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l-behaved women rarely make history (품행이 바른 여자는 역사에 남는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포트(Newport)에 있는 한 기념품 매장에서 본 문구다. 잘 알려진 미국의 갑부 집안 중 하나인 밴더빌트(Vanderbilt)가의 여름 별장인 브레이커스(The Breakers, 이 장소에 대한 자세한 한글 설명은 여기에)는 다른 갑부의 저택들과 함께 이제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방문객을 끌어모은다.

이런 유적지나 박물관들이 대개 그러듯 브레이커스에도 관람을 마친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고, 내가 위의 문구를 접하게 된 아래의 컵은 그 매장에서 파는 상품 중 하나다.

(이미지 출처: Newport Style)

이 문구가 의미하는 게 정확하게 뭔지 궁금하다면, 이 컵 옆에 놓여있던 다른 상품들을 보면 된다. 이 컵은 "Vote for Women (여성에게 선거권을)"이라는 문구가 적힌 그릇, 주방 용품과 함께 진열되어 팔리는 컵이다. 사람들이 브레이커스와 함께 찾는 뉴포트의 저택들 중 하나인 마블하우스(Marble House)에서 밴더빌트 가문의 한 사람인 알바 밴더빌트(Alva Vanderbilt)의 주도로 여성의 선거권(투표권)을 지지하는 모임이 1909년에 열렸는데, 아래의 기념품들은 그 모임에서 사용되었던 물건들의 복제품이라고 한다.

'품행이 바른 여자는 역사에 남는 법이 거의 없다'라는 문구의 컵은 이런 물건들과 함께 놓여서 페미니스트의 사랑을 받는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전통이 가르치는 대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조용히 따르는 사람들은 여성의 선거권 획득처럼 역사를 바꾸는 일을 하지 못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거다.

그런데 조금만 눈여겨 보면 맨 위의 컵과 아래의 물건들은 디자인 측면에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위의 컵은 사용된 색만 다른 게 아니라, 폰트도 다르고, 디자인도 20세기 초의 것이 아니다. '품행이 바른 여자는...'이라는 문구는 여성의 선거권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사용한 문구가 아니다.

그럼 이 문구는 어디에서 온 걸까?

(이미지 출처: Newport Style)

이 문구의 진정한 의미

이 문구의 기원을 찾기 전에 먼저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Well-behaved women rarely make history"에서 '(to) make history'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영사전을 보면 do something that is remembered in or influences the course of history (역사에 기록되거나, 역사를 바꾸는 일을 하다)라고 설명한다.

우선 make를 '기록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건 "He made the Yankees' roster (그는 양키스 선수 명단에 들어갔다)"와 같은 용법으로, 역사(책)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물론 make는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사전에서 이 두 가지 의미를 1, 2번으로 나누어 설명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둘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건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들은 대개 역사를 바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를 바꾸지 않으면 역사책에 기록될 수 없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문구를 만들어낸 사람의 의도를 아는 게 도움이 된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이 문구를 처음 사용했을까?

이 의문에 답을 준 사람은 내가 미국 사회의 문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자주 도움을 받고 있는 박누리님이다. (나와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를 번역하기도 한 누리님은 '커피팟'에서 '안젤라의 시선'이라는 경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누리님이 내 페이스북 포스팅에 댓글에 남긴 내용은 이렇다. '이 문구는 원래 책 제목이고, 저자는 식민시대 초기 뉴잉글랜드에서 살았던 산파의 일기를 바탕으로 쓴 책으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대학교수. 이 책이 제목과는 달리 그렇게 페미니즘 메시지가 강한 내용은 아닌데, 내용과는 관계없이 제목이 파급력이 너무 커서 아예 캐치프레이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내게 메시지를 따로 보내서 이 표현을 쓴 저자가 로렐 태처 울릭(Laurel Thatcher Ulrich)이며, 한국에는 '산파 일기(A Midwife's Tale)'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참고로 울릭은 '산파 일기'로 퓰리처상을 받은 하버드 대학교의 역사학자다.

그렇게 알게 된 로렐 울릭의 책은 2007년에 나온 'Well-Behaved Women Seldom Make History.' 한국어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원래 책 제목에서는 seldom이라고 등장하지만, 컵이나 티셔츠 같은 기념품에는 같은 의미로 일상 대화에서 좀 더 익숙한 rarely로 교체한 문구로 등장하기도 한다. 누리님이 보낸 울릭의 책 표지를 본 후에야 내가 기념품 매장에서 찍은 사진에서 컵 뒤에도 그 책이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왼쪽이 내가 기념품 매장에서 찍은 사진

그렇다면 페미니즘 메시지가 강한 내용은 아니라는 건 무슨 말일까?

이 문구는 로렐 울릭이 처음 사용한 게 맞지만, 2007년에 발행된 위의 책에서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울릭이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76년, 아메리칸 쿼털리(American Quarterly)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학술 저널에 게재한 논문에서다. (궁금하다면 이 논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울릭은 이 논문에서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발굴해서 소개한다. 그는 논문의 서두에서 "숨겨진 여성들(the hidden ones)"라 불리는 사람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설교를 하지도 않았고, (교회) 집사도 아니었다. 투표를 한 것도 아니고 하버드 대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신이나 치안판사(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서 기도를 했고, 최소 일 년에 한 번은 성경을 완독했으며, 눈이 와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해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천국에서 받을 영원한 면류관을 소망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품행이 바른 여자는 역사에 남는 일이 거의 없다."

사실 문제의 이 마지막 문구는 그냥 팩트에 불과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 문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흔히 생각하는 것은 "품행이 바른 여자는 역사에 남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은 사회의 불합리한 요구와 전통에 굴하지 말고, 반항하고, 문제를 일으켜야 한다"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해석이 있다.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그것도 여성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보면 "역사책은 품행이 바른 여자를 다루지 않고 있으니,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 역사책에 기록하자"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거다. 울릭의 주장은 후자였다.

울릭은 이 문구를 통해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페미니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 나오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울릭은 품행이 바르지 않은 여성들, 즉 기존 질서에 저항한 여성들은 이미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차별적인 사회가 부여한 가사, 육아, 신앙생활 등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평생을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도 기록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소위 '미시사(微視史, microhistory)'의 시각으로 역사를 다시 살핀 것이다.

로렐 태처 울릭 (이미지 출처: Religious Studies Center - BYU)

그렇다면 로렐 울릭의 문구를 그렇게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울릭이 평생 해온 연구를 제대로 안다면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그런 해석은 오해이며, 문구를 사용해서 남성중심의 사회질서를 거부하자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할 때는 저자의 말을 직접 들어봐야 한다. 마침 울릭이 2020년에 이 논쟁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힌 글을 찾을 수 있었다. 학자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소개하면서 이 문구를 처음 만들었던 의도와 이 문구를 환영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밝히는 글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짧은 글 안에 자신의 생각을 담은 솜씨를 보면 어떤 사람들이 퓰리처상을 받는지 알 수 있을 거다.


'품행이 바른 여자 ②'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