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의 짧은 역사 ②
• 댓글 남기기미국 심리학회의 관심
미국에서 '창의력'이라는 것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열심히 알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심리학자들과 경영론자들, 기업의 연구·개발(R&D) 팀, 광고업계 사람들, 그리고 교육 심리학을 연구하던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J.P. 길포드(Guilford)라는 심리학자의 역할은 특히 눈에 띈다.
길포드는 미국 심리학회(APA,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의 학회장이던 1950년, APA 연례 컨퍼런스 자리에서 "Creativity"라는 제목의 발표를 하면서 미국 심리학회가 창의력을 연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창의력이라는 주제는 심리학자들이 연구하기를 꺼려왔다면서, 사회에 더 많은 혁신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심리학자들이 창의력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사고 기계(thinking machine)"인 컴퓨터가 발전하고 있고, 머지않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업무가 자동화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이제 인간에게 남은 것은 창의적 사고(creative thinking)이라고 했다. 창의력은 인간만이 가진 것으로,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심리학자들이 창의력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창의력이라는 게 신비롭고, 낭만적이기까지 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길포드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창의력은 특별한 천재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 혹은 측정하거나 연구를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해 연구하자고 했다.
이런 그의 접근법에는 그가 계량심리학자(psychometrician)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계량심리학은 당시 심리학의 하위분야로, 계량심리학자들은 아이큐(IQ) 검사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의 인지 능력을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길포드가 보기에는 세상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검사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이큐 검사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능력을 측정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천재, 즉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original thinkers), 당시 미국 사회가 필요로 하던 사람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창의력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이고, 어떤 것이 창의적 결과물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성격 측정 연구소(IPAR, Institute for Personality Assessment and Research)가 바로 그 작업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 창의적인 사람들로 여겨지던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과 폴 루돌프(Paul Rudolph), 작가인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그리고 유명한 수학자 등을 연구소로 초청해 며칠에 걸쳐 아이큐 검사, 확산적 사고 검사, 로르샤흐 검사 등 각종 심리 검사를 진행했다. 이들은 이런 검사를 통해 창의력의 본질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자들이 생각하는 창의력이 조금씩 다를 뿐 아니라, 모두가 동의하는 같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준을 통일하기 힘들다 보니 서로 다른 연구가 같은 창의력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고, 그렇게 1950년대를 지나면서 심리학회 내부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64년, 새로운 APA 학회장이 창의력 연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학술적 연구에 관한 관심은 줄어들게 된다.
브레인스토밍의 탄생
미국에서 1968년 이후에 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이라면 학교에서 한 번쯤 봤을 다큐멘터리가 있다. 'Why Man Creates (인간은 왜 창조하는가)'라는 제목의 25분짜리 영상으로, 석기시대부터 시작해서, 청동기시대, 중세를 거쳐, 프로이트와 다윈도 소개한다. 이 영상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독특함, 개성을 알리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그게 창의력이 작동하는 근본 원리라는 것.
그런데 이 영상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서 전국에 배포했을까?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본사가 있던 카이저 알루미늄(Kaiser Aluminum)이라는 회사가 제작비를 댔다. 쟁반부터 비행기 동체까지, 다양한 알루미늄 제품을 만들던 회사가 왜 창의력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후원했을까?
저자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카이저 알루미늄을 설립한 헨리 J. 카이저(1882~1967)는 조금 특별한 사업가였다. 건설업을 하면서 후버댐 건설에 참여했고, 조선업에 뛰어들어 2차 세계 대전 때 군함을 만들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알루미늄과 철강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자기 회사의 직원과 가족이 이용할 수 있는 카이저 퍼머넨테(Kaiser Permanente) 병원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의료법인이 되었고, 카이저 패밀리 재단은 의료 관련 정보로 공신력을 인정받는다.
기업들은 창의력이 문학과 예술 분야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소비사회, 심지어 군산복합체 사회에서도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업들의 관심은 196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게 아니라, 심리학자들이 창의력을 연구하던 1950년대에 이미 등장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 소비자의 지갑을 열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끌어낼 방법은 창의력의 증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의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새로운 제품, 서비스의 개발이라는 실질적인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낸 방법론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다. 지금은 기업은 물론이고, 초중생들도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브레인스토밍이 퍼지기 시작한 것 역시 1950년대다.
그리고 이 방법론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은 알렉스 오스본(Alex F. Osborne).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세계적인 광고회사 BBDO에서 'O'가 이 사람의 이름이다.
오스본은 새로운 광고 문구, 슬로건을 도출하거나 새로운 마케팅 방법을 찾을 때 이를 사용했다. 방법은 우리가 아는 것 그대로다.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은 후,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하고, 비서 한 명이 방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를 모두 받아 적게 하는 것이다.
브레인스토밍에서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비판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지적을 받는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게 된다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지 못할 수 있어서다. 또 중요한 것은 사내 직위와 상관없이 다양한 직원을 불러야 한다는 점이다.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서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앞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창의력은 특정 천재에게만 있는 게 아니며, 모든 사람이 창의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원칙인 셈이다. 그렇게 브레인스토밍을 거친 후에 받아 적은 내용이 많을수록 성공적인 세션으로 평가받았고, 사내 임원, 중진은 이 결과물에서 쓸 만한 내용이 있는지 뒤졌다.
오스본은 브레이스토밍이 기업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모든 조직에 유용하다고 믿었다.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 뿐 아니라 모두가 창의력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가진 창의력의 고삐를 푸는 제일 좋은 방법이 브레인스토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의 가치
하지만 정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아이디어도 가치가 있을까? 그들의 "창의력"이 정말로 도움이 되는 걸까? 우리가 창의적인 천재들을 숭배하는 건 그들의 아이디어가 일반인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 아닐까?
물론 세상에는 창의력이 뛰어난 천재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창의력에 대한 강조는 바로 그런 '천재들만이 창의력을 갖고 있다'라는 생각을 깨고, "창의력의 민주화"를 끌어내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소수의 천재가 가진 아이디어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를 끌어내려는 것이 바로 창의력 열풍의 본질이다. 즉, 창의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종의 원자재(commodity)가 된 셈이다.
1950년대 브레인스토밍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까지 이어지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창의적일 수 있는 사람들이며, 단지 아이디어를 꺼내는 방법만 알면 될 뿐이라는 격려다.
물론 그렇게 제출한 아이디어는 기업의 소유가 되는 것이지, 직원이 지식재산권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논리로 작동한다. 기업이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창의력의 짧은 역사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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