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혹은 서구에서 사용되는 로마자 알파벳 폰트 중에 역사적으로 특정 문화나 국가, 인종 집단을 대표하게 된 건 완톤 폰트만이 아니다. 아주 다양한 폰트들이 이들 집단을 연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디자인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라이너스 보먼(Linus Boman)은 이렇게 민족, 혹은 문화를 표시하는 에스닉 폰트(ethnic font)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문화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복잡한 문화적 요인들로 인해, 혹은 자주 사용했다는 이유로 특정 그룹을 표시하게 된 폰트들이다.  “아프리카 폰트”라 불리게 된 노일랜드 인라인(Neuland Inline)이나 리토스(Lithos)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로, 이 그룹의 폰트에는 멕시코를 표시하게 된 것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표시하게 된 것도 있다.

노일랜드 인라인은 아프리카나 사파리를 연상시키는 폰트로 사용되지만 아무런 문화적 연관성이 없다.

둘째, 특정 문화나 국가를 떠올리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만든 폰트들도 있다. 현재 사용하는 알파벳과 이들 문화의 문자가 얼마나 비슷한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리스 문자, 키릴 문자를 흉내 낸 폰트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문 폰트들은 실제 그 나라에서 사용되는 문자의 독특한 형태를 모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들 문자는 현대 로마자 알파벳과 말하자면 사촌 관계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만들어냈다고 하기는 힘들다.

고대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이런 폰트는 그리스 알파벳을 흉내냈지만, 문화적 연관성이 없지는 않다.
러시아의 키릴 문자를 흉내낸 영문 알파벳

마지막으로 로마자 알파벳과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타이포그래피의 측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언어들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사용하는 글자 체계(이 세 나라 언어를 흔히 "CJK"라 부른다)는 영어권이 사용하는 26개의 알파벳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문자를 흉내 낸 폰트들은 이들이 흉내 내려는 글자 체계와 가장 거리가 멀다. 따라서 3국의 언어는 모두 시각적으로 흉내내고 했지만, 그중에서도 완톤(찹 수이) 폰트는 유난히 일찍부터 널리 사용되어 클리셰(cliché)가 되었다.

흉내낸 언어가 로마자 알파벳과 형태적으로 얼마나 가까우냐를 봤을 때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CJK)는 거리가 가장 멀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캡처)
완톤 폰트(위)와 비슷한 방식으로 한글 자음을 사용하면 아래("KOREA")와 같은 모양이 나온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완톤 폰트, 찹 수이 폰트는 ‘만다린 폰트’라는 이름으로 1883년 클리블랜드 타이프 파운드리에서 처음 만들어 냈고, 이후에 나온 많은 “중국식” 폰트들이 이 만다린 폰트가 사용한 공식의 변형들이다. 만다린 폰트가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세기 유명한 포스터 디자이너 회사인 베가스태프(Beggarstaffs)가 제작한 ‘A Trip to Chinatown’이라는 포스터. 이 포스터는 벨 에포크 시절의 다양한 포스터들과 함께 ‘The Masters of the Poster’라는 화보집으로 출간되면서 만다린 폰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이 폰트의 대중화를 이끌어 낸 건 중국 음식점의 확산이다.

'A Trip to Chinatown' (이미지 출처: Flickr)

그런데 20세기 초 미국에서 중국 음식점이 확산하는 방식은 꽤 흥미롭다. 당시 미국에 건너온 중국 이민자들은 전통적인 인맥과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새로운 이민자들이 자기 음식점을 세우도록 도와주곤 했는데, 이 과정은 요즘 대형 음식점 프랜차이즈가 하는 것과 흡사했다. 새로 도착한 사람에게 미국에서 인기 있는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 주고, 이들이 기존 중국 음식점들의 상권을 침해하지 않고 식당을 열 수 있는 곳을 찾아주는 식이다.

완톤 폰트가 사용된 중국 음식점 간판 (이미지 출처: OutKick)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국 어느 지역의 테이크아웃 중국 음식점에 가도 볼 수 있는 표준 중국 음식 메뉴다. 이 중에는 찹 수이, 완톤 수프, 제너럴 조 치킨 등이 있다. 미국 전역에 중국 음식점이 퍼질 때 이 표준 메뉴가 따라갔고, 그와 함께 폰트도 확산된 것이다.

반복, 효과, 효율성

2018년의 한 디자인 연구에서는 미국 내 이집트식, 중국식, 독일식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과 음식점의 이름을 각 문화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어 온 에스닉 폰트로 적은 카드를 피험자에게 주고 국가별로 분류하라고 하고 걸리는 시간을 측정했다. 그랬더니 (문화 중립적인) 헬베티카 폰트로 적은 카드를 분류하는 데 걸린 시간과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흔한 이집트 식당 이름에 완톤 폰트를 사용하고, 흔한 중국 음식점 이름에 "독일 폰트"인 프락투어를 사용하는 식으로 섞었더니 반응 시간이 30% 더 걸렸다.

완톤 폰트 같은 진부한 폰트가 계속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은 자주 사용되는 클리셰를 빠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식당이 특정 문화의 음식을 판다면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주목을 끌어내는 방법도 없다.

프락투어 폰트가 사용된 히틀러의 '나의 투쟁(Mein Kampf)' 초판본
참고로, 프락투어 폰트는 19세기 독일에서 민족주의적인 표현으로 개발된 서체다. 고딕(여기에서 고딕은 한글 폰트에서 말하는 고딕이 아니라, 독일 지역의 역사, 문화의 근원이 되는 Gothic) 스타일의 이 폰트는 가독성은 무척 떨어지지만, 독일인들, 특히 나치가 이 폰트를 좋아했고,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인 '나의 투쟁'의 표지에 이 폰트를 사용했다. 재미있는 건, 그랬던 나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폰트를 "유대계 폰트"라고 비판하며 사용을 금했다는 사실이다.
프락투어 폰트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이미지 출처: MyFonts)

그렇게 효과가 있으니 더 많이 사용하게 되고, 더 많이 사용되니 클리셰는 더욱 강화된다. 그 결과, 서구의 중국 음식점부터 중국 요리를 설명하는 책, 그리고 식료품점의 중국 제품까지 이 폰트를 사용해서 고객의 눈길을 빠르게 사로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톤 폰트=중국계 (혹은 아시아계)’라는 등식이 만들어지자, 이들을 조롱하고, 공격하고, 타자화하는 데도 이 폰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앤디 김을 공격한 상대 후보의 선거 홍보물이 그런 예다. 프락투어라는 폰트는 독일에서 온, 독일인이 만든 폰트이지만, 완톤 폰트는 다르다.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중국 이민자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다만, 그 덕분에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비즈니스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을 버텨낼 수 있게 해줬다.

인종주의일까?

그런 이유로 보먼은 백인이 만들어 내고 중국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사용해 온 폰트를 인종주의적인 폰트라고 낙인찍는데 조심스럽다. "타이포그래피를 통한 조롱은 중국인들이 받았던 많은 조롱 중 하나에 불과하다. 기본적인 인권을 얻기 위해 싸우는 상황에서 자국 문화의 진정한 표현 같은 건 사치였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과연 인종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있느냐를 판단하고 싶다면 아주 좋은 비유를 제시한다. 그는 "타이포그래피란 귀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에 해당하는 시각적 표현"이라면서, 액션 무비 예고편에 들어가는 목소리를 어린애들이 보는 만화에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책의 표지에 사용되는 폰트도 그 책의 성격에 따라 분명하게 다르게 선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세계 양궁협회는 한국 선수의 이름에 완톤 폰트를 사용해서 비판을 받았다. (이미지 출처: Resonate)

타이포그래피는 목소리다. 그런데 외국인이 특정 문화, 인종의 말을 흉내낸 가짜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인종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아래 영상을 보자.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일본인이다. 이 일본인은 백인 배우가 연기했고, 당시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인종주의적 조롱이 가득 담겨 있다.

뉴욕주 오번시에는 한국 전쟁 기념비가 있다. 여기에 새겨진 영문("KOREAN WAR")은 완톤 폰트다. 이런 기념비의 존재는 완톤 폰트가 단순히 중국계에 대한 한 조롱이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걸 세운 사람들은 희생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지 자기 마을 사람들이 지키려고 싸우다 목숨을 잃은 나라의 문화를 조롱하고 싶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뉴욕주 오번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장에 세워진 일본 차 정원 모두 완톤 폰트가 사용되었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런데 이 기념비를 디자인한 사람, 승인한 사람, 이를 매일 보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중국 음식점에서 본 글씨가 아시아 문화를 대표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 경우는 인종주의적 조롱보다는 무지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차별이 무지에서 비롯되는가? 이런 역사를 꾸준히 발굴하고 대중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