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삼성증권은 '2026년, 글로벌 1위 업체가 바뀐다'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현재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판매량 순위는 토요타, 폭스바겐(그룹), 현대-기아가 각각 1~3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3년 후인 2026년이면 현대-기아가 1위를 하고 토요타와 폭스바겐이 그 뒤를 따르게 된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기 때문에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지만, 이런 순위 변동을 예상하는 이유는 단순히 현대-기아차가 앞으로 자동차를 더 잘 팔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삼성증권은 토요타와 폭스바겐의 자동차 판매량이 지금보다 많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토요타는 올해 1,010만 대에서 2026년에는 890만대로, 폭스바겐은 850만 대에서 770만 대로 줄어든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예측이다.

(출처: 삼성증권 보고서)

토요타와 폭스바겐은 모두 시장 점유율이 하락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유는 약간 다르다. 토요타의 경우는 내연기관(ICE) 차량의 상품성도 하락하고 있지만, 전기차 전환이 한국과 미국의 경쟁업체들에 비해 늦은 것이 중요한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토요타가 휴대폰의 강자였다가 스마트폰으로 전환이 늦어 몰락하게 된 노키아와 비슷한 운명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전기차 판매를 빠르게 늘려가고 있는 폭스바겐은 왜 순위가 하락하게 될까?

바로 중국 시장 때문이다. 보고서는 폭스바겐이 "2019년 글로벌 판대 대수 1,090만 대로 1위에 등극한 후, 토요타와 1위 경쟁을 하게 된 것은 중국시장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시장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폭스바겐과 아우디가 뛰어난 성적을 내면서 세계 1위를 넘볼 수 있는 메이커가 된 것이다. 문제는 중국의 자동차 시장이 전기차 중심으로 빠르게 전환하면서 BYD 같은 중국 자동차 기업들의 실력이 월등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폭스바겐도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질세라 전기차를 뽑아내고 있지만 최근 나오는 중국 전기차의 다양한 기능과 성능에 비하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폭스바겐 그룹이 중국에서 차를 많이 팔던 시절은 이미 끝났고, 앞으로도 과거의 시장 점유율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올해 1분기 중국 자동차 시장의 업체별 점유율 (출처: Car News China)

폭스바겐과 미국 시장

흥미로운 건 현대-기아차 그룹이다. 이 회사는 현재 세계 시장에서는 폭스바겐의 뒤를 바짝 쫓고 있지만 중국 시장에서 그 존재가 미미한 수준이다. 중국의 자동차 기업들이 빠르게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요 시장은 아직 글로벌이 아닌 중국의 내수 시장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중국 기업들과 직접 경쟁해야 하는 폭스바겐과 달리 현대는 중국 전기차의 성장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중국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것이 리스크에 덜 노출되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그렇다면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는 어떨까? 중국에서 폭스바겐이 차지하고 있는 점유율(10.36%)과 비슷한 점유율을 미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회사가 현대-기아차(10.94%)다. 그런데 앞으로 현대-기아는 미국에서 점유율을 늘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폭스바겐은 중국에서 점유율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3년 후 두 기업의 순위가 바뀐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다.

2022년 미국 자동차 시장의 업체별 점유율 (출처: Statista)

그럼 폭스바겐은 미국 시장에서 이제까지 뭘 하고 있었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답은 "내내 고전 중이었다"로 요약할 수 있다. 폭스바겐은 미국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기업이 노력하는 건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모든 기업이 노력하는 건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 철수는 하지 않았지만, 전혀 의지가 보이지 않는 자동차 브랜드들이 많다. 폭스바겐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 특수가 언젠가는 끝날 것으로 예상한 것처럼 무던 애를 쓰는 게 보였다.

문제는 상품성이었다. 승용차면 승용차, SUV면 SUV, 내놓을 때마다 리뷰어들은 추천하지 않았다. 이 정도 가격이면 더 좋은 경쟁 제품을 살 수 있는데 굳이 폭스바겐을 살 이유가 있냐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점점 중요해지는 전자장비는 현대-기아를 따라오지 못했고, 동력 성능은 그저 그랬고, 디자인은 항상 유행이 지난 몇 년 전 차를 보는 것 같아서 미국차에 밀렸다. 그런 폭스바겐이 내세울 수 있는 건 이 차가 독일제라는 "족보"였다. 2008년부터 7년 동안 사용했던 "Das Auto" 광고 캠페인이 대표적인 예다. 영어로 번역하면 The Car에 해당하는 이 표현은 폭스바겐이야말로 진짜, 원조 자동차라는 의미를 독일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전달한 거다.

독일제라는 족보에 대한 강조가 중국 소비자들에게는 어필했을지 모르지만, 미국 소비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독일 브랜드가 중요하다면 BMW나 메르세데스 벤츠를 사겠는데 프리미엄 브랜드가 아닌 폭스바겐(미국인들은 "박스웨건"이라고 발음한다)은 프리미엄 브랜드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돈을 더 주고 (한국이나 일본차보다) 가성비가 떨어지는 차를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폭스바겐이 미국 시장에서 꾸준히 차를 팔면서도 큰 재미를 보지 못하는 상황은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2015년에 소위 디젤게이트가 터졌다. 폭스바겐을 필두로 유럽의 자동차 기업들이 "클린 디젤"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배기가스 배출량을 조작하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독일 자동차 기업에 대한 신뢰에 큰 손상을 입혔고, 특히 이미지가 추락한 폭스바겐은 Das Auto 캠페인을 중단하기로 한다. 독일 기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독일 자동차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거다. 그 결과 폭스바겐은 미국에서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독일제'라는 이점도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국차 브랜드 스카우트

폭스바겐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되었다. 중국 시장에서 계속 경쟁을 이어가겠지만 과거와 같은 성공, 혹은 시장 점유율은 다시 찾아오기 힘들다면 중국 다음으로 큰 미국 시장에서 다시 한번 진검승부를 해서 점유율을 끌어올려야 한다. 이 시장에서 지금처럼 3%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으면 폭스바겐 그룹이 꿈꾸던 세계 1위는 절대 달성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폭스바겐은 아주 특이한 결정을 내린다. 독일차의 이점을 살릴 수도 없다면 미국 브랜드로 변신하겠다는 것.

물론 폭스바겐 그룹이 이름을 바꾸는 건 아니고,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기로 한 거다. 기존의 자동차 기업이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토요타의 렉서스, 혼다의 어큐라가 그랬고, 현대의 제네시스도 그렇게 등장한 브랜드다. 볼보의 경우는 전기차 전용 브랜드로 폴스타(Polestar)를 내세웠고, 현대 아이오닉의 경우는 현대의 엠블럼을 달고 있지만 전기차만을 생산하는 서브 브랜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모두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거나 자사가 가지고 있던 브랜드를 활용하는 경우다.

폭스바겐은 지금은 단종된 오래된 미국차 브랜드를 사기로 했다. 이제는 미국인들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스카우트(Scout)라는 브랜드다.

1971년에 나온 스카우트 800B 코만치 (이미지 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스카우트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컴퍼니(International Harvester Company, IHC)라는 자동차 회사가 1961년부터 1980년까지 만들어 팔았던 오프로드 자동차다. 지금 기준으로는 스포츠 유틸리티(SUV)로 분류되겠지만 당시만 해도 SUV라는 분류가 없었다. 말하자면 SUV의 선조 격인 자동차 브랜드. 이런 자동차를 만든 인터내셔널 하베스터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트랙터와 같은 농기계를 만들다가 자동차와 트럭을 만들게 된 회사였다. 따라서 오프로드 자동차는 이 회사가 자동차 시장에 들어가는 자연스런 방식이었을 거다.

이 자동차의 브랜드는 누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인터내셔널 하베스터가 문을 닫으면서 상표권은 내비스타(Navistar)라는 홀딩 회사로 넘어갔고, 폭스바겐은 이 회사를 2020년에 인수한다. 스카우트는 그렇게 폭스바겐의 손에 넘어왔다. 이 내용을 보도한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는 폭스바겐이 아틀라스(Atlas)라는 SUV 외에는 대부분 유럽에서 팔리는 승용차를 그대로 미국으로 가져와 판매해 왔고, 이런 식으로는 앞으로도 미국에서 시장을 확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2021년 3월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있는 본사에서 열린 회의에서 내비스타가 가지고 있던 스카우트 브랜드를 되살려 '부활한 미국차'로 브랜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단순히 폭스바겐의 라인업에 서브 브랜드를 하나 더하는 게 아니다. 볼보의 폴스타처럼 전기차 브랜드로 런칭하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오프로드가 가능한 SUV에 특화시킨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라인업이라면 그냥 새로운 브랜드를 하나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 미국 시장의 까다로움이 있다. 새로운 브랜드가 나와도 쉽게 적응하는 한국 소비자들과 달리, 미국 소비자들은 아무리 유명한 자동차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특정 자동차 브랜드에 추억이나 역사가 쌓여있지 않으면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반대로 그저 이미지와 디자인만 조금 가져왔어도 역사가 있는 브랜드는 다르게 취급한다.

포드가 되살려낸 브랜드 브롱코 (이미지 출처: Autotrader)

몇 년 전 포드가 되살려낸 브롱코(Bronco)가 좋은 예다. 브롱코는 잦은 품질 문제와 O.J. 심슨(Simpson)의 아내 살인 혐의와 연관된 이미지 문제 등을 겪다가 포드가 단종해 버린 브랜드다. 하지만 근래 들어 소비자들 사이에 4륜 구동 자동차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지프(Jeep)와 같은 브랜드가 독차지하는 것을 본 포드가 이 시장에 뛰어들기로 하면서 자사가 갖고 있던 브롱코 브랜드를 부활시키기로 했다.

폭스바겐이 내연기관 자동차가 아닌 전기차로만 이뤄진 라인업으로 스카우트의 브랜드를 새롭게 만들기로 한 것은 트럭과 SUV를 만드는 전기차 제조사인 리비안(Rivian)의 인기와 테슬라가 내놓겠다고 한 사이버트럭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가장 중요한 건 "미국인이 만드는 미국 자동차 브랜드"라는 이미지다. 1960년대만 해도 지프는 군용 오프로드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스카우트는 민수용 오프로드를 대표했기 때문에 비록 나이 든 세대만 기억하더라도 계보 하나만큼은 자신할 수 있다. 그리고 폭스바겐은 그런 브랜드 이미지에 걸맞게 생산 공장도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세우기로 했다.

1969년에 나온 스카우트 800 모델 (이미지 출처: The Wall Street Journal)
폭스바겐이 준비 중인 스카우트의 SUV와 픽업트럭 렌더링 (이미지 출처: Bloomberg)

폭스바겐으로서는 자동차 기업들이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넘어가는 지금이 절대 놓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소비자들이 기존 자동차 업체들에 대해 가졌던 품질, 브랜드 가치에 대한 이미지를 전기차를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는 폭스바겐에 국한된 게 아니다. (근래 들어 로고/엠블렘을 교체한 기아차를 몰라보는 미국 소비자들 중에는 새로 나온 전기차 브랜드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가 이런 인식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폭스바겐의 미국차 브랜드 인수 전략은 그동안 브랜드 이미지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기업이 보호무역주의가 되살아나고 리쇼어링(reshoring)이 확산하는 시대에 선택할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