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이 가진 목표가 어떻게–역설적으로–목표 달성을 방해하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작가 워커 퍼시(Walker Percy)가 쓴 에세이 "The Loss of the Creature"에 등장하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려 한다.

먼저, 미국에 있는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에 도착한 관광객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유명한 그랜드캐니언에 가기 전에 그곳에 관한 어떤 이미지를 이미 형성했다. 그리고 직접 보니 사진과 그림엽서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사진에서 본 거랑 완전히 똑같아!"라고 감탄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필 그날 날씨가 좋지 않아서 색이나 그림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면 속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날을 잘못 고른 거다. 깊은 계곡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으니 자신이 가졌던 이미지와 비교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 관광객은 "단순히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발밑에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도 있다."

그랜드캐니언 (이미지 출처: Outsideonline)
그랜드캐니언에 가끔 이런 날이 있다. (이미지 출처: CBS News)

이번에는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주에 살면서 멕시코를 여행하게 된 커플을 생각해 보자. 여행은 재미있는데, 다소 뻔한 풍경이 살짝 불만스럽다. 그러다가 길을 잃는다. 바위로 덮인 산을 몇 시간 동안 운전하던 끝에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아주 작은 마을"에 도착하는데, 우연히도 그곳에서는 종교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미국인 관광객 커플은 마을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마치 그림처럼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현대 문명의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진짜(authentic) 멕시코"를 봤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아이오와로 돌아가 민족학(ethnology)을 연구하는 친구를 만나 자신들이 경험한 걸 쏟아놓는다. "네가 직접 봤어야 해! 우리랑 다시 거기에 가자!" 그렇게 해서 이들은 친구를 데리고 그 마을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커플은 이번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보는 게 아니라 친구인 민족학자의 표정을 살핀다. 이들은 친구가 마을 사람들의 춤을 흥미롭게 생각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민족학자가 "진짜라고 인증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관광객은 겸손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한 경험에 대한 판단을 민족학자, 그림엽서와 사진, 그리고 특정 관광지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규정하는 일반적인 여론에 아웃소싱한다. 그런데 관광객들이 진정한 경험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역설적이지만–이들의 이런 겸손함, 이렇게 "경험에 열린 태도" 때문이다.

관광객들은 이런 이미지를 보고 찾아가서 똑같은 장면을 자기 사진에 담아온다. 그리고 "너무 멋있어! 사진이랑 똑같애!"라고 여행담을 들려준다. (이미지 출처: Grand Canyon National Park: 100th Anniversary, Anderson Design Group)

앞서 언급한 에머슨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바티칸을 찾아다녔고, 궁전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사람들이 권하는 것들을 보고 그 광경에 취하고 싶었지만 취하지 않았다." 조각상과 그림 앞에 서서, 혹은 매를 팔에 올려놓고 뭔가를 느끼려고 했지만, 실패한 많은 사람들이 에머슨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에머슨과 퍼시는 이게 왜 불가능한 요구인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관광객이 된다는 것 자체가 자기의 느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특정 경험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관광객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관광객들이 특정한 곳을 여행하게 되는 동기가 꼭 가보라는 '다른' 사람들의 권유이기 때문에 애초에 특정 경험의 진짜 여부를 결정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옮긴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바다를 경험하려는 관광객의 욕구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가능하다. 퍼시와 에머슨은 미학적(aesthetic) 측면에 초점을 맞춰 여행자들이 자기가 찾는 감각적 경험을 하기 힘든 이유를 설명했다면, 페소아와 체스터턴은 윤리적(ethical) 측면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여행하는 사람들이 왜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연결(connect)되지 못하는지를 탐구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나는 사람들을 자세히 바라보며 그들이 입은 옷, 그들의 행동, 소통방식을 살폈다. 나는 내 주위의 프랑스인들에게서 프랑스적인 것(Frenchness)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했던 거다. 이런 식으로는 친구를 만들기 힘들다.

같은 이유로 독일에 가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의 "독일적 특징"을 찾으려 애쓰게 된다. (이미지 출처: 옮긴이)

페소아는 자기가 "영혼을 가진 진정한 여행자"를 하나 안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소년인데, 이 아이는 브로슈어 수집에 집착하고, 신문에서 지도를 보면 스크랩을 하고, 머나먼 나라 도시의 기차 시간표를 외웠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전 세계의 항로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사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떠난 적이 없었다.

체스터턴 역시 그런 탁상 여행자(stationary traveler)들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 그는 "(영국의) 햄스테드나 서비톤에 있는 집에서 랩랜드나 중국, 파타고니아에 사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도 있었지만, 맹목적이고 자살에 가까운 충동으로 멀리까지 찾아가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인하는, 그런 생각 없는 관광객들"에게는 "슬프고, 어쩌면 비극적인 면"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멀리 떨어진 장소나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여행 자체가 가진 비인간적인 효과(dehumanizing effect)에 있다. 여행은 그걸 하는 사람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밀어 넣어 관객(spectator)이 되게 한다.

체스터턴은 멀리 떨어진 존재를 적절한 방식으로–즉, 직접 찾아가지 않고 멀리에서–사랑하는 것은 인류를 더욱 연결된 존재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햄스테드에 사는 어느 영국인이 먼 나라 사람을 "노동을 하고, 자식을 사랑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 생각한다면, 그 모르는 사람에 관한 어떤 근본적인 진실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자기 집에 앉아서 모르는 사람에 대해 가지는 동지애(인류애)는 허상이 아니"라면서, 이를 "내적 사실(inner reality)"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직접 만나고 싶어 멀리까지 찾아간다면 오히려 그런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게 여행이다.

한때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파타고니아에 거인들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퍼져 있었다. 직접 가보지 않고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이미지 출처: Princeton University Library, Quasar Expeditions)

관광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거다. 우리는 여행에서도 돌아온 우리가 어떤 사람일지 이미 알고 있다. 휴가는 이민이 아니고, 대학교 졸업도 아니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사랑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이민, 대학, 취업, 사랑은 빠져나왔을 때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르는 터널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반면 여행자는 여행에서도 돌아와도 기본적인 관심사, 정치적 견해, 사는 방식에 변화가 없을 것을 확신하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부메랑 같아서 당신이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런 얘기가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그래서 나의 여행은 환상적이었고, 심오했으며, 나의 가치를 깊게 만들어주었고,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었고, 나를 세계시민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변화는 본인이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페소아나 체스터턴, 퍼시, 에머슨은 모두 여행자들은 자신이 변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착각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자기성찰(introspection)을 통해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여행을 통해 변하는지 정말로 알고 싶다면 여름에 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살펴보라.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어떤 상태일 것 같은가? 그들은 자기의 여행이 인생을 변화시켰으며, "평생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경험이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믿음, 도덕적 가치에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가? 아니, 달라진 게 조금이라도 있을까?

철학자 칸트가 규칙적으로 걸었다고 해서 유명해진 '철학자의 길' (이미지 출처: 옮긴이)

여행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건 전혀 신비로운 일이 아니다. 진짜로 신비로운 건, 왜 우리가 여행에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지이다. 휴가철에 떠나는 여행이 단지 변하지 않을 변화를 추구하고, 무상함을 인정하는 행위라면 왜 의미에 집착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쉽지 않기 때문 아니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쩌면 그게 이 퍼즐의 해답일지 모른다. 앞으로 다시는 여행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의 삶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보라. 삶에 특별한 변화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남은 앞날은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앞으로 이런 생활을 계속 반복하다가 죽는 거구나"하고 말이다. 여행은 이렇게 큰 시간의 덩어리를 여행 이전과 여행 이후로 나누고, 그 너머에 있는 불가피한 죽음이 잘 보이지 않게 가려준다.

그리고 그걸 가장 영리한 방법으로 한다. 이를 먼저 맛보게 하는 거다. 언젠가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신나는 일, 배움의 경험을 하고 있다는 내러티브로 포장해야만 이런 생각을 한다. 경험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변화하는데, 그걸 증명할 기념품도 있고, 사진도 찍는 거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했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가 아닌 우리는 그 준비를 여행으로 한다. (Socrates said that philosophy is a preparation for death. For everyone else, there’s trav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