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가족과 유럽을 여행 중이다. 내가 사는 곳이든, 외국이든, 아니면 고국이든 여행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지만 그 목적지가 유명한 관광지일 때는 마음 한편에서 일종의 반감, 혹은 불안감 비슷한 게 든다. 남들이 다 하는 걸 나도 따라서 해야 하냐는 게 여행에 대한 반감이라면,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곳에 가서 실망하거나 남들만큼 즐기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게 불안감이다. 여행 한번 하면서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냐는 소리를 들을 만한 걱정이지만 나에게는 유명한 곳으로 떠나기 전에 그런 긴장이 든다.

이 긴장의 근원에는 내가 처음 해외여행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다녔을 때의 경험이 있다. 그 당시에는 해외에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터라 느긋하게 즐긴다기보다는 유명한 곳에 가서 사진을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식의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문제가 터졌고, 그걸 수습하는 과정에서 평생 기억에 남을 "진짜 여행"을 하게 되었지만, 그 여행을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이렇게 사진 찍고 이동하는 게 여행인 건가?' 하는 회의가 들었던 게 사실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긴장은 지금도 여행 전에 스멀스멀 나를 찾아오고,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그랬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마음을 이해한 듯, 뉴요커(The New Yorker)에 'A Case Against Travel(여행에 대한 반대 의견)'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글쓴이는 시카고 대학교 철학과의 아그네스 칼라드(Agnes Callard) 교수인데, 마치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글이다. 물론, 나는 여행에 반대하지 않고 글쓴이의 의도도 여행을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닐 거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말하는 '여행하는 이유'가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철학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라서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서 가장 의미 없는 말 중 하나가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라는 말이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몰랐던 걸 더 알게 되지 않는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여행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여행을 했고, 앞으로도 여행을 할 계획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많지 않아서 그렇지,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령 영국 작가 G.K. 체스터턴(Chesterton)은 "여행은 사고를 좁힌다(travel narrows the mind)"라고 말했고,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여행을 가리켜 "바보의 천국(a fool's paradise)"이라고 했다. 가장 유명한 철학자 두 사람 소크라테스와 칸트는 여행을 싫어하는 것을 행동으로 직접 보여줬다. 두 사람은 자기가 사는 곳–아테네와 쾨닉스베르크–을 거의 떠나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여행을 가장 혐오한 사람은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로, 자신의 '불안의 책(Book of Disquiet)'에서 여행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쏟아낸다.

"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낯선 곳을 혐오한다.... 여행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여행은 존재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것....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극도로 빈곤한 사람들이나 다른 장소에 가야 비로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을 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관광객들 (이미지 출처: 옮긴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여행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여행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곳이나 다른 곳에 가서 "관광객들"이 하는 건 피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건 여행이고, 남들이 하는 건 "관광"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가 한 여행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만, 남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행 이야기는 학술논문이나 꿈 얘기와 비슷해서,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의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주장이, 여행을 하면 우리가 계몽(enlightened)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 배우게 되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연결이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심지어 여행의 필요성을 의심했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 사람은 "프랑스에 있으면서 내 나라에 대해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조차 여행이 가진 장점이 있다고 했다. 존슨은 제임스 보스웰(James Boswell, 훗날 존슨의 전기를 썼다–옮긴이)에게 자녀를 위해서라도 중국 여행은 해보라고 권하면서 "자네가 중국 여행을 하면 자네 아이들은 '만리장성에 가본'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행을 이뤄야 하는 하나의 목표로 생각한다. 흥미로운 장소에 가보고, 흥미로운 경험을 해보면 흥미로운 사람이 된다는 거다. 정말로 그럴까?

왼쪽부터 에머슨(1808-1882), 체스터턴(1874-1936), 페소아(1888-1935)

페소아, 에머슨, 체스터턴 모두 여행을 하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멀어진다고 생각했다. 여행은 우리를 우리가 될 수 있는 최악의 버전으로 바꿔놓으면서도 우리는 최고의 버전으로 성장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게 바로 여행자의 착각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다면 우선 "여행"의 정의부터 알아보자.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징집되어 가면서 자기가 살던 나라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나갔다고 그가 여행자였던 건 아니다. 에머슨의 경우도 "필요"에 의해서나 "의무"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예술을 위해, 연구를 위해, 혹은 선행을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럼 다른 지역에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가는 사람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다른 지역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념품을 사거나, 사진을 찍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다녀온 후 이야기를 들려 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관광(tourism)"이란 흥미로움을 목표로 하지만–에머슨과 같은 사람들이 맞는다면–그걸 달성하는 데 실패하는 종류의 여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관광을 인류학적으로 고찰한 전통적인 학술 서적인 "Hosts and Guests(호스트와 게스트)"의 서두에 등장하는 정의를 빌리면, "관광객이란 일시적으로 여가가 생긴(leisured) 사람으로,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이 사는 곳에서 떨어진 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부분은 관광 여행은 변화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뭐가 변한다는 말일까?  

(이미지 출처: Booklooker)

같은 책의 결론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관광객(게스트)들이 호스트로부터 뭔가를 얻을 가능성보다는 호스트가 게스트로부터 뭔가를 얻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관광객들이 방문한 결과 호스트 사회에 일련의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가지만, 변화하는 것은 우리가 방문한 지역이다.

예를 들어보자. 약 10년 전, 나는 아부다비(Abu Dhabi)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관광 가이드를 따라 매 병원(falcon hospital)을 찾아갔다. 거기에 가서 팔에 매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매나 매 훈련(falconry)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정도가 아니라 나는 원래 인간이 아닌 동물 자체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아부다비에 가면 뭘 하느냐"는 질문에 가장 흔한 답이 매 병원 방문이고, 내가 그곳에 간 이유도 그거다. 그곳의 이름은 매 병원이지만 건물의 구조부터 사명 선언문(mission statement)까지 모든 것이 나와 같은 방문자들, 즉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방문지는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 같다. (입구에는 "우수 관광명소" 상장이 걸려있었다. 동물 병원인데 말이다.)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에 의해 방문지가 변화하게 되는 게 뭐가 나쁠까? 답은 이거다. 그런 방문자들은 자기가 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아부다비에서 한 일을 생각해 보라. 매 훈련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이 기꺼이 아부다비까지 가서 그곳을 방문하는 건 말이 된다. 매 병원에서 어떤 영감을 받아 내 삶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나는 아부다비를 방문하기 이전이나 이후의 나의 삶에서 매 훈련은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매 병원을 찾았다. 만약 당신이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앞으로도 부여할 생각이 없는 것을 보러 간다면, 당신이 하는 일은 그저 위치 이동(locomoting)일 뿐이다.

벨기에 브뤼헤의 관광객들 (이미지 출처: 옮긴이)

관광은 위치 이동이라는 성격으로 규정된다. "나, 프랑스에 갔었어." 좋아, 그럼 거기에 가서 뭘 했지? "루브르에 갔지." 좋아, 그럼 루브르에서 뭘 했지? "모나리자를 보러 갔지." 그럼 모나리자를 보러 간 사람들은 뭘 할까?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대략 15초 정도를 머물고 이동한다. 모든 게 위치 이동이다.

관광객은 특정 장소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걸 하려는 욕구와 그들이 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을 회피하려는 욕구, 둘 다를 따르면서 이를 스스로 합리화한다. 내가 파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모나리자와 루브르 박물관을 피했던 이유가 그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위치 이동은 피하지 않았고, 그 도시를 걸어서 가로지르기를 여러 차례 했다. 매번 거의 직선으로 걸었기 때문에 나의 동선을 지도에 모두 표시하면 거대한 별표()가 그려질 거다.

나는 여러 대도시에서 살면서 일했지만, 그런 곳에서 하루 종일 걸을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파리에서는 그렇게 걸어 다녔을까? 사람들은 여행지에 가서는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준을 잠시 접어둔다. 시간만 그러는 게 아니다. 평소의 음식 취향, 예술적 취향, 혹은 선호하는 놀이 활동의 기준도 내려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을 하는 목적이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미술관에 가지 않던 사람이 단순히 변화를 경험하려는 목적으로 여행지에서 미술관을 찾아갔다고 하자. 그림으로 가득한 방에 서서 무슨 기분이 들까?

매가 가득한 방에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일 거다.


'여행에 대한 소수의견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