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창의력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고 해서 모든 창작이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단순히 자기만족을 위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비록 창작 활동이 자기의 직업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이들에게 창작은 자기실현의 도구이기도 하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산업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인 노동의 소외(alienation)에서 '노동 과정의 소외'는 노동자가 생산 과정을 주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지시에 따라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작업만을 반복하게 된 결과, 노동이 더 이상 자기실현의 수단이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의 창의력을 사용해서 창작을 할 때 느끼는 즐거움과 만족감은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동자'가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에서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얼마나 될까?

중국의 폭스콘 공장 (이미지 출처: WIRED)

창의력에 대한 집착이 미국적인, 좀 더 정확하게는 미국의 백인 중산층에 국한된 현상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도와 동아시아, 아랍 등 다른 문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자기 자녀가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미국에서 경제적 약자로 출발한 그들에게 더 중요한 가치는 성실과 노력이다.

물론 여기에는 각 이민자 집단이 겪은 진입장벽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지금은 주류로 취급받지만, 아일랜드계 이민자, 유대계 이민자들은 초기에 앵글로 색슨계가 꺼리는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직군이 아니었다.

'The Cult of Creativity (창의력 컬트)'라는 책의 집필을 계획할 때만 해도 1950년대부터 시작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모두 다룰 생각이었다. 그런데 연구를 하다보니 1970, 80년대는 1950, 60년대에 주장하던 창의력의 중요성이 고스란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일까? 냉전 초기에 미국인들이 소련에 대해 가졌던 불안은 미국이 소련을 앞지른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대상만 바뀐 것이다.

"1941년에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지만, 1987년 일본이 진주만을 샀다"라고 말하는 미국의 풍자 만화 (이미지 출처: figal-sensei.org)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일본에게 경제적 추격을 허용한다. 1980년대는 미국인들이 '일본의 경제적 습격'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만큼 일본의 빠른 성장을 목격했고, 그 다음에는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뒤를 따르며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미국인들은 많은 분야에서 미국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보면서 '미국이 저들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고, 1950, 60년대에 소련을 상대로 가졌던 우월감의 근원인 '미국인의 창의력'을 다시 꺼내 든 것이다.

미국은 탈공업화 사회(post-industrial society)로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블루칼라가 아닌 화이트칼라 노동에 집중해야 했고, 이 새로운 노동계급이 질적으로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창의력이 그 답이라고 믿었다. 지식 산업이 중요했고, 연구와 개발, 그리고 과학이 차별화의 핵심이었다. 이런 산업을 통해 미국은 창조 경제(creative economy), 창작 산업(creative industries)이 성장을 주도하는 국가로 도약해야 했다. 미국인의 창의력이 동아시아의 경제 대국들과 경쟁할 수 있는 무기라고 믿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차별화 의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애플 제품에 새겨진 생산지 표시다. 애플은 자사의 제품이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조립(assembled)되었지만,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designed, 설계)되었다고 표시한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제조업을 다른 나라에 빼앗겼을지 몰라도 우리에는 디자인, 디자이너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우리는 창의적인 일(creative work)을 하고 있다"라는 주장이고, 여기에는 민족적인, 그리고 다분히 인종적인 우월감마저 묻어난다.


여기까지가 새뮤얼 프랭클린의 생각이다. 하지만 글을 끝내기 전에 다소 사족 같아도 이와 관련해서 내가 오래전 대학원 시절에 겪은 일을 하나 소개할까 한다. 왜냐하면 독자에 따라서는 캘리포니아의 디자인과 중국, 베트남, 인도의 조립 노동을 밝히는 것에서 인종주의적인 느낌까지 읽어내는 건 조금 지나친 해석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저자의 생각을 두둔한다기보다는 그의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술사 대학원 세미나 시간이었다. 십여 명이 참여하는 이 수업에서 아시아계는 나 혼자 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업 중에 아시아 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레 나에게 발언권이 돌아오곤 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과 일본의 문화로 화제가 흘렀고, 내가 한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발언을 했는데, 한 백인 학생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South Korea) 사회, 혹은 문화에 공산주의적인 요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교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한국이야말로 극도로 자본주의적인 국가인데"라고 반박했다.

한국과 공산주의를 연결하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교수의 반박을 받은 그 학생이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가 왜 그런 착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와 개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이나 일본 같은 사회는 뭔가 분명히 다른데, 그걸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해 '공산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 거였다.

1958년 학생의 날 행사 사진 (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그 친구의 생각을 이해하게 된 나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다. 미국인과 비교하면 좀 더 집단적인(collective) 사고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설명을 했다. 지금 같으면 다른 표현을 사용했겠지만, 당시 나의 어휘력으로는 그게 전부였고, 그 강의실에 있던 미국인들은 내가 하려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지 않았다. 설명한답시고 선택한 단어가 공산주의 사회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collective라는 단어였으니 더욱 혼란스럽게 느꼈던 게 분명하다.

내가 그때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했어야 하는 단어는 'conformity'였다. 첫 글에서도 언급한 이 단어는 '순응'이라고도 번역하지만,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건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유난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인 것이 사실이지만, 유럽이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미국만큼 conformity를 싫어하는 나라를 찾기 힘들다. 대부분 사회에서는, 아니 미국에서도 conformity가 사회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미국인들은 이를 내놓고 싫어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앞의 글에서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1950년대 당시 창의적이라고 생각한 작가, 건축가, 수학자들을 데려다가 며칠 동안 심리 검사를 하면서 그들의 창의력을 측정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당시 자료를 살펴본 기사에 따르면 심리학자들이 중요하게 살펴본 검사가 'Conformity Test (순응도 검사)'였다. 옆에서 같은 검사를 받은 다른 참가자가 작성하는 답을 볼 수 있게 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지를 본 거다. 측정 결과, "창의적인 사람들은 대다수의 생각과 행동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창의력을 상식과 대세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한다. 스티브 잡스가 몇 달 동안 오렌지만 먹고 살아도, 신발을 신지 않고 출퇴근하면서 발이 더러워지면 변기에서 발을 씻어도 (둘 다 그의 전기에 나오는 일화다) 그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데는 1950년대 이후로 형성된 미국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음모론자들이 유난히 많은 나라가 되었지만,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는 기업이 가장 많은 나라인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