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예주인 이야기 ②
• 댓글 남기기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평생 살았던 드레드 스콧이 (그의 노예주가 돈을 받고 풀어주기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자유의 몸이라고 주장한 법적 근거는 뭘까?
앞의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드레드 스콧의 노예주였던 존 에머슨은 군의관으로 여러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돌아다녔고, 드레드와 헤리엇 스콧 부부를 노예로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머물던 곳 중에는 당시 노예제도가 금지된 자유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리노이와 (훗날 위스컨신주로 승격하는) 위스컨신 테리토리가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는 노예제도가 불법이다.
그런데 미주리주를 비롯해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합법인 주에서 살던 에머슨 같은 사람이 자신의 노예를 데리고 자유주로 오게 될 경우는 두 지역의 법이 충돌하게 된다. 여기에는 유권해석이 필요하다. 최근 미국의 많은 주에서 대마초가 합법화되었는데 한국인이 미국을 여행하면서 대마초를 피우게 되면 생기는 문제와 비슷하다. 미국에서는 합법이고 한국에서는 불법인데 관광객은 어느 쪽 법을 따라야 하느냐는 것. (물론 이 경우 한국인은 마약이 합법적인 곳에서 사용해도 그 사실이 밝혀질 경우 한국에 돌아오면 처벌을 받게 된다.)
당시 노예제도를 금지한 북부주(자유주)에서는 노예제도가 합법이었던 남부 주에서 노예를 데리고 온 사람이라고 해도 장기간 자유주에 머무를 경우 노예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법을 갖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기준으로는 상식적인 절충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예를 데리고 여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재산권"을 인정해 주되, 장기 체류자, 거주자가 될 경우 그곳의 룰을 따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되면 영원히 자유의 몸이라는 (Once free, always free)라는 원칙에 따라 다시 노예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스콧 부부는 이미 일리노이와 위스컨신에서 2년을 살았고, 첫 딸은 자유주와 노예주 사이를 흐르는 미시시피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유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스콧 부부는 자신들의 두 딸이 노예로 팔리게 되는 상황을 가장 염려했던 것 같다.
그런데 드레드 스콧은 이런 법적인 문제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 질문은 중요하다. 그가 첫 소송을 낸 곳은 미주리주의 법원이었고, 이 소송에서 승리했지만 이 판결에 반발한 노예주의 항소로 미주리주 대법원으로 올라가서 패소했고, 이에 불복한 스콧 부부가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 노예로 살아온 사람이 이런 과정을 혼자 진행했을 리 만무하다.
이 부부가 소송을 시작하는 것을 처음 제안했던 사람은 아내인 해리엇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였다고 한다. 노예폐지론자였던 그 목사는 소송을 이끌어줄 변호사를 부부에게 소개해주었고, 백인 변호사들이 이 부부를 도왔다. 하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무료 변호(pro bono)가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소송비를 지원했어야 했다.
당시 미국에는 주로 북부를 중심으로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세상을 바꿀 판례가 나올 수 있는 사건의 경우 피고, 혹은 원고의 선정부터 세심하게 준비하고 재정적 지원이 따라붙는다. 가령 지난해 11월에 소개한 '적극적 우대 조치의 종말'에서 이야기했던 에드워드 블룸은 적극적 우대 조치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든 기금을 재판 비용으로 사용한다.
그럼 드레드 스콧 부부의 재판 비용은 누가 지원했을까?
피터 블로우와 세 자녀
찾아보면 세 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샬럿 테일러 블로우(Charlotte Taylor Blow), 마사 엘라 블로우(Martha Ella Blow), 헨리 테일러 블로우(Henry Taylor Blow). '블로우'라는 이름이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면, 맞다. 앞의 글에 등장한 드레드 스콧의 (첫 번째) 노예주 이름이 피터 블로우(Peter Blow)다. 앨라배마에서 농장을 해보려다 실패하고 미주리로 이주해서 여관을 경영하다가 존 에머슨에게 드레드 스콧을 팔았던 그 피터 블로우의 자녀가 샬럿, 마사, 헨리 블로우고, 이들이 스콧 부부의 소송 비용을 내줬다고 한다.
좀 뜻밖이고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어 좀 더 읽어봤다. 노예주의 자녀들이 한 때 자기 집에서 일한 적이 있던 노예의 소송을 돕게 된 정확한 동기는 알기 힘들지만 다음의 내용을 보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헨리 테일러 블로우: 우선 헨리는 노예폐지론자(Abolitionist)였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에 이런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헨리처럼 남부에서 자랐고, 집에서 노예를 데리고 있던 사람(그의 경우는 아버지가 노예주였지만)이 노예폐지론자가 된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노예폐지론을 따르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이를 자신의 정치적인 목표로 삼았다. 1854년에는 새롭게 만들어진 정당에 가입한다. 바로 공화당(Republican Party)다. 지금은 미국 내에서 인종주의자들이 모여드는 트럼프의 정당으로 변했지만, 애초 공화당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이 모여서 설립한 정당이었고, 에이브러햄 링컨(1860년 대통령 당선)은 이 당에서 배출한 첫 번째 대통령이기도 하다. 헨리 블로우는 이런 공화당의 당원으로 미주리주에서 상원의원으로 일했고, 링컨의 당선에 기여하기도 했다.
샬럿 테일러 블로우: 헨리의 큰 누나인 샬럿 테일러 블로우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샬럿은 '친구 없는 이들을 위한 집(Home of the Friendless)'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궁핍한 여성들을 돕는 일을 했다. 특히 그의 남편 조셉 샬레스(Joseph Charless, Jr.)는 부유한 은행가이자 상인이었는데, 조셉의 아버지, 그러니까 샬럿의 시아버지는 노예폐지운동으로 유명한 신문의 편집장이었다고 한다.
마사 테일러 블로우: 그리고 헨리의 둘째 누나인 마사 테일러 블로우는 찰스 D. 드레이크(Charles D. Drake)와 결혼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드레이크라는 사람은 아마도 이 글에서 언급한 그 어떤 사람보다 과격한 노예폐지론자였던 것 같다. 신생 공화당의 당원은 물론이고, 당내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급진공화파(Radical Republicans) 그룹에 속해있던 그는 우선 노예제도의 확대를 막고 점진적으로 폐지하자는 온건파(링컨이 속한 그룹)와 달리 노예제도를 "즉시, 완전히, 영구적으로" 폐지하자고 주장하던 정치인이다.
당시 노예제도를 즉시 폐지하자는 주장은 현재 미국에서 총기를 불허하고 압수하자는 주장, 혹은 부자들에게 중과세를 하자는 주장처럼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만큼이나 들렸다. 그 주장이 도덕적으로 틀려서가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의 재산이 걸린 문제를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실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은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 주었지만, 미국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 가정의 자녀 세 명이 노예폐지에 열심을 내게 된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노예폐지를 열심히 주장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으로 살았다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드레드 스콧은 블로우 집안에서 존 에머슨에게로 팔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후에 탈출을 시도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존 에머슨이라는 사람의 인간성과 평판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콧이 피터 블로우 밑에서 일하던 때는 상대적으로 더 나은, 혹은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짐작할 수도 있다.
물론 기록되지 않는 내용을 짐작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피터 블로우의 자녀 세 명이 모두 노예폐지론자였고 스콧 부부의 소송비용을 부담할 만큼 열심이었던 것이 완전한 우연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억지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아이린 샌퍼드
한 편에 드레드 스콧의 노예주 피터 블로우와 그의 세 자녀가 있다면, 다른 한 편에 존 에머슨과 과부가 된 그의 아내 아이린 샌퍼드 에머슨이 있었다. 존 에머슨은 드레드 스콧이 '그 사람에게 팔리느니 도망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사람인데, 그의 아내 아이린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스콧의 제안을 거부하고 수년 동안의 법정 싸움도 불사한 사람이다.
대법원에 올라간 이 사건의 공식 이름은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Dred Scott v. Sandford)다. 에머슨도, 샌퍼드도 아닌, 샌드퍼드라는 이상한 이름이 들어간 데는 사연이 있다. 원래 드레드 스콧이 자신의 노예주인 아이린 에머슨을 상대로 건 소송의 명칭은 '드레드 스콧 대 에머슨'이었다. 그런데 스콧이 1차 승소, 2차 패소를 한 후 연방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가게 되면서 아이린은 스콧 부부의 소유권을 자신의 오빠인 존 샌포드(John F. A. Sanford, 아이린의 결혼 전 이름은 Eliza Irene Sanford였다)에게 넘겼고, 존 샌포드는 스콧 부부의 새 주인으로서 소송의 당사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기록하는 법원 서기가 Sanford를 Sandford라고 잘못 기입했고,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에 엉뚱한 이름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이린 에머슨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스콧 부부를 풀어주지 않고 오빠에게 소유권을 넘겨가면서까지 소송을 이어가도록 했는데, 그러는 동안 자신은 매사추세츠주에 사는 캘빈 채피(Calvin C. Chaffee)라는 정치인과 재혼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캘빈 채피는 노예폐지론자였다.
채피는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했단다. 당시 드레드 스콧의 법정 싸움은 미국을 흔들고 있었고, 당시 스콧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의 폐지를 외치는 정치인이 자신이 결혼한 여성이 그 유명한 노예의 소유주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다.
다양한 추측이 있지만 채피는 아이린이 굳이 밝히지 않았다면 멀리 떨어진 미주리주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오빠에게 양도한 노예의 존재를 알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큰 정치적 스캔들이 되었고, 채피는 앞에서는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뒤에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드레드 스콧이라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위선자로 찍히며 정치 인생이 끝나게 되었다.
그런데 채피의 아내와 처남이 드레드 스콧의 노예주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대법원의 판결, 즉 드레드 스콧의 패소 판결이 나오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여론의 공격을 받는 중에 스콧 부부가 패소했다는 뉴스가 나온 것이다.
쏟아지는 공격에 당황한 채피는 서둘러 스콧 부부를 원래 주인인 블로우 집안으로 다시 넘겨주었고, 헨리는 그들을 노예에서 풀어주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한다. 스콧 부부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한 소송에서는 패했지만, 궁극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1857년 5월의 일이다.
드레드는 이듬해인 1858년 9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드레드 스콧이 만난 백인 노예주는 두 종류였다. 노예를 소유하는 데 양심적인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들을 재산으로서 생각하는 사람들과 한 때 노예를 소유했지만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에 옮긴 사람들이다. 두 종류의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노예주와 자유주는 지리적으로 구분되지만 드레드 스콧을 둘러싼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한 장소에 살던 사람들이다. 드레드 스콧의 소송이 대법원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가 이런 두 그룹의 경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드레드 스콧이 양심적인 백인들의 도움으로 죽기 전 1년이라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이 사건이 유명한 이유는 그가 대법원에서 패소했기 때문이다. 그가 패소했기 때문에 여론이 분노했고, 분노한 여론은 또 다른 여론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다음 글에서는 드레드 스콧이 왜 패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남북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두 노예주인 이야기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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