본은 원칙적으로 원본과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데이터는 그것이 그림이든, 텍스트든, 음악이든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0과 1이라는 숫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고스란히 복사하면 원본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사본, 즉 또 하나의 원본이 생긴다. 아티스트와 구매자를 연결해서 작품을 판매하는 전통적인 화랑들이 디지털 작품의 판매를 꺼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에 단 하나의 원작만 존재하는 게 아니면 투자의 가치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NFT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해서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디지털 작품 파일 중 하나를 원본이라고 지정하고, 그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도록 블록체인을 통해 보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똑같이 생긴 다른 파일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다. 그저 작가가 원본이라고 지정한 것 자체로 원본의 가치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NFT를 복제하거나 위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스운 건, 그렇다고 해서 NFT가 디지털 예술작품의 파일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NFT 토큰은 특정작품에 관한 정보와 그 작품의 온라인 파일의 위치를 지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 작품의 실제 파일은 어딘가에 있는 인터넷 서버에 존재하고 있다. 즉 특정작품의 NFT는 그 작품의 ‘진품 소유 증명서’일 뿐 그 작품이 아니다. 따라서 NFT 토큰이 가리키는 서버에 있는 그림 파일이 실수로 지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똑같은 작품이 인터넷에서 널려 있으니까 그렇다. 결국 디지털 작품의 NFT를 물리적인 작품에 비유하자면 예술작품의 소유자는 소유했다는 증명서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작품들은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셈이다.

그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물을 수 있다. ‘피리 부는 소년’이라는 유화작품, 즉 물리적인 그림이라면 말이 되지 않지만, 똑같은 복제품이 원작과 전혀 차이 없이 생산될 수 있는 디지털 아트에서는 충분히 말이 되는 얘기고, 그 방법 외에는 소유를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감상하는 대상과 투자의 대상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디지털 작품은 누구나 자신의 컴퓨터로 감상할 수 있다. 따라서 소유자는 소유했다는 증명, 즉 NFT 토큰만 가지면 된다.

사회적 약속: 상호주관적 실재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뒤따른다. 그렇게 작품의 소유를 증명하는 NFT 토큰이 금전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동의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이 “그 작품을 모든 사람이 복사해서 자신의 컴퓨터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데, 그깟 블록체인 증명서가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면 NFT 토큰을 통한 작품 판매는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비플(Beeple) 같은 디지털 아티스트의 작품이 우리 돈으로 수백억원의 가격에 팔리는 것은 충분히 많은 사람이 그 가치에 동의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비플(Beeple)의 작품 'Home Planet'

이런 종류의 가치는 인류사회에 생각보다 흔하다. 가령 현대의 화폐가 그렇다. 우리가 금속 조각, 종잇조각에 불과한 화폐에 일정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단지 모두가 그 물건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금화나 은화와 달리 이렇게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가격이 정해진 화폐를 명목화폐(fiat money)라고 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처럼 사회적 약속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 것들을 ‘상호주관적 실재’라고 부른다. 즉 NFT는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사람들 사이의 약속을 블록체인이라는 신뢰도 높은 장치를 통해 만들어냄으로써 디지털 작품이 과거 유화나 조각 작품들과 다름없는 금전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하나의 픽셀도 차이가 없는 완벽한 복제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으로 지정한 소유권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속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류사회는 종이화폐처럼 현물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 익숙하다. NFT는 그런 작동방식이 디지털 세상에 적용된 최신 버전일 뿐이다.

이런 약속만 끌어낼 수 있다면 굳이 NFT일 필요도 없다. 최근 이탈리아에서는 살바토레 가라우라는 60대의 아티스트가 ‘로 소노(Lo Sono)’라는 조각상을 경매를 통해 우리 돈으로 약 2000만원에 팔았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게 없는 일인데 화제가 된 것은 이 작품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는 이 작품은 “공기와 정신(spirit)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면서 “이 작품은 당신이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이 작품을 구매한 사람은 뭘 산 것일까. 엄밀하게 말하면 아티스트가 서명한 진품 증명서를 산 셈이다. 증명서를 위조할 수는 있지만 경매장에 판매 기록이 남아있고, 이 사실이 큰 뉴스가 되어 세계에 퍼졌으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 작품이 그 사람의 것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만큼 안전한 소유권도 없다. 실체가 있는 작품이라면 손상과 도난을 우려해 많은 안전장치를 유지해야 하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작품이니 훔쳐갈 수도 없다. 만약 진품 증명서를 훔치거나 위조한다고 해도 경매장에 남아있는 기록과 전 세계에 퍼진 판매 뉴스가 남아있으니 “내가 '로 소노'의 소유자”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살바토레 가라우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소유권의 작동방식은 다르지 않다. 블록체인에 기록된 소유권을 바꾸는 것은 세상에 퍼진 모든 뉴스 기사를 전부 바꾸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3.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

하지만 이런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볼 수도 없는 그 예술작품은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가라우의 '로 소노'는 2000만원이었고, 사람들은 NFT를 통해 디지털 작품에 수십억 원의 돈도 마다치 않고 지불하는데, 그런 작품들이 정말 비슷한 가격의 유명 미술관에 걸린 고전 명화들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고전 명화는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예술작품의 가치는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

예술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철학적 문제이기 때문에 답하기 힘들지만, 금전적 가치만을 이야기한다면 쉽게 답할 수 있다. 예술작품의 금전적 가치는 사는 사람이 결정한다. 많은 예술작품이 경매를 통해 팔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화랑에 가면 작가가 요구하는 가격이 붙어있지만 그건 그 작가가 원하는 가격일 뿐이다. 아무도 사지 않으면 그 작품은 아무런 금전적 가치가 없다.

여기에서 비플(Beeple)을 비롯해 NFT로 큰 부자가 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누가 구매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 도대체 수십 수백억 원의 돈을 실제 작품이 아닌 소유 증명에 불과한 NFT를 구매하는 데 썼을까. NFT 구매자들은 전통적인 미술 애호가, 수집가들이 아니라 비트코인 등으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뒤늦게 암호화폐에 투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비트코인 갑부들은 대개 암호화폐의 가치가 아주 낮았던 시절에 사서 가지고 있다가 느닷없이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라서 NFT처럼 위험한 투자에 돈을 쉽게, 함부로 쓸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maximalist)’라고 불리는 이들은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는 강한 확신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갑부가 된 것은 그러한 믿음이 증명된 것이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증명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한 NFT가 붙은 디지털 예술작품을 구매한 것은 블록체인 기술의 가치와 가능성을 널리 알리는 중요한 홍보일 뿐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미래가 밝다면 제일 먼저 그 시장에 들어가서 선점을 하는 게 당연한 투자행위다.

물론 그렇다고 NFT를 통해 판매된 디지털 작품들이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은 이미 온라인에서 상당히 알려진 작가들의 인기 작품들이다. 다만, 그렇다 해도 그 작품들이 18, 19세기 미술사의 거장들의 작품과 같은 금전적인 가치가 있느냐를 묻는다면 “비트코인으로 돈을 번 젊은 갑부들 외의 수집가들도 그 작품을 구매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할 수 없다.

왠지 낯익은 미래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다. 미술사에서 유명한 예가 미국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팝아트(Pop art)다. 1950년대에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1960년대에 이르면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등의 작가들이 1940년대 미국 미술계를 휩쓸었던 잭슨 폴록이나 윌럼 드 쿠닝 같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작가들을 제치고 대중의 시선을 붙잡았다. 팝아트가 워낙 유명한 대중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 탓에 이해하기 어려워서 엘리트주의라는 낙인이 붙었던 추상표현주의에 비해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쉽게 좋아하는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과 마찬가지로 팝아트 역시 쉽고 이해하기 좋다고 해서 금전적인 가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작품들을 큰돈을 주고 사는 수집가가 있어야 한다.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해 미국 미술을 흥행시킨 전설적인 화상(畫商) 레오 카스텔리는 팝아티스트들의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무엇보다 1960년대 이후 뉴욕의 로버트와 에셀 스컬 부부 같은 부자들이 이들의 작품을 대거 사들이면서 팝아트의 금전적 가치를 올려놓았다.

그런데 스컬 부부는 신흥부자였다. 남편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근근이 먹고 살던 사람인데, 부자 아빠를 둔 에셀과 결혼하면서 부자로 살 게 되었다. 하지만 에셀의 아버지도 전통적인 뉴욕의 부자는 아니었고, 뉴욕에서 130대의 택시와 400명의 기사를 거느린 대형 택시 사업을 하면서 부자가 된 인물이다. 부모로 부터 돈과 교양을 물려받아 소위 '상류사회'에 있던 전통적인 예술품 수집가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이런 스컬 부부를 당시 뉴욕의 상류사회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봤는지는 1986년 로버트 스컬(부부는 1975년에 이혼했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즈에 실린 부고 기사를 보면 눈치챌 수 있다.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 인터뷰어가 '사람들이 당신은 투자와 신분상승(social climbing)을 위해 작품을 산다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스컬은 '전부 사실입니다. 저는 신분상승을 위해 다른 걸 사용하기 보다는 예술을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당시 상류사회가 신흥부자들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했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가? 그런데 로버트 스컬의 대답은 그걸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그래, 어쩔래'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런 점에서 참 미국적이고, 참 팝아트적이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은 유명해질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이다).

1986년 1월 3일 뉴욕타임즈 기사

당시 신흥부자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지위상징이 필요했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문화로 차별화를 해야 한다. 20세기 초에 돈을 번 전통적인 갑부들(old money)이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수집하는데 그들을 따라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컬 부부도 처음에는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같은 뉴욕의 잘 나가는 추상주의 작가의 작품들을 모았지만 1965년에 그 작품들을 모두 팔아서 번 돈으로 팝아티스트들을 키웠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팝아트 작품 중 50점을 경매로 내놓아 220만 달러, 지금 가치로 무려 1,3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벌었다. 물론 이 돈의 일부는 다시 새로운 작품들을 사들이는 데 사용되었다.

큰 돈을 번 사람이 그 돈으로 남들이 하는대로 유명한 작품을 사는 대신,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서 투자하고, 그걸 또 되팔아 그들의 가치를 키워주고, 그러는 과정에서 돈도 벌고 "내가 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예술사조도 만들어낸 것이다. 익숙하게 들리지 않는가? NFT를 통해 디지털 아티스트를 키우고 있는 코인부자들의 플레이북이 이거다.

비플을 비롯한 디지털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대중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전적인 우연은 아닐 거다.

가운데가 앤디 워홀, 오른쪽 커플이 스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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