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행이 바른 여자 ②
• 댓글 남기기아래의 글은 로렐 태처 울릭이 브리검 영 대학교 'BYU Studies Quarterly'에게 게재한 글을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품행이 바른 여자가 역사에 남는 일이 드문 이유
로렐 태처 울릭, 2020
내 입으로 인정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내가 쓴 책보다는 문장 하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본 적이 있을 거다, '품행이 바른 여자가 역사에 남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문구. 이 문구가 기념품 매장이나 인터넷에서 팔리는 머그컵이나 티셔츠, (자동차에 붙이는) 범퍼 스티커, 카드 같은 물건에 사용될 때마다 내가 로열티를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끔 내게 감사 인사를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고, 시위 때 손으로 이 문구를 쓴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받기도 한다.
그런 사진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런던의 웰링턴 아치 근처에서 찍힌 사진이다. 이 문구가 담긴 밝은 핑크색 피켓을 들고 가는 사람의 오른쪽으로 경고를 의미하는 노란색 신호등이 켜져 있고, 시위대 위에는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 월계관을 높이 들고 있다. (월계수를 의미하는 laurel은 저자의 이름이기도 하다–옮긴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내가 쓴 문장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품행이 바른(well-behaved)'라는 표현이 가진 모호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의미가 하나로 정해진 게 아니다 보니 여성들이 자신이 행동을 제한하는 행동 규범에 대해 가지는 다양한 불안감을 이 표현에서 느끼는 것 같다. 이 슬로건이 작동하는 이유는 역사에 남으려면 '나쁜 행동(misbehavior, 나쁜 품행)'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런 행동을 옹호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품행이 바른 여성들도 역사에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여성들이 역사에 기록될 때는 품행이 바르다는 평판을 잃는 경우가 흔하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 뉴잉글랜드(미 동북부) 지역에서 최초로 시집을 출간한 앤 브래드스트리트(Anne Bradstreet)가 그렇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자신의 시집 'The Tenth Muse Lately Sprung Up in America (최근 아메리카에 나타난 열 번째 뮤즈)'에서 이렇게 말한다.
트집 잡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욕해 I am obnoxious to each carping tongue
손에 펜 대신 바늘을 들고 일하는 게 낫다고.... Who says my hand a needle better fits, . . . .
여성의 지능을 비하하는 사람들에게 For such despite they cast on Female wits:
내가 나의 능력을 증명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If what I do prove well, it won’t advance,
그들은 내가 다른 데서 훔쳐왔거나 운좋게 만들어낸 거라고 할 테니까 They’l say it’s stoln or else it was by chance.
슬픈 사실은 "트집 잡는 사람들" 중 일부가 여성이라는 것이다. 운좋게도 브래드스트리트에게는 자기를 지지해 주는 남성들이 주위에 있었다. 이들이 그의 시를 런던으로 가져갔고, 1650년에 출간될 수 있었다.
나는 '좋은 행동(품행)'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는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 규범에는 암묵적인 것도 포함된다. 대부분의 경우 규범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아이들은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길을 건너면 안된다고 배워야 한다. 운전자는 차를 길의 오른쪽에서만–어떤 나라에서는 왼쪽이지만–운전해야 한다. 규범은 가족과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준다.
하지만 어떤 규범은 우리를 해치고, 어떤 규범은 (세월이 지나)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걸 제일 먼저 발견하는 사람들이 역사에 남는다. 그들은 버스 뒤에 앉기를 거부하고, 단추가 달린 신발이나 코르셋을 거부한다. 그들은 새로운 법을 만든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유명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만드는 변화는 작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들은 변화를 만들어 낸다.
역사학자인 나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공유해 주신 분들이 참 고맙다. 1980년대 초쯤, 나는 뉴햄프셔주 워너(Warner)에 사는 여성들이 시작한 구술사(oral history) 프로젝트에 고문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원래 그 도시의 역사 편찬 위원회가 발간한 역사책에는 여성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마을 역사를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거다. 그 마을 최초의 납세자, 마을의 첫 관리(공무원), 의사, 방앗간 주인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오래된 마을 건물들의 사진과 이런 저런 전쟁에 참전했던 마을 남자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전형적인 마을 역사 말이다.
워너에 사는 여성들은 이런 내용만으로 이 동네 역사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 이 도시에서 자란 이들은 이 도시가 여성들이 없이는 유지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정주부와 아이들의 어머니, 공립학교의 교사, 간호사, 전화 교환수, 4-H 지도자, 위탁 아동들을 키우고, 마을에 기금 모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워너의 구술사 프로젝트는 이런 여성들을 인터뷰해서 기존 역사에 빠진 곳을 채우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모든 여성을 인터뷰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인터뷰 대상을 선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고른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가 더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여성들에 집중할 경우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유, 즉 이 프로젝트가 부수려고 했던 관습을 오히려 강화하는 행동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구술사 기록팀은 가장 나이가 많은 여성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결정도 문제에 부딪혔다. 자기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해 인터뷰를 거부하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을 관리하고 자녀를 키우는 게 역사가 될 수 있냐는 거다. 어떤 분들은 자기보다 젊은 여자들이 인터뷰하면 자신의 삶을 잘못 해석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보수적인 마을이라 페미니즘–이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여전히 옛날식으로 "여성해방(women's lib)"이라 불렀다–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듯 타깃으로 하는 집단이 가진 우려와 그들의 가치를 모두 존중하면서 힘겹게 작업한 결과, 워너의 여성 구술사 프로젝트는 여성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잘 옮겨 적어 안전하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한 연극까지 만들어졌다. 이 연극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20년 넘게 공연되며 상까지 받았다.
내가 구술사 프로젝트를 진행한 여성들에 공감한 이유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나도 내가 속한 집단의 역사에 비어있던 자리를 채우는 일을 공동작업을 통해 진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몰몬교의 공식 명칭–옮긴이)의 일원인 나는 개척기 미국 여성들의 신앙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겪고 있던 어려움을 그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비교하기 힘들었다. 개척기 여성들의 영웅적인 행동은 나를 초라해 보이게 했고, 내가 사는 시대와 장소에서 내가 겪는 어려움은 아주 작아 보였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과 함께 초창기 몰몬 여성들에 관한 좀 더 정확하고, 덜 이상화된 역사를 찾아내어 기록하는 과정에서 나의 신앙은 다시 굳건해졌고, 아내와 엄마로서의 의무와 작가가 되려는 나의 희망을 모두 지키는 과정에서 가졌던 나의 불안감도 줄어들었다.
내가 앞서 말한 유명한 문구("품행이 바른 여자가 역사에 남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를 썼을 당시 나는 남편, 아이들과 함께 뉴햄프셔주의 작은 대학도시에 살고 있었고, 독립 이전 미국 역사를 다루는 연구 세미나를 듣고 있었다. (저자는 뉴햄프셔 대학교 역사학과 박사 과정에 있었다–옮긴이) 그 세미나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교수님이 가르쳤는데, 이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학생이 아닌 역사학자(historian)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책이나 논문으로 발행할 생각이 없는 글은 쓰지도 말라고 했다. 나는 그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연구 주제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발행물 목록을 뒤지고, 발행물을 보관한 필름을 도서관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확대기를 통해 살펴보는 일을 하루에 몇 시간씩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당시 여성들의 삶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서 50여 개를 찾을 수 있었다. 그중 일부는 장례식 설교로 끝부분에 세상을 떠난 여성의 삶을 짧게 요약하고 있었고, 좋은 품행을 위한 조언들도 있었고, 성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여성들을 찬양하는 글도 있었다.
내게는 황금처럼 귀한 자료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을 연구 주제로 삼던 역사학자의 대부분은 19세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소수만이 독립 이전 시기의 여성들을 연구했지만 그런 연구자들은 당시 벌어진 마녀 사냥이나, 청교도 사이에서 분쟁을 일으킨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율법 폐기론 논쟁을 일으킨 인물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추방 당했다–옮긴이)의 재판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 보니 그들이 묘사하는 뉴잉글랜드 초기 역사는 상당히 암울했다.
나는 지루한 설교문들을 뒤지며 잘 알려지지 않은 디테일을 찾아냈고, 그렇게 해서 청교도의 신앙이 알려진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으며,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여성들에게 친화적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이듬해 봄에는 초고가 완성되었고, 이를 본 교수님은 논문으로 발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다음 몇 달 동안 나는 원고를 가다듬는 작업을 계속했고, 아메리칸 쿼털리(American Quarterly)라는 학술저널의 편집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쓴 논문은 1976년 봄, '정숙한 여성들을 찾아내다: 뉴잉글랜드 기록물, 1668-1735'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논문 링크) 이 논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코튼 매더는 이 여성들을 "숨겨진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들은 설교를 하지도 않았고, 교회 집사도 아니었다. 투표를 한 것도 아니고 하버드 대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신이나 치안판사(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서 기도를 했고, 최소 일 년에 한 번은 성경을 완독했으며, 눈이 와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해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면류관을 소망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품행이 바른 여자는 역사에 남는 일이 거의 없다.
'품행이 바른 여자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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