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논문을 쓰면서 내가 가졌던 목표는 그들의 신앙심을 찬양하는 것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역사를 부여하고 싶었다.

"정숙한 여성들을 찾아내다"는 내 이름으로 발행된 첫 논문이다. 이 논문을 쓴 것이 내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결정하는 동기가 되었다. 나는 설교문에서 보여지는 이미지 아래 숨겨진 것을 탐구해서 당시 여성들의 삶을 형성한 현실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사는 집에서 반경 한 시간 이내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들로 연구의 지리적인 범위를 제한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 연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범위를 한정하는 바람에 좀 더 멀리 떨어진 보스턴이나 케임브리지에 있는 대형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질 수 없었지만, 대신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지역의 기록물과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로렐 태처 울릭 (이미지 출처: Continuum - The University of Utah)

그렇게 해서 찾아낸 기록 중에 여성이 직접 손으로 쓴 건 사실상 전무했지만, 법원 기록과 원주민에게 붙잡혀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 가정집 살림살이를 기록한 목록, 비석에 적힌 내용, 자수, 그리고 앤 브래드스트리트의 시를 발견할 수 있었고, 남성들이 쓴 편지나 일기에 간혹 등장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도 여성에 삶에 관한 디테일을 깜짝 놀랄 만큼 많이 끄집어낼 수 있었다.

1982년, 나는 내 박사 논문을 다시 편집해서 책으로 출간했다. <착한 아내들: 1650년부터 1750년까지 뉴잉글랜드 북부에 살았던 여성들의 삶, 그 이미지와 현실>이라는 제목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뉴햄프셔 대학교의 학제간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고, 내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될 만한 문서를 찾기 위해 하루 일정으로 집에서 두 시간 떨어진 메인주의 주립 기록보관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쓸 만한 기록을 찾지 못한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메인주 주립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깜짝 놀랄 기록물을 발견했다. 18세기 메인주에서 살았던 마사 무어 발라드(Martha Moore Ballard)라는 산파(midwife, 오늘날의 조산사)가 무려 27년 동안 꼼꼼하게 작성한 일기였다. 사람들은 발라드의 일기를 지역 족보와 관련한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정도로 생각했고, 어떤 학자들은 근처 마을에서 엉성하게 번역되어 남아 있는 판본에만 의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발라드의 일기를 "잡다한 지식(trivia)"만 가득한 책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잡다한 지식"에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이 일기가 지닌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

마사 무어 발라드의 일기장 (이미지 출처: Library of Congress Blogs)

마사 발라드는 평범해 보이는 행동–매일 하루에 몇 자의 기록을 남기는 일–을 철저하게 수행함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역사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만약 발라드의 딸들과 손녀들, 증손녀들이 그 일기장을 보존하지 않았더라면 사라지고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손들이 일기장을 보존했더라도 두 번의 페미니스트 운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마사 발라드의 증손녀인 메리 호바트는 첫 번째 페미니스트 운동 덕분에 1870년대에 의과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런 호바트의 결정으로 메인 주립 도서관이 마사 발라드의 일기장을 보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81년에 내가 미국 초기 여성들에게 역사를 부여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 그 도서관으로 향한 것은 두 번째 페미니스트 운동의 덕분이었다. 역사는 종종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게임이다. 집안에 내려오는 고문서에 불과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사회적 중요성을 획득하기도 하고, 반대로 한때 큰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에서 잊히기도 한다.

'산파 일기'의 출간은 나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아직 아무런 상도 받기 전에 한 젊은 영화 제작자가 뉴욕타임즈에 실린 이 책의 리뷰를 읽고 나를 찾아왔다. 이 작품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이 책에 쏟아지는 대중적 관심에 깜짝 놀랐다. 책을 쓰는 동안에는 내가 이 일기에 집착해 쓰고 있는 글에 관심을 가질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알지 못했던 건 이 책의 성공이 저자인 나나 심지어 일기를 쓴 마사 발라드에 관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성공은 출생과 죽음, 의료제도 문제와 관련한 미국인의 우려, 그리고 우리 삶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점점 더 커지는 대중적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학술 분야로서 여성학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고, 각종 상과 펠로우쉽, 그리고 교수직과 관련해서 좀 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이 책이 몇 년만 일찍, 혹은 몇 년만 늦게 나왔어도 같은 수준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산파 일기 (A Midwife's Tale) 원서와 한국어판

이 책이 1991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것도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그때까지 퓰리처상 역사 75년 동안 여성이 역사책으로 이 상을 받은 것은 단 세 번뿐이었다. 그리고 그 세 권의 책 중에서 여성 저자가 여성 인물을 다룬 책은 하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여자가 받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지만, 미국의 국립인문학재단(National Endowment for the Humanities)이 PBS 방송국이 이 책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1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자 연방 의회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소동이 있었다. 1993년에는 브리검 영 대학교가 여성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나를 키노트 연사로 추천하자 학교 이사회가 이를 거부하는 소동도 있었다. 한 해 전에 그 대학교 캠퍼스에서 초청 강연을 했을 때는 열렬히 환영했는데 말이다. 내가 1995년,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수락했을 때도 일부에서는 환영했지만, 일부에서는 창피하다며 나의 임용에 반대했다. 한 인터넷 트롤은 그 대학 역사학과에서 유명한 미국의 독립 혁명 과목이 퀼트에 대해 가르치는 과목으로 대체될 거라며 불평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지금은 유명해진 그 문구는 학술지 안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 인터넷에 그 문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기자가 여성사를 요약하는 기사를 쓰면서 글 서두에 짧은 문장 하나를 인용하려고 뒤지다가 내가 쓴 글을 발견하고 그 문구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 기자는 내가 사용한 "seldom"이라는 단어를 (같은 의미의) "rarely"로 바꾼 걸로 봐서 기억에 의존해서 적은 게 분명했다. 그 기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작가가 rarely가 사용된 같은 문구를 여성들의 말을 인용한 책에 넣었다.

그 문구가 이런 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오레건주 포틀랜드에 사는 한 젊은 여성에게서 이메일을 받으면서다. 그 여성은 나의 문구를 티셔츠에 인쇄하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다. 이메일을 읽은 나는 내가 그 문장을 어디에 썼는지 한동안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내가 쓴 글들을 여럿 뒤적인 후에야 내가 처음 발행한 학술논문에 쓴 문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무려 20년 전에 쓴 문장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젊은 여성이 자신의 프로젝트에 사용하겠다고 진심 어린 부탁을 하는데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만든 티셔츠를 내게 한 장 보내주는 조건으로 그 문구를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별생각없이 쓴 문장이 유명해진 것에 가장 놀란 사람은 나였다. 많은 경우 그 문장은 저자인 나에 대한 언급 없이 돌아다니지만, 나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팬들이 보낸 메일을 받기 시작했다. 미시시피주 잭슨의 고구마 여왕(Sweet Potato Queens)은 그 도시에서 매년 열리는 퍼레이드에 나를 초대하기도 했다.  

내 친구나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길을 가다가 이 문구를 발견하면 내게 알려준다. 어떤 기자는 기사에서 내가 몰몬교 신자이며, 여러모로 "품행이 올바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 즈음 나는 새로 옮긴 직장인 하버드 대학교에 적응하는 동시에서 몇 년 동안 매달린 새로운 책('The Age of Homespun')을 끝내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책이 발간될 무렵 나는 지쳐있었고, 좀 가벼운 작업을 하면 휴식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쓴 책, 'Well-Behaved Women Seldom Make History (품행이 바른 여자가 역사에 남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가 2007년에 나왔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해줬다. 이 문장이 엘레노어 루즈벨트나 마릴린 먼로가 한 말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확실하게 줄어든 것이다. 그 책의 서문에서 나는 지금 이 글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대부분 했다. 나는 이 문구의 원래 의미가 뭐였는지를 주장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이 문구가 슬로건으로 사용되는 방식 중에는 내가 더 좋아하는 것도, 덜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그럴 힘이 있다고 해도 이 문구의 사용을 막고 싶지는 않다고 썼다. 나는 "학생과 교사, 퀼트를 만드는 사람과 간호사, 신문 칼럼니스트, 양로원의 할머니, 도시의 시장들을 포함해 많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역사를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한다고도 적었다. 그 서문을 오늘 다시 쓴다면 이 리스트에 우주비행사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대통령 후보를 추가하고 싶다.

그 책 자체가 수 세기를 넘나들며 어떻게 사람들이 오래된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사용하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이는지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 책에서 고대 아마존의 전사들부터 원더우먼까지 여자 전사들을 살펴 보고,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어논(Anon)'과 보츠와나의 채색된 집들을 연결하고, 양동이를 걷어찬 오리어리 부인의 암소(1871년 시카고 대화재를 일으켰다고 전해진다–옮긴이)와 채색필사본 속의 붉은 암소를 연결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여성사가 등장하게 된 것을 간략하게 살펴보며 책을 마무리했다. 1970년대는 나같은 여성 연구자들이 우리 여성들이 살았던 세상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 본 시대였다.

울릭의 문구가 들어간 직소퍼즐 상품 (출처: Almighty Girls)

나는 이 슬로건을 사용하도록 허용해달라는 이메일을 지금도 받는다. 그렇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사람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허락 없이 사용해도 상관없다. 그 문장은 이미 내 손을 떠나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지적재산권이 소멸된 상태)에 들어간 지 오래다. 그러니 원한다면 그 다섯 개의 단어에 여러분이 부여하고 싶은 의미를 마음껏 부여하시길 바란다. 그렇게 해서 말썽이 일어나면 (저자는 '품행'을 이야기하고 있다–옮긴이) 그 책임은 내가 아닌 여러분에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