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은 대법원 ② 처마에 달린 닭고기
• 댓글 남기기나는 미국에 건너와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중서부에 위치한 이 대학교에는 가족이 있는 대학원생들을 위한 아파트 단지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워낙 단지가 크고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학생과 가족이 많아서 학교에서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학생들 중에서 레지던트 매니저, 즉 일종의 관리인을 선발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학교 입장에서는 문화적인 갈등을 조율하고, 일종의 자치를 허용하고, 운영비를 절약하려는 일석삼조의 취지였던 것 같다.
매니저의 대단한 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야간, 혹은 당직(이라기보다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비상용 휴대폰을 들고 있게 하는 거다)을 서고 가끔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하면 아파트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약간의 월급까지 주는 좋은 자리였다. 나는 운 좋게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간혹 해결하기 힘든 주민 간의 갈등을 중재해야 했다. 중동지역부터 유럽, 아프리카 동아시아까지 다양한 문화가 섞이면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다양한 오해와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결해야 했던 문제 중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주말 오후에 당직 휴대폰을 옆에 두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렸다. 오래된 일이라 전화를 한 사람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랍계, 혹은 인도계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옆집에서 닭을 현관에 매달아 두고 있는데 보기에 흉하고 위생상 좋지도 않으니 좀 치우라고 말해달라"는 거였다.
현관에 닭을? 열심히 설명하는데 전화로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어서 문제의 장소로 직접 갔다. 가봤더니 좀 충격적이었다. 이 학생의 가족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중국계 학생 가족이 있는데, 생닭을 부위별로 잘라서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 처마를 빙 돌아가며 줄줄이 걸어놓고 있었다.
문제의 집 벨을 누르고 거주자와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대학원생은 학교에 갔고, 중국에서 금방 온 듯한 할머니(아마 학생의 어머니)가 아주 어린 손녀와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영어로는 대화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눈치를 보니 이 할머니가 살던 곳에서는 그렇게 생닭을 잘라 밖에 걸어 건조하는 풍습이 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처마 밑에 메주를 걸어 건조했고,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소시지와 햄을 널어놓고 건조해 파는 가게들이 있으니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저런 환경에서 생닭을 걸어놓으면 파리가 꼬이는 등 위생상 좋지 않았지만 일단 혐오스럽다. 미국 중서부 대학교는 그 할머니가 자랐을 중국 농촌이 아니다. 나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자녀가 돌아오면 건네주라고 쪽지를 남기기로 했다. 문제는..
그렇게 닭을 현관에 걸어두면 안 되는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제재의 근거
나는 닭고기에 파리가 붙어서 위생상 좋지 않고, 다른 집들에서 보기 흉하다고 항의하니 치워달라는 정도의 메모를 남기고 돌아왔고, 그뒤로는 별 다른 항의가 들어오지 않은 걸로 보아 무난히 해결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일이 지금도 기억나는 이유는 그 학생 가정이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생닭을 현관에 걸어 건조하겠다고 했다면 학교는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해본 탓이다.
물론 아파트 단지에는 거주자들은 집 주변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걸 확대하면 생닭을 토막 내어 밖에 걸면 안 된다고 '해석'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단지의 규정에 따르면 아파트에서는 자전거 거치대가 아닌 곳에 자전거를 세울 수 없다는 규칙이 있지만 (위 사진에서도 보듯) 대부분 지키지 않고, 아파트에서는 이를 심하게 단속하지 않고 눈감아 준다. 그럼 현관에 걸린 생닭에만 철저하게 룰을 적용할 수 있을까?
(내 상상 속) 문제의 핵심은 대학원 아파트에서 그 사안을 정확하게 명시한 규정을 갖고 있을 리 없다는 데 있었다. 자전거에 대한 규정은 워낙 많은 주민들이 자전거를 타기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이고, 평일에는 밤 10시, 주말에는 12시 이후는 음악을 크게 틀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 역시 파티를 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만들어졌을 게 분명했다. 즉, 특정 행위가 그 사회에 만연할 때 관련 규정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생닭의 부위를 잘라 현관에 걸어두는 행위는 미국 중서부 대학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규제할 수 있을까? 규제한다면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까?
관련 규정을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가령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금한다"는 규정이 있다면 생닭을 걸어두는 것을 혐오감을 일으키는 행위로 유권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중국계 학생이 학교 아파트 측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가령 그 학생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미국 학생들은 아파트 밖에서 주말에 바비큐를 한다. 거기에는 햄, 소시지뿐 아니라 닭고기도 올라간다. 즉, 닭을 조리하는 행위는 허용된다. 우리 문화에서 닭을 건조하는 것도 일종의 조리과정이다. 왜 우리 문화만 혐오스럽다고 치부하며 단속하는가? 이건 문화적 차별이다."
따라서 아파트 측에서는 이런 접근을 피하고 위생문제를 사용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물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몰려왔는지 증명해야 할 것이고, 아마도 주마다 가지고 있는 식품위생법을 동원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식품위생법이 판매하지 않고 개인이 먹는 음식에도 개입할 수 있을까? 수천 년을 이어져온 고기 건조방식을 제재할 수 있을까?
프라이버시와 자유의 의미
임신 중지와 무관한 생닭 건조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그 학생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다. 이런 모호한 '자유'를 보호하거나 제한하는 일은 몹시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헌법이 명시한 '언론의 자유,' '주거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같은 중요한 권리를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법이 모든 자유를 나열할 수는 없다. 그럼 헌법이 명시하지 않은 것들은 금지된 것으로 봐야 할까?
그렇지 않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원칙적으로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인정한다. 개인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혼자 무엇을 하든지 국가나 지방정부/자치단체가 간섭할 수 없는 포괄적인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미국법에서는 이를 프라이버시(privacy)라 부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프라이버시는 "개인의 사생활, 사적인 일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을 권리"이지만, 이는 미국법에서 규정하는 프라이버시(right to privacy)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럼 나머지는 뭘까?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와 결정에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다. 이는 나의 사적인 일과 결정에 국가/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단순한 '개인정보의 보호'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개인의 권리를 일일이 나열하는 대신 포괄적으로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인정해주고, 그걸 제한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국가가 보장해주는 권리를 일일이 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보장인 셈이다.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임신 중지와 동성 간의 성관계, 피임약/기구의 사용을 제한한 미국 각 주의 법을 연방 대법원이 헌법 불일치 판결을 내렸던 (각각 1973년, 2015년, 1965년) 근거가 바로 right to privacy(사생활 보호)라는 헌법 수정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외국인 학생은 자기 아파트 현관에 생닭 부위를 걸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었다. 그걸 제한하려면 분명히 명시된 이유가 필요한 거다. 규정에 "생닭을 걸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을 테니 충분히 이 사안에 적용할 만한 다른 조항을 가져와야 한다. 가져올 수 없으면 제한할 수 없다. 1973년에 나온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임신 중지는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프라이버시'이므로 주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이번 결정도 똑같은 논리를 따르고 있다는 거다.
('선을 넘은 대법원 ③'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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